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특수군의 5.18 광주작전" 분해
"북한특수군의 5.18 광주작전" 분해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09.02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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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참가해 희생된 사람들은 북한특수군 심리전에 말려든 사람들이었다

▲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뉴스타운
광주민주화운동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직 600명 이상의 북한특수군이 벌인 작전만 있었다. 여기에 참가한 광주사람들은 북한 특수전에 이용된 부나비들에 불과했다.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한 김대중>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에 시해된 직후부터 한국 사회는 차기 권력이 누구에게 갈 것인가를 주시하는 눈동자들만 반짝거렸고, 누구 하나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김재규의 눈치를 보았고, 비상국무회의 결과를 김재규에게 몰래 귀띰해주기까지 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보였다. 전두환의 역할로 김재규가 보안사에 잡혀갔고, 이후 비상국무회의는 최규하의 과도내각을 승인했다. 최규하-신현확 정부는 '1년 이내에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며 사회를 안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 5월 초부터 갑자기 대학생들의 민주화시위가 전국 단위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정보 판단으로는 시위들을 김대중이 주도했다고 공식화 했지만, 많은 자료가 입수되었던 2010년 이후부터는 그 해석이 좀 달라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5월의 시위 시국은 북한에 의한 개입으로 해석된다.

5월의 학생운동과 김대중의 행동은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무슨 힘을 믿었던지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 비밀회동을 통해 자기를 새로운 국가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까지 편성해 놓고, 5월 16일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5월 19일까지 최규하 내각이 총 사퇴하고 계엄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적 봉기를 감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믿는 구석 없이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 선언하는 것은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망동이었다. 학생시위만을 믿고 국가를 상대로 하는 이 엄청난 정면도전을 선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살얼음 같은 계엄의 공포>

이에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기존의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강화하고 김대중 등 내란 음모자 24명과 전국의 운동권 주동자들을 체포함과 동시에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강화된 계엄령에 따라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등 공수부대들이 서울지역 대학들에 집중 배치됐고, 위험도가 비교적 낮은 곳으로 평가된 광주지역에는 겨우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의 1개 대대씩을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배치하는데 그쳤다.

<5월 18일 계엄군을 돌멩이로 공격한 250명 학생집단은 광주학생일 수 없다>

이처럼 각 지역 및 대학의 운동권 핵심자들은 5월 17일 거의 체포되었고, 체포망을 벗어난 운동권 주자들은 모두 잠적해 있었다. 시위 주도자들이 모두 체포되거나 잠적했다. 대한민국 전 지역이 조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5월 17일 밤중에 벌어진 전국적 공포분위기 때문이었다. 광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5월 18일 전남대에 출현한 250명의 학생이 검찰보고서에 기록돼 있지만 당시 광주는 물론 그 어느 다른 지역의 대학생들이 250명씩이나 떼를 지어 계엄군을 먼저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현상이다.

5.18 기념사업회가 마련한 증언집들을 보면 5.18의 핵심 인물들의 그 누구도 감히 이 250명을 구성할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300명, 600명이 했던 행동을 한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증언한다. 광주의 운동권 인물들은 도망갔거나 잡혀갔고, 학생과 교수들은 숨어버렸다. 5.18의 영웅들이라는 윤상원, 정상용 등도 녹두서점에 몇 명과 함께 의논을 하다가도 차량 몇대가 줄을 지어 가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보성전기로 도망한 후 각자도생하자고 뿔뿔이 헤어진 다음 도청이 점령되자 개별적으로 걸어 들어갔던 사람들이다.

폭동으로 사형과 무기 징역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5월 18일부터 시위조직을 만들어 본 사람은 없다. 중형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증언대로 개념 없는 최하층 노동자들이었다. 도청이 비어있다니까 호기심 또는 소영웅심에서 뿔뿔이 개별적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다. 이는 그들의 증언록들이 밝힌 내용들이다.

<광주에는 시위를 지휘한 사람, 시위대를 조직한 사람 없다. 시위대 자체가 없었다>

전국이 공포에 떨며 조용한데 유독 광주에서만 국가 전체를 뒤흔든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동이, 30만이 동원된 세계 최고수준으로 평가되는 도시게릴라 작전이, 이렇게 콩가루식으로 흩어져 다니다가 도청에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던 막노동자들이 지휘했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사하라사막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믿으라 하는 것과 같다.

