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학자가 본 5.18 광주사태의 재해석
역사 학자가 본 5.18 광주사태의 재해석
  • 편집부
  • 승인 2013.07.19 13:05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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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 해석은 편결에 구속되지 않아

▲ 7월 18일 5.18 진실전국알리기운동본부 발대식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하고 있는 이주천 교수
역사가가 본 5.18 광주사태

I

1980년 5월 18일로 시작된 광주의 참변이 지난 지 어언 3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일반적으로 5.18은 4.19학생의거와 부마항쟁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한 3대항쟁으로 지칭되고 있다.

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부터 81년 8월초순까지 서울에 체류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저도 5.18을 목격한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극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속에서 어떻게 하면 취업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에 몰두했었던 당시를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5.18역사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5.18로 인해 이런 자리에 서게 될 줄을 꿈에 예상하지 못했다. 5.18로 인해 정신적 고초를 겪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5.18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축적했기에 고난 속에서도 희열을 느낀다.

새로운 증거와 증인이 나오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아니라고 부정만 할 게 아니라 함께 토론하면서, 이것의 眞僞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작업을 선행해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신체적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면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무시되고, 걸핏하면 광주시민의 명예를 운운하면서 지역감정을 들먹이고 고약한 마녀사냥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바, 이는 자칫하면 일인독재보다 더 무서운 가공할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의 시대가 개막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위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이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봉쇄·협박하고, 마음에 안드는 언론사를 위협하기 위해 민주화투쟁을 했던가를 묻고 싶다.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닌 다른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연구한 한국현대사 전공자를 찾지 못하니까 할 수 없이 의무적으로 나오게 된 결과 이 시점까지 와 버렸다. 5.18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한국현대사 전공자들이 외면하는 분위기속에서 부득이 홀로 총때를 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논객들이나 애국시민들은 이렇게 불만을 토할 것이다. “도대체 역사가들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타에 할 수없이 제가 그 따가운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 5.18은 왜 재조명이 필요한가? 그것은 ① 한국전쟁이후 민군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사건인 점, ② 90년대 법원의 판결이 80년대초 5.18광주사태 당시 국민들이 인식했던 것과 너무나 거리가 있었던 위헌성 시비가 큰 점, ③ 한국사회의 친북좌경화의 물꼬를 튼 점, ④ 수많은 의혹이 시간이 갈수록 풀리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는 점, 특히 탈북자들의 숫자가 증대되면서 북한의 소식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더욱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⑤ 국정원을 위시하여 국방부 등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진실규명의 노력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점, ⑥ 장기적 전망으로 5.18을 보는 상반된 시각과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향후 내전적 상황으로 갈 가능성 등이다.

우선 지금까지 이렇게 5.18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은 지만원박사와 미국의 김대령박사, 그리고 임천용씨와 이주성씨를 중심으로 한 탈북자들의 희생과 노고가 컸다는 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5.18역사를 연구하여 훌륭한 성과를 낸 지만원박사에게 역사학자들을 대신하여 그 노고에 위로를 드린다.

II

먼저 대법원에서 민주화운동이란 판결이 나오는 역사적의 배경을 보면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90년대에 ‘민주화의 狂風’속에서 좋게 말하면, 여야 정치인들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나쁘게 말하면 정치보복내지 여론몰이식으로 우애곡절 끝에 정리된 것이다.

5.18광주문제는 88올림픽시절에 국회청문에서 국민의 관심을 끌었고, 전두환, 노태우 등 5-6공세력들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본격적으로 사법부에 의해 재심에 들어갔다. 93년에 3당합당의 덕분에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태우 비자금 정국을 돌파하는 승부수로서 5-6공세력의 단죄를 결심하면서 안양교도소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수감하였다. 그러다가 5.18국회특별법(1997) 제정을 거쳐 5.18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고 그에 가담한 주동자들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고 보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聖域化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이란 공식은 ‘정통주의 해석’으로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

