광주 5.18 분석(1)
광주 5.18 분석(1)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5.01.0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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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1. 5.18 광주 유공자들은 북한게릴라부대의 소모품

▲ ⓒ뉴스타운
1. 정상용의 증언

정상용은 당시 30세의 회사원이었고, 군법회의 제1심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김대중 시절에는 평민당 국회의원, 그느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 ‘정상용의 5.18 회고’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기동타격대가 10대의 학생들과 20대의 품팔이 노동자 들이었다는 것이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2. 박준성의 자료

5.18의 열렬한 호위무사인 박준성은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이자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다. 그는 2005년 9월 5일 인터넷(http://blog.naver.com/logosist/17006521)에 “광주항쟁의 '주역'은 바로 노동자였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 .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 . 5.18 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가 군법회의에 넘겨진 기동타격대원 30명은 이렇다. 윤석루(20)-자개공, 이재호(33)-회사원, 이재춘(20)-방위병, 양기남(19)-샤시공, 임성택(17)-양복공, 구성회(16)-양화공, 오정호(33)-식당종업원, 박승렬(20)-레코드사, 박명국(18)-양화공, 김상규(19)-전파사, 박영수(18)-도자기공, 안성옥(19)-목공, 김두전(19)-재수생, 정광호(20)-타일공, 염동유(23)-다방, 이성주(18)-차량조수, 김공휴(19)-나전칠기공, 남승우(19)-삿슈공, 도준식(23)-식당종업원, 남영관(18)-농업, 박홍식(21)-목공, 김기광(18)-고3, 박인수(21)-노동, 김여수(20)-용접공, 나일성(18)-가구공, 김태찬(19)-석공, 김행남(16)-노동, 김재귀(16)-고2, 영용섭(19)-나전칠기공, 장승희(19)-양화공. .”

실제로 수사기록 상에 나타난 사망자 및 1심 유죄자들의 직업분포를 보면 막노동자들의 직종은 59개종이었다. 이들은 조직화된 노조단위가 아니라 각 업소에서 개인 단위로 일하다가 도시가 불타는 것을 보고 각자 달려왔던 부나비들이다. 이 박준성의 자료는 아래 수사기록 자료와 그 방향성이 일치한다. 여기에 중요한 고백들이 있다. 5.18의 전반부는 외부세력이 와서 해주었고, 후반부만 광주의 불쌍한 노동계급들이 담당했다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다.

3. 수사기록 자료

당시 군은 광주사태 관련자 2,518명을 조사한 결과 1,957명은 훈방조치하고 561명을 검찰로 송치했다. 제1심 피고인 수는 모두 357명, 이중 252명만이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았다. 그런데 이 357명을 연령별로 보면 10대가 71명으로 20%, 20대가 216명으로 61%를 차지했다. 10-20대가 81%를 차지한 것이다. 나머지는 30대 36명, 40대 23명, 50대 6명, 60대 5명으로 집계된다.

이들의 직업은 주로 하층 계의 직업들로 무려 59종에 이르며 직업별 구체적인 숫자는 아래와 같다,

학생80 농업30 무직27 운전수24 종업원21 노동13 방위병13 교수11 목공11 상업9 공업7 회사원6 양화공5 용접공5 행상4 미장공4 광부4 목수4 선원4 교사3 변호사3 재수생3 보일러공3 교직원3 인쇄업3 조수3 운수업2 샤시공2 제과공2 석공2 신부2 자개공2 가구공2 회사이사2 재봉사2 정비공2 실내장식1 약사1 개찰원1 다방1 전기공1 변호사사무장1 서적판매원1 세공1 도자기공1 의사1 이발사1 양복점1 엿장수1 건재상1 신문보급소1 당원1 청과물상1 불럭공1 매점1 대학이사1 회장1 화가1 가톨릭 회장1(서경원)

이런 양아치로 상징되는 계급이 대한민국을 민주화시켰다고 이제껏 목청을 높여온 것은 국민의 지능을 얕보는 일종의 대국민 사기-능멸 행위였다.

사형을 받은 사람은 정동년(37, 복학생), 배용수(34,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트럭운전수), 김종배(26,학생)이고,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구두공) 허규정(27,학생) 정상용(30,회사원) 하영열(31,공원) 윤재근(28,공원) 서만석(36,상업) 홍남순(67,변호사)였다. 27일 새벽 진압작전에서 사망한 17명을 보아도 같은 결론이 나온다, 이 17명은 거의 다 13세를 포함한 10대 학생들과 20대의 천덕꾸러기들이었다. 결론적으로 5월 22일 이후 뒤늦게 호기심으로 도청에 어슬렁거리고 들어왔다가 강경파에게 최후까지 붙들린 사람들이 ‘죽은 유공자’와 ‘산 유공자’가 된 것이다.