5.18의 신흥귀족이라는 사람들, 5.18을 민주화 역사로 모시는 좌익 논객들, 모두가 말한다. 5.18은 빈곤한 노동자들, 즉 기층 민중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민주화운동이었다고. 5월 26일부터 기동타격대장을 맡았다가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윤석루, 그는 증언자들의 말대로 철없는 젊은이 였지만 용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20세의 구두공이었다.

'화려한 휴가'에서 안성기가 대역을 담당한 시민군 대장은 26세의 골채채취운전수였다. 그는 5월 25일 경, 처음으로 도청에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가 5월 18일부터 시종 시민군대장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광주시위를 지휘한 지도자는 없다. 아니 광주 시위대 자체가 없었다. 수많은 광주인들은 지나가다가, 또는 유언비어에 분노해, 또는 불이 타는 곳이 궁금해, 또는 함성이 있는 곳이 궁금해, 뿔뿔이 개인단위로 모여들었다 북한군으로부터 모략용으로 이용당한 사람들인 것이다.

5.18 광주사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30만 주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일찍부터 전남대학 정문에는 공수부대원 20명이 정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09:30분경, 250여명의 학생들 이 가방에 각이 진 돌멩이를 숨겨와 일제히 공수부대원들을 습격하여 여러 명의 군인들이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등 부상을 입었다.

이들 학생 집단은 공수부대원들을 분노케 해놓은 후 곧장 금남로로 진출하여 수많은 경찰을 포로로 잡고 파출소들을 불태웠고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전라도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의 명령이 떨어졌다" "여성을 발가벗겨 유방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환각제를 먹고 짐승처럼 날뛴다"는 종류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었다.

불을 지르면 어느 도시에서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유언비어가 나도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광주시 일원은 순식간에 분노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견디다 못한 경찰은 계엄군의 투입을 요청했고, 이에 분노했던 공수부대가 오후 5시부터 현지지역 사단장인 정웅 소장의 지휘에 의해 강도 높은 진압을 시작함으로써 광주시는 18일 오후 5시경부터 21일 오후 5시까지 그야말로 백병전을 방불케 하는 패싸움 바다로 돌입하게 되었다. 250명의 북한군이 유도한 그대로 계엄군과 광주시민들 사이에 적대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광주사태는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광주사태 10일의 분해>

5.18 사태는 10일 동안의 사태로 이 모두를 폭동 기간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10일 동안 모두가 폭동으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처음 4일간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다이나믹하고 화려한 게릴라 작전으로 채워졌다. 이 10일의 기간은 제1단계 4일, 제2단계 4일, 제3단계 2일로 현저하게 나누어져야 한다.

<18-21일까지 4일간의 북한특수군 작전>

처음 4일간의 제1단계에서는, 600명 이상의 규모로 조직된 특수군의 특공작전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선동된 무산계급과 중고등 학생들의 부하뇌동이 있었다. 제1단계 작전은 특수군에 의해 저질러진 고강도의 모략전이었다. 광주시민들을 '분노하는 군중'으로 전환하여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차량을 지그재그로 돌진시켜 계엄군을 대량살상하려 했고, 악세레다를 고정시켜놓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다 뛰어내라는 방법으로 계엄군을 대량살상하려 했다.

대규모의 무기를 탈취했고, 감히도 정규군인 20사단 지휘부를 유린했던 세계 특급수준의 특공작전이요, 시민들을 칼로 찌르고 몽둥이나 돌로 이기고, 무기고 총으로 시민들을 사살하여 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으로 선동하는 등 계엄군과 시민을 적대관계로 만들어 남한 내의 내전을 유도한 모략작전이었다. 이는 절대로 단 몇 명 조차 조직할 수 없었던 하루살이 노동꾼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1-25일, 광주시민의 무기반납 운동>