그런데 5.18은 유혈의 참극이나 사상자의 규모로 볼 때 4.19나 부마항쟁과는 달리 비교가 되지 않는 참극이요 불상사였다. 대법원 판결에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차원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장한 시민군이 정규군에게 무기를 들고 저항한 유혈이 뿌려진 사건이기에 外形的으로는 민주화투쟁의 구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중항쟁, 무장폭동, 심지어 內戰적 성격을 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2010년 이영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진실화해위 주체로 미국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과거사 정리의 성과와 의의’라는 글에서 5·18광주사태를 ‘민중 반란(a popular revolt)’으로 표현했었다가 국내에 와서 곤욕을 치렸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의 경우만 하더라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라는 전쟁의 기원설에 관한 논쟁이 마침표를 치게 된 것은 90년대 김영삼대통령이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6.25에 관한 러시아비밀문서를 입수하고 난 뒤였다. 전쟁이 끝난 뒤 무려 40년이 걸렸다. 영국의 청교도혁명(1640-1660)도 내란이냐 혁명이냐를 두고 해석상에서 정리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명예혁명(1689)이후에서야 마무리 되었으니 무려 50년이상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동학농민전쟁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동학운동으로 사용하다가 농민군이 일본군과의 交戰이 중시되어 전쟁의 성격이 강조된 결과 동학농민전쟁으로 정착된 것인데 무려 무려 100년이 걸렸다. 3.1만세운동은 태극기를 두 손에 들고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을 평화적으로 요구했기에 3.1운동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대형사건들은 일단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서 잘잘못이 가려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5.18광주사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5.18이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 불과 3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점화되고 있다. 연기가 꺼져야 재로 변하는데 더욱 불길이 번지는 느낌이 든다. 왜, 그 이유는 무엇인가?

5.18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입장은 대법원의 판결과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대법원의 판결을 흘러간 과거의 기록이 되고 새로운 증언과 사실들이 등장할 때 역사는 새로 써질 수밖에 없는 역사학의 근본적 속성 때문인 것이다. 그러기에 저명한 영국의 정치학자며 역사가인 E.H. Carr는 그의 名著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서 역사의 정의를 내리면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부단한 대화(History mean the constant conversation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라는 名言을 남겼다. 이 말은 현재의 변화하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역사가들이 과거 계속 생성되는 기록물에 대해 끊임없이 재검토하여 역사를 새로 써 나간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면, 새로 계속해서 써지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우선 5.18은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대사의 특징은 그 사건을 직접 체험한 생존자가 많이 있기에 어떻게 해석되는 가에 따라 사회적 입장과 개인적 이해관계가 크게 변하기 때문에 감정이 격하기 쉽고 증언자의 진위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계속 등장하기에 이로 인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을 국민들은 당연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III

우선 5.18이란 역사에서 논란의 핵심이 되는 부문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광주사태의 성격에서 ‘민주화운동’이란 개념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시민단체의) 운동이란 특정한 조직이 사회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해 주도록 할 목적으로 다양한 평화적 방식을 통해서 장기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정치단체에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이란 사전적 정의는 ‘정치적 권리가 제한된 민중이 참정권을 확대해 달라고 하거나 장기집권이나 부정부패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집회 및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더 달라는 요구와 이를 위한 평화적 시위를 수반함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성산사건(BC.492)은 로마군인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귀족들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린 일이 있다. 1830년대의 영국의 차티스트운동(Chartist Movement)은 노동자들의 참정권을 요구한 것으로 영국의회까지 집회 및 가두행진을 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평화적으로 과시한 것이다. 또 1차대전이 종결된 후, 유럽의 여성들이 참정권을 위해 가두집회나 평화적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에 흑인 킹 목사를 필두로 해서 흑인들은 그둘의 인권향상과 참정권 확대를 위해 투쟁한 적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서양사에서 소위 고전적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내지 민주화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뜻이 천차만별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8.15해방이후부터다. 해방이후 모든 정치세력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 중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애용했다. 그들은 자기 진영을 ‘민주진영’으로 자칭하고, 그들의 기관지로 <민주주의>라는 월간잡지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들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서양사에서 광주항쟁과 가장 유사한 사건을 들자면, 1871년 ‘파리코뮨’(Paris Commune, 3.18-5.28)이다. 최근에 발간된 김대령의 <역사로서의 5.18>(총4권)에서 코뮨독서써클을 조직한 코뮨혁명주의자들(윤상원, 윤한봉)이 파리코뮨을 모델로 하여 무장봉기를 획책했다는 주장을 5.18주동자의 증언록을 통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분석하고 있다. 김대령은 그 책, 특히 3권에서는 5.18주동자들이 파리코뮨을 모델로하여 광주코뮨, 광주해방구, 광주공화국을 만들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김대령이 주장하는 핵심골자는 “광주의 5.18시위주동자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민주적 가치를 위해 봉기한 것이 아니라, 민족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조차) 용감하게 희생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양동안교수가 집필한 <사상과 언어>에서 민족민주주의가 잘 설명되고 있다. “민족민주주의(National Democracy)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제3세계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 취하는 지도노선 또는 투쟁노선이다.”(p.284). 즉 공산주의자들이 본격적인 사회주의화를 추진할 여건에 있지 않은 지역에서 그들의 사상적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을 피하면서 궁극적으로 비사회주의세력의 역량을 동원하여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도록 할 수 있는 제3세계의 상황에 적합한 지도노선을 모색한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민족민주주의이다.