해 석

1. 5.18 시위는 외부세력이 와서 주도했고, 재진입 작전 전에 광주를 빠져나갔다는 최고의 5.18 유공자들의 증언

1) 박준성의 글에는 그들만의 극비사항이 노출돼 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외부세력이 광주에 와서 5.18을 지휘한 후 떠난 다음에 광주의 어린 학생들과 20대의 불쌍한 노동 게급이 광주 민중항쟁을 담당했다는 이 내용은 5.18 주도세력, 5.18 지도부가 외부세력이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적시하는 내용이다.

2) “역사로서의 5.18” 제3권 (329-332)에는 김효섭의 증언이 있다.

“상원이 형은 그게 자기가 생각해도 잘 안 되겠던지, 이번에는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보도 불록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쇳토막 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토막들을 구해 녹두서점으로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보았는데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수집한 쇳토막들은 소용없게 되었다.”

박노해와 같은 좌익들은 윤상원을 5.18 최고의 영웅이며 그가 아니었다면 5.18도 없었다(윤상원 평전)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행동을 거의 끝까지 함께 한 김효섭은 5.18영웅인 윤상원이 무기탈취에 관연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무기는 5.18영웅들이 탈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세력이 한 것이라는 증언인 것이다.

3)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정상용은 이런 증언을 했다.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항쟁본부의 2인자임을 자처한 정상용은 23일 도청에 들어갔고, 당시 도청에는 위엄있고 높아 보이는 카리스마들이 도청을 지배했는데 24일에는 그들이 사라졌다고 증언한다.

4) 같은 책에서 박남선은 이런 증언을 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박남선 역시 무기 탈취자들이 광주인들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무기고를 턴 사람들은 광주사람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5.18유공자들이 이와 비슷한 증언들을 했다. 모두가 외지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글들이다.

2. 광주인들은 민주화 시위대를 구성한 적도 없고 민주화시위를 한 적도 없고, 시위를 지휘한 사람도 없었다는 데 대한 증거들

<기동타격 대장은 20세의 개념 없는 혈기파 구두공 윤석루>

광주민주화운동을 가장 크게 상징하는 존재는 ‘기동타격대’다. 민중항쟁의 돌격대로 포장되어 무시무시하고 의로운 항쟁의 전사체로 선전되어 왔다. 4.3 사건의 인민유격대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온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기동타격대는 5월 26일 새벽부터 27일 오전 4시까지만 가동됐다. 글자 그대로 하루살이로 급조된 엉성한 모임이었다. 정상용 등의 증언에 의하면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20세의 구두공으로 총도 잘 다루지 못하는 단순 혈기파였다. 이런 엉성한 구두 공원이 이름도 으리으리한 기동타격대장을 스스로 맡았기 때문에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은 것이다.

<‘항쟁본부’는 5월 26일 낯과 밤에만 존재했던 하루살이 부나비 집합체>

‘항쟁본부’, 5월 25일 늦은 밤에 급조된 ‘시민학생투쟁수습위원회’를 일컫는다. 항쟁본부는 그들이 훗날 5.18을 근사하게 미화-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이었다. 새떼처럼 각자 개별적으로 여기저기서 모여든 낯선 사람들의 집합체였지 조직이라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못 되었다. 오직 5월 26일 낮과 밤 하루 동안만 존재했다가 진압군에 의해 파괴됐다. 하루살이에 불과했던 이 항쟁본부를 놓고 좌익들은 마치 5.18이,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헌법유린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민주화시위 지휘부인 것처럼 선전-미화해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는 광주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일한 항쟁모임이었고 이들은 시위라는 것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계엄군 재진입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이웃에 있는 남남들의 체면 때문에 미적거리다 변을 당한 사람들일 뿐이다.

위원장은 조선대학교 3년생인 김종배, 그는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5.18 최고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는 윤상원이 느닷없이 전남도청으로 데려온 낯선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미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는데 그들이 곧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며 10일만 버티면 된다“는 말로 도청에 들어온 80명 정도의 10대 및 20대를 향해 결사항전을 선동했다.

여기에 26세의 화물차 운전수 박남선이 나타나 온건파 유지들을 권총으로 협박하여 내보내고 그들의 언어로는 항쟁본부, 공식적으로는 시민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이 결사항쟁 선언문이 계엄당국에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여져 27일 새벽 01시의 극비 진압작전을 불러왔다.

