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광주 5.18 재판 비교
2개의 광주 5.18 재판 비교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09.17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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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재판은 함량미달과 인민군 판사에 의한 인민재판이었다

▲ 5,18 광주사태 자료 사진 ⓒ뉴스타운

< 1981년의 5.18재판 >

1981년 4월 1일짜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정동년이 김대중에서 500만원을 받아 300만원은 박관현에게, 200만원은 윤한봉에게 주어 학생시위를 주도케 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월 17일 밤에 잡혀 갔고, 박관현과 윤한봉은 장기간 도망가 있었습니다. 광주의 운동권, 대학생, 교수 등 거의 모두가 시위기간 내내 잠적해 있었습니다. 학생 시위대를 구성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당한 사람들은 모두 12명으로 이들은 거의 다 광주에서 천대받던 20대의 사회불만세력들이었습니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지면서 5월 22일부터 전남도청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5월 26일 새벽부터 27일 새벽 1시까지 25시간 동안 객기를 부리다 계엄군의 재진입작전을 초래한 부나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거의 다 서로 일면식이 없던 콩가루들이었습니다. 광주사태 기간 내내 광주인에 의한 시위대가 없었다는 것을 이 이상 더 잘 증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00명이 이룩한 화려한 업적은 1인당 수십억 원씩의 보상이 가능하고, 노출되면 그들은 모두 영웅으로 아니 사회적 배우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5.18유공자 공적'을 주장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은 저질러졌는데 저지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1981년의 정보계통과 재판부는 광주에 광주인들이 기획-연출한 폭동 시위대가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폭동 시위대라면 이동 중인 20사단을 공격한 300명 조직,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턴 600명 조직의 실체,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전남대 앞에 서 있는 계엄군에게 감히 돌멩이 공격을 감행하고, 곧바로 중심가로 달려 갔던 200명 대학생 집단, 아침 10:30분 금남로 중심가 파출소들을 소각하여 부나비들을 끌어들인 1,000여명 "학생 시위대"가 그 핵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1981년의 정보 당국과 재판부는 이 폭동의 실체 중 단 한 사람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1981년의 재판은 몸통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고 그래서 몸통은 잡지 못했습니다. 재판부가 잡아놓은 20대 개념 없는 부나비들은 600명이라는 몸통에 붙어 있는 깃털이 아니라, 그냥 광주에 날아 다니던 부나비들이었습니다. 20세의 구두공 윤석루는 5.18 연극 무대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됐던 '기동타격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5월 26일부터 '항쟁지도부' 핵심간부를 맡았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윤석루를 개념 없는 천방지축이라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1981년의 재판부는 이런 윤석루에게 무기징역형을 내렸습니다. 윤석루와 같은 계급의 20대들을 5.18의 핵심 범인들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1981년의 정보기관이나 재판부는 얼마나 허술하였습니까? 국가가 위태로울 지경으로 내몰았던 엄청난 폭동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니 대한민국의 그 어느 특수부대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폭풍작전이 광풍처럼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일정기간 대한민국이 통지할 수 없었던 해방구가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작전을 주도한 몸통이 겨우 20세 구두공 등 그와 유사한 20대 부나비들이었다 하니, 이런 기막힌 판결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 1997년의 판결 >

1997년 5.18 판결문의 핵심은 이러합니다. "광주시위대는 신군부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다. 시위가 전국으로 속히 확산됐어야 했는데 신군부가 이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조기에 진압한 행위는 분명한 내란행위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광주에는 광주인들이 독자적으로 구성한 시위대가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유일했던 시위대는 북한특수군 600여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이들이 동원했거나 이들에 부화뇌동한 철없는 10대와 하층계급의 노동자, 양아치, 무직의 20대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1997년의 판결은 북한특수군 600명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준 세기의 코미디 판결이 된 셈입니다.

당시 5.18 시위는 대한민국을 적으로 한 무장폭동이었습니다. 당시의 당국은 이것이 만일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판단을 하였습니다. 이 판단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며, 이런 정치 군사적 판단에 대해서는 감히 판검사가 이렇다 저렇다 참견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의 재판부는 "전두환 등이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괄목할만한 위협이 없었는데도 위협을 과장 확대하여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고 몰아쳤습니다. 이는 엄청난 월권이고 오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민주화 판사들은 광주폭동을 정의의 사도라고 판단했고, 폭동진압 주체인 국가를 전두환 등에 의해 동원된 내란수단이었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1996-97년의 검찰(채동욱이 주역 담당)과 재판부가 북한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을 물씬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81년의 재판은 함량미달의 재판이었고, 1997년의 재판은 함량미달은 물론이고, 그 차원을 훨씬 넘어 인민군 판사에 의한 인민재판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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