다시 파리코뮨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인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무모하게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리고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채 세당에서 황제가 항복하면서 제2제정(1852-70)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파리코뮨이 일어났다. 2월에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의회는 왕당파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공화주의적 파리사람들은 베르사이유에서 열리는 국민의회가 왕정을 부활시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임시 국민정부의 행정수반을 맡고 있던 아돌프 티에르는 파리의 질서 유지를 위해 국민방위군(주로 파리 포위전 때 싸운 노동자로 이루어짐)을 무장해제시키려고 결정했다. 그 결과 3월 18일 시 수비대의 대포들을 치우려고 하자 파리에서 저항이 일어났으며, 3월 26일 수비대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자치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했고 이들은 코뮨 (자치)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주민자치 평의회가 탄생되었다. 새 정부에는 자코뱅파와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파, 블랑키파 등이 있었다. 자코뱅파는 1793년의 혁명 전통에 의거하여 파리 코뮨이 혁명을 주도하자고 했고, 프루동파는 전국에 걸친 코뮨의 연합을 주장했으며, 심지어 플랑키파는 폭력혁명을 주장했다. 코뮨이 채택한 강령을 살펴보면 사회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급진적 민주주의적 요소가 존재했다. 1793년을 연상시키는 조치들(종교에 대한 지원 철폐, 혁명력 사용)과 제한된 사회개혁조치(10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 철폐), 노동자보다 높은 공직자의 지나친 임금 삭감 등을 추구했다.

5월말 1주일에 걸쳐 티에르의 베르사이유군대는 파리코뮨을 공격하여 잔인하게 토벌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프랑스의 계급적 분열과 당파간 대립은 지속되어 1차대전까지 연결되어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파리코뮨의 비극적 결말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카알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에 보고서를 쓰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이라는 제목에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국가해체의 상황을 목도하고 향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시도하였다. 그 뒤 파리코뮨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장시간 망각되었다가 다시 이것을 계승한 인물이 바로 레닌이다. 1917 레닌의 볼세비키혁명은 파리코뮨에서 발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씨앗을 러시아의 상황에 개조변용하여 현실화시킨 것이다.

파리코뮨은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사회주의적 임시정부의 수립이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을 쓴 무장괴한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5.18당시 광주의 무장시위대에서는 상당수의 인물이 복면을 쓴채,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위장하였다. 파리코뮨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군에게 굴욕적 항복을 포기하고 끝까지 항쟁하겠다는 愛國主義라는 대의명분이라도 있었지만, 5.18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털면서 점령한 도청 지하실에 TNT 폭탄을 운반한 무장시위대의 대의명분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5.18광주에서 마지막까지 과격파들이 무기반납을 거절하고 결사항전과 자폭을 주장한 것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한 저항이었나?