그 다음 4일간에는 참으로 괴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5월 21일 오후 5시, 계엄군이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도청을 버리고 시 외곽으로 줄행랑을 쳤다. 광주는 그야말로 계엄군이 전혀 없는 해방공간이었다. 이 해방공간에서 광주시 전체가 정말로 민주화를 열망하였다면, 이 엄청난 무기를 광주인들이 무장하고 일어나 김대중이 선언했던 5월 16일의 최후통첩 내용을 이행했어야 했다. 이들에게는 총이 있었고, 그들의 뜻을 자유자재로 실현할 수 있었던 해방구가 있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광주의 유지들과 학생들은 막상 도청이 자기들 손에 떨어지자 공포감부터 앞섰다. 광주의 유지들이 도망을 갔다가 다시 도청에 들어와 느낀 것은 그들이 잡혀갈 것이라는 공포였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반납부터 서둘렀다. 광주시를 전광석화처럼 누비던 대학생들을 찾았다. 그런데 이들 원로들 앞에 나타난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겨우 22세의 전남대 학생 김창길이 나타났다. 그는 운동권도 아니고 광주시위에 대해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순수한 학생이었다. 그 위의 대학생들은 거의 나타나자 않았다. "이게 웬 일인가, 그 화려한 작전을 수행했던 광주의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져 대학생 행세를 하면서 무장시위를 주도했단 말인가? 광주의 원로들이 허탈해졌다.

광주의 유지들은 22세 대학생 김창길을 필두로 시국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 유지들은 '대학생'들이 탈취해온 무기들이 가장 무서웠다. 이 괴물 같은 무기들을 군당국에 반납하는 것이 광주인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광주인들이 무기를 반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그 찬란했던 600명은 거창한 복장과 복면을 하고, 장갑차에 거대한 기관총을 설치하고 거리를 누비면서 "무기반납을 하면 안 된다, 최후까지 싸우자, 우리가 있다"는 취지의 무력시위를 하고 다녔다.

어린 김창길은 TNT에 착안했다. 담뱃불만 날아가도 광주시 전체가 잿더미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경파들 몰래 전교사를 찾아가 다너마이트 무기를 해체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소준열 사령관이 전문가를 찾았으나 전문가는 전라도 계엄소에 단 한 명쁜, 5급 문관 배승일 뿐이었다. 배승일은 목숨을 내걸고 김창길이 이끄는 젊은이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25일과 26일 양일에 걸쳐 무기화된 TNT를 해체했다. 광주시민들 중에는 이를 해체-조립할 기술자가 없었다. 이렇게 희귀한 기술자가 600명 시위대에는 얼마나 많기에 5.21 오후에 순식간에 다 조립을 하였는가? 그러나 김창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26-27일, 개념 없는 부나비들의 허세>

25일 밤, 조선대 출신인 27세의 김종배, 화물차 운전사 박남선(26), 30세 회사원 정상용, 5.18의 상징인 30세 윤상원, 27세의 조선대 출신 허규정이 주축이 되어 김창길 등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축출시킨 후 수습위원회를 '항쟁본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결사항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거의 서로가 생면부지의 처지로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27세의 조대 학생 김종배가 항쟁본부 총사령관이 되었다. 항쟁본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 그룹은 불과 80명 정도로 구성된 콩가루 집합체 였으며, 주로 고교생과 막노동자들로 구성됐다. 이들만 아니었다면 광주 재진입작전은 없었으며, 27일 새벽에 발생한 17명의 민간 사망자도 없었다. 고교생들은 대부분 죽고, 항쟁본부 간부들은 항복을 표시하여 살아 남았다. 그리고 오늘날 신흥귀족으로 등극해 있는 것이다. 5.27. 05:23분, 일부 개넘 없던 광주 젊은이들의 마지막 경거망동으로 광주사태는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계엄사는 바로 이 제3단계에 참여했던 개념 없던 부나비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제1심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은 정동년(37, 복학생), 배용수(34, 운전수), 박노정(28, 인쇄업), 박남선(26, 트럭운전수 운수업), 김종배(26, 학생)이고,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 구두공) 허규정(27, 학생) 정상용(30, 회사원) 하영열(31, 공원) 윤재근(28, 공원) 서만석(36, 상업) 홍남순(67,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5월 18-21일의 특전행위를 벌인 600명 중 일부가 아니었다.

결 론

1. 5월 18일부터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기획-지휘한 광주인은 없다.

2. 광주민주화운동은 없었다. 단지 노태우시대에 노태우의 약점을 악용하여 획득한 영혼 없는 명찰일 뿐이다.

3. 5.18은 순전히 북한특수군 작전이었다. 시위에 참가한 광주인들, 희생된 사람들은 북한특수군 심리전에 말려든 부나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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