<두 패의 부나비 떼>

광주의 부나비들은 두 패였다. 특별한 공분이나 철학 없이 계엄군이 포기하고 떠난 도청에 하나 둘씩 모였다 변을 당한 하루살이 부나비들이 있었고,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폭력, 파괴, 살인, 정규사단 공격,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의 차량 탈취, 44개 무기고 탈취, TNT 조립, 교도소 습격 등 세계 초특급 수준의 게릴라 작전에 부화뇌동했던 또 다른 10대와 20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계엄군에 의해 현장에서 잡혀간 2,518명 속의 일부였다.

그런데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지금은 최고급의 5.18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전자의 부나비들이다. 5월 27일 진압과정에서 붙잡힌 학생 및 이른바 양아치 계급들이 중형을 받았고, 후자의 부나비들은 대부분 훈방되었거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연고대생은 잡히지 않고 모두 빠져나간 것이다.

전자의 부나비 대장은 김종배(26세 조선대생, 사형), 그의 권력행사를 완력으로 도와준 화물차 운전수 박남선 그리고 외무대신 역할을 자임했던 정상용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위험한 고강도 전투행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5.18을 주동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정보기관들과 군의 정보분석 능력이 턱 없이 부실했던 것이다.

<노근리 피난민들과 광주부나비들은 북한 게릴라부대의 소모품>

배고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지 민주화는 아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할 만큼 소외되어 왔고, 그 축적됐던 소외감이 광란의 물결에 편승하여 폭발한 것이었다. 2008년 봄으로부터 100일간 광화문에서 발생했던 촛불시위에서도 경찰차를 부수고 경찰에 폭력을 행사한 최초의 두 사람은 노숙자와 일용노동자였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공산 게릴라 작전 부대의 소모품으로 이용된다. 노근리 사건에 잘 나타나 있듯이 6.25 전쟁에서 북괴군이 늘 미군을 후방으로부터 포위하고 압박하여 미군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었던 존재 역시 적군에 이용되는 남한 국민들이었다. 광주의 부나비들이 바로 이런 존재들이었다.

결 론

1. 5.18 유공자들은 대국민 사기단 : 5.18 유공자들은 5.18이 북한특수군이 일으킨 것임을 다 알고 있고, 자기들은 기껏해야 5월 23일 이후 어슬렁어슬렁 도청에 들어갔다가 김종배의 어설픈 미항공모함설에 선동되고, 권총 발사로 무지막지한 분위기를 잡은 박남선에 주눅들고, 나가면 비겁자 되지 않을까 서로 눈치 살피며 5월 26일 밤을 새우다가 죽고 부상당하고 알아서 항복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아무런 정치의식 없이 10대 또는 20대의 철부지로 신나게 불꽃놀이 하는 심정으로, 세상 한번 뒤집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날랜 맥가이버들의 전투행위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하다가 잡혀가고 다치고 죽은 부나비 같은 존재였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뭉터기 보상금과 연금으로 국민세금 뜯어내고 자식들에 취직 및 입시 가산점 10%씩 부여하는 특전을 누려왔다는 강한 생각이 든다.

2. 5.18 유공자들은 송두률, 채동욱 같이 가증스럽고 얼굴 두껍게 적반하장 하는 사람들 : 5.18을 대대로 우려먹고 사는 유공자들은 5.18이 북한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2002년 “5.18에 북한특수군 개입했다”는 의심을 단 한 개의 문장으로 표현했던 필자에게 12명의 검은 유니폼 입은 어깨들을 보내 집과 차량과 사무실을 파괴하고 경찰들을 보내 수갑을 뒤로 채우고 8시간 동안의 압송과정과 조사받는 과정에서 때리고 욕하고 린치를 가한 후 온갖 공포감을 주입하며 101일동안 감옥에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2008년에 4권짜리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쓰자 또 그 책을 왜 썼느냐며 고소를 해 5년동안 재판을 받게 했다.

송두율이 생각난다. 떳떳이 입국한 그를 황장엽이 보고 그의 신분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밝히자 그는 황장엽을 상대로 고소를 했다가 도망갔다. 채동욱이 생각난다. 조선일보가 임여인과 혼외아들의 존재를 밝히자 채동욱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슬며시 취하했다. 이임식에 부인과 딸을 참석시켜 “나는 내 가족에게 부끄러운 일 안 했다”며 강변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의 상징이 되었다. 5.18 유공자 사람들 역시 이들처럼 스스로의 정체를 알면서도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얼굴 두껍게도 필자를 상대로 적반하장의 학대행위를 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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