둘째로, 대법원 판결의 2중 잣대와 위헌성 여부이다. 5.18유관단체들은 97년에 대법원에서 5.18광주문제가 민주화운동으로 최종적 판결이 났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재론하지 말아달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판결을 중시한다면 먼저 1980년에 대법원이 5.18의 배후를 ‘김대중의 내란음모죄’로 규정하여 김대중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것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 판결이 다시 17년만에 뒤집힌 것이다. 97년 판결은 헌법학자(조문숙)가 쓴 <식인(食人)>에 의하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어긋나고 위헌성이 강한 것이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란 한번 판결을 내린 확정판결사건은 두 번 이상 심리·재판하지 않는다는 형사상의 원칙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3조에 보장되어있다. 이런 판결 뒤집기야말로 ‘사법부의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원의 판결이 뒤집힌다면 정치보복을 두려워하고 후임자에게 권력이양이 어렵게 될 것이다. 어떻게 마음 놓고 정치인들이 엄정한 법 집행을 할 것이며, 어떻게 소신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수가 있을 것이며, 체제 반란세력들을 어떻게 과감하게 처단할 것인가?

셋째로, 광주사태 당시 벌어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의혹들에 대해 5.18유관단체들도 마땅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어떻게 반나절만에 시민군이 전남의 38군데의 무기고를 털었고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한 동기가 무엇이며, 장갑차를 몰고 시민군을 훈련시킨 복면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12-3구의 신원미상의 시체들은 누구인가? 66구에 해당하는 행방불명자의 가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5.18당시 경찰관을 15명을 인질로 잡은 공로로 2억원의 포상을 받은 윤기권의 월북(1992년 3월) 동기는 무엇인가? 그가 정신이 이상이 되어 월북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왜 하필 가장 잘 사는 미국이 아니고 가장 못 사는 북한으로 가야만 했나?

넷째로, 새로운 사실과 증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북한군 특수부대의 침투’ 주장이다. 탈북자들은 5.18이 북한수뇌부의 치밀한 대남공작에 의해 저질러진 謀略戰이라는 것이다. 북한군이 시민군과 국군으로 각각 위장을 하여 양쪽을 총질하면서 이간질시켜서 대량의 유혈충돌을 빚게 유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5.18에 대한 ‘수정주의 해석’이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이후 북한 탈북자들의 수자가 증가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2006년부터 북한군 출신의 탈북자(임천용)들의 기자회견을 출발점으로 해서 2012년 6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를 사진을 찍어오는 데 성공하여 이를 밝힌 기자회견까지 크고 작은 증언과 이를 바탕으로 출간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까지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북한군 특수부대의 병력은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며 침투 경로는 서해안과 동해안, 그리고 육로 등 다양하게 소규모로 1979년부터 80년 5월까지 꾸준히 침투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5.18광주문제는 이런 의혹들이 말끔히 해소되어야할 숙제를 안고 있다.

의문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에 수많은 위원회가 구성되어서 과거 공안사건이나 무장반란사건을 두고 재조사를 실시하여 무죄판결과 역사해석의 뒤집기가 시도되었다. 간첩혐의가 있은 공안사범이 무죄가 되고 막대한 보상금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5.18만은 재조사나 진상규명위원회 구성에서 제외된 것이다. 100년전의 친일파 문제도 다시 거론되었고, 4.3사건도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를 재조사하게 되었다.

다섯째, 국가기관이 국정원을 중심으로 해서 북한에서 알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북한 탈북자의 입을 봉쇄하고 협박을 하는 등 앞장서서 광주사태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점이다. 북한군으로 5.18때 광주에 참전했다고 주장한 김명국씨가 노무현 정부시절에 처음 국정원에서 증언했을 때, 더 이상 그 말을 못하도록 강한 압력과 협박이 가해졌다.

IV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1979년 10.26부터 80년 5.18까지 남한의 극도의 혼란상태를 바라보면서 점찮게 팔장만 끼고 관전만 한 신사적 지도자들이었가? 전혀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북한의 대남공작에 대한 대북전문가 이영명교수와 전향한 간첩 고 김용규씨는 남한의 거의 모든 대형 사건사고에 어떤 식으로든지 북한이 개입하고 사태를 악화시켰음을 강조했던 인물들이다.

5.18 당시 북한은 한반도 통일이 무르익었음을 예고하는 축제분위기였다. 북한군이 남한으로 밀고 내려가 광주의 인민봉기세력과 연합해서 남조선을 해방한다는 화제거리로 民軍할 것 없이 사회전체가 흥분상태로 들떠 있었다. 5월 19일, 북한 인민군 고위사절단은 중국을 방문하여 모종의 비밀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북한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군인들은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5.18전후 김일성의 수상한 행동에서 그가 얼마나 광주문제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5월 8일, 극비리에 소련을 방문하여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회동했고, 5월 18일 “나는 두 개의 조선을 반대한다. 금년 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루마니아 서기장에게 말했다. 김일성이 직접 5.18교시에서,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 민중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5.18광주사태가 급기야 2주만에 진압되자, 땅을 치면서 안타까와 했다는 후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개입했을까? 월간조선(2013.4월호)의 최근 기사도 황장엽비서와 김덕홍의 증언에서 과거에 기사에 누락된 5.18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1996년 11월 김덕홍씨가 북한을 빠져 나올 때, 황비서의 메모지를 가져왔는데, 망명당시에 공개되지 못한 한 줄의 내용으로 광주사태에 관한 것이었다.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이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라는 대목이다. 여기서 ‘광주학생문제’라는 용어가 5.18광주를 거론한 것이라는 사실은 2년뒤 월간조선 김용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다. 월간조선 (98년 7월호)와의 인터뷰에서 김덕홍은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선노동당 대남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그런데 당황한 황장엽이 말리고 기겁을 한 국정원 직원들이 사회적 파장 운운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월간조선 편집수뇌부에서는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개입”의 기사를 삭제한 채 기사가 나갔다.

이 문제와 더불어 가장 큰 의혹은 조갑제 기자의 認知 여부이다. 이 당시 조갑제 기자는 하버드대학에 연수를 같다고 하여 편집장은 다른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점은 조 기자가 편집장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기사의 삭제에 참여했는지의 여부이다.

98년 김덕홍-황장엽의 증언이후부터 현재까지 북한군 개입의 증언이 터져 나올 때 마다, 가장 앞장서서 맹렬하게 부인하는 인물이 조갑제 대표다. 정도가 심하길래 오늘 다시 한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몇주전에 인터넷사이트 월간조선(monthly.chosun.com) 전문가칼럼 난에 「5.18광주사태에 얽힌 실존과 신념의 혼돈: 조갑제의 광주사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올린 적이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어제 탈북자가 북한군 개입을 증언하면, 바로 오늘 아침에 자신의 사이트에 그것을 부정하는 글을 올리고, 다음날에는 방송에 출연하여 절대 아니라고 출연한다. 주말에는 전국을 돌면서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열심히 강연하고 다닌다. 그는 북한군 개입주장을 지지하는 우익인사들을 자신의 최근 발간한 책 <조갑제의 광주사태>라는 책에서 ‘광신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책을 보면, 반 이상이 자신이 쓴 글이 아니다. 총 480족에서 자신이 쓴 분량은 230쪽이 채 안된다. 나머지는 육군본부의 시민과 군인들의 수기들, 그리고 95년도 서울지방검찰청 수사기록 등이다. 그런데 제목은 <조갑제가 본 0000>도 아니고, 소유격을 써서 거창하게 <조갑제의 광주사태>이다. 핵심은 공수부대의 투입판단이 원초적으로 잘못이고, 전남대학생들의 과격시위로 공수부대원들이 돌에 맞아서 일부 부상을 당하고, 화가 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있었는데, 토끼몰이식의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이에 분개한 광주시민들이 가세하여 판이 커졌다. 시민들이 총 등의 무기를 든 것은 시민저항권 차원에서 정당했고, 공수부대도 화가 나서 사살했고,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어절수 없이 장갑차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정당방위 차원에서였다. 마치 아이들 패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변질되었다는 식의 논리이다. 김대중, 전두환, 정호용 등은 잘못이 없다. 이런 식의 논리인데, 누가 조갑제의 논리에 설득을 당하겠는가? 광주사태는 봉기주동자 등 배후의 치밀한 사전공작 없이는 불가능했던 대형사고였다는 점이 지만원박사와 김대령의 연구결과 일목요연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최근까지 조갑제 닷컴에 안보관련 글을 올렸던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은 황장엽씨를 관리하던 부서에서 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분에게 문의해 보면 98년 황씨-김덕홍씨의 인터뷰를 한 국정원 파일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5월 13일, 조선 TV에 출연했던 탈북군인 임천용씨에게 할당된 경찰경호원이 갑자기 경호를 취소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경찰쪽에서 임씨에게 방송출연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보복성 조취인 것 같다. 이런 일은 상부 고위층의 압력이 아니면 일선 경찰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V

광주사태 이후 어언 33년! 이러한 의혹들이 전혀 해명되지 않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오히려 의혹은 일파만파로 증폭되고 있다. 미스테리 중 하나는 과거사위원회를 위시하여 수많은 위원회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쳐서 만들어졌지만 유독 ‘5.18진상재조사위원회’만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00년에 이미 공동묘지에 묻혀 백골이 된 친일파도 ‘백년전쟁’을 선포하여 친일파인명사전을 만들면서 이 잡듯이 잡아내는 판국인데도 불과 33년전의 5.18사건을 왜 다시 조사하지 않는가? 66구의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유가족은 정부당국에게 행불된 시신을 찾아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 보상이 다가 아니지 않는가? 그들의 屍身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정부당국의 무성의와 국민적 무관심은 억울하게 죽은 死者에 대한 중대한 인권유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요약한다면, 우리의 입장은 보수진보와 좌우익의 이념논쟁을 떠나서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갔으니 학문적 세계에서 차분한 연구와 냉철한 분석을 통해서 새로운 연구성과를 내달라 것이다. 수많은 해명되지 않은 의혹과 북한군 침투의 진위여부가 밝혀져야 5.18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선 시급한 일은 첫째로, 66구 행불자의 암매장 장소여부를 수색·확인해야하고, 둘째로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추진되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2만명에 이르는 탈북자에 대한 증언녹취를 다시 실시해야할 것이다.

예를 들어, 탈북자 증언에는 진압군이 들어와서 문경으로 도주하던 중, 5월 30일경 여자아이를 살해 매장했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이 당시 일을 문경경찰서에 문의하면 행불자 명단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행불자 명단은 10년이상의 기록은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소상히 밝혀내기 위해 무엇보다 국무총리 산하 ‘5.18광주진상재조사위원회’ 설치가 시급하다. 이것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이기에 5.18광주에서 희생된 분들의 명예를 훼손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오히려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진정한 화홰나 용서는 진실위에 기초해야하거늘, 거짓과 위선위에 명예를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군의 일선에서 명령만으로 목숨을 바쳤던 젊은 무명용사들의 명예도 회복시켜야하고 그들의 명복도 이제는 함께 빌어야할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나, 상부의 진압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5.18유관단체들도 “97년 대법원에서 민주화운동이란 판결이 나왔는데, 왠 잔말이냐? 혼 좀 날래” 식으로 툭하면 폭언이나 고소고발로 협박하여 언론의 자유나 학문의 자유를 원천봉쇄하려고 기를 쓸 것이 아니다. 무조건 의혹을 덮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토론의 물꼬를 트고 의혹이 가는 점에 대해서 기탄없이 조사에 협조를 해야할 것이다.

차제에 박근혜정부에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바이다. 5.18에 대한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차원에서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기는커녕 설상가상으로 국정원이나 국방부를 통해 특정지역이나 특정시민단체의 손을 들면서 편파적으로 가세한다면, 이것은 바로 박근혜정부가 약속한 국민통합의 취지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며, 또한 5.18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 노력에 자물쇠를 채우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고, 또한 박근혜 정부의 탄생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보수애국시민들의 기대를 무참하게 내동댕이치는 배신적 처사로 맹비난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로 인해 격심한 국론분열과 지역감정의 재발이 발생한다면, 이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현 정부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대북 신뢰 프로세스의 추진이 아니라, 내부의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프로세스를 제대로 작용시켜야할 것이다.

법원의 판결이 어떤 식으로 나왔던지 간에, 5.18에 대한 역사연구는 현재 마침표를 찍지 않은 진행형이다. 그 이유는 북한의 국가문헌기록보존소, 중앙당역사연구소 그리고 조선혁명박물관에서 전시된 자료가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자유민주적 통일이 오는 날, 5.18의 역사적 진실은 비로소 햇볕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네스코의 등재를 통해서 광주사태는 이제 33년이 지나면서 감추고 숨겼던 비밀문서와 증언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5.18광주에 대한 연구는 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영역이란 온 국민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자유롭게 토론할 권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것이다.

VI

5.18의 진실규명에 대한 노력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언론의 표현의 자유나 학문연구와 사상의 자유, 그리고 지역갈등의 해소와 국민통합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기 계신 애국시민들이 48년 건국이후부터 북한공산세력과 피를 흘려서 싸워 쟁취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자리는 우리 용감한 애국시민들이 성역을 깨고 싸워서, 과연 21세기에 새롭게 개막되는 ‘대중독재의 길’(Road to Mass Dictatorship)을 막을 수 있는가, 아니면 막지 못하여 ‘聖域化 勢力’에게 비굴하게 눈치를 보면서 정신적 노예상태로 餘生을 마치는가의 중대한 갈림길에 처해 있다.

또한 5.18의 진실규명은 다가오는 한반도의 자유민주적 통일을 위해서라고 반드시 올바르게 정리되어야할 숙제인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5.18이후 좌경화에 몸살을 앓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세력이 커진 친북세력들은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대못을 박고 빨대를 꼽아서 대한민국이 이룩한 풍요하고 자유스런 물질적 번영과 자유스런 분위기를 최대한 악용하여 숙주의 영양분을 마음놓고 빨아먹고 몸집을 키우고 있다. 이들과 대척하는 올바른 통일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라도 5.18은 반드시 넘어야할 산이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오늘 7월 18일, 함께 不退轉의 意志를 천명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18연구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학문연구를 우리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사회가 보장해 주도록 투쟁해 나가야한다. 특히 이와 더불어 여야 정치권은 5.18영역이 학문의 영역으로 이관되었음을 똑바로 인식하여 스스로 지역정서를 선동하면서 政爭의 와중에 말려드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할 것이며, 사안의 심각한 중대성을 인식하여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해야할 것임을 준엄하게 경고하는 바이다. 세계경제 10위권에 진입한 대한민국을 세계의 언론이 5.18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걸맞는 시민사회의 품격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되고 말았다. 5.18을 역사적 진실의 차원에서 객관화하는 작업은 여기 참여한 여기 계신 애국시민들의 몫이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글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 7월 18일 5.18 진실전국알리기운동본부 발대식 프레스센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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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ada 2014-12-17 15:15:37
님이 TV조선나와서 광역어그로끈다음에 메인뉴스에서 사과방송하게 만드신 장본인인가요?

잘보고갑니다 2014-07-10 01:56:53
개념있는 애국교수님이시군요. 광주사태는 분명히 재조명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입니다.

ddddd 2013-12-03 04:26:36
전두환재판은 일사부재리 위반이 아니다. '피고인'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80년 재판과 97년 재판은 별개의 것이다.

ddddd 2013-12-03 04:09:58
윤기권의 월북(1992년 3월) 동기는 무엇인가? 그가 정신이 이상이 되어 월북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왜 하필 가장 잘 사는 미국이 아니고 가장 못 사는 북한으로 가야만 했나?
...................................................................................................
그건 그 사람만이 알겠지. 다만 그는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다. 적어도 당시에 북한과 연관지을 수는 없다.

ddddd 2013-12-03 04:08:21
http://i.imgur.com/2U0atGT.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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