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와 헤븐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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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와 헤븐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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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재로부터 왔으니 재로 돌아갈 것이니라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
-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5.632 -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무덤에서 걸러 나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사체가 무덤에 머문 기간은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미명까지 합쳐 40시간도 채 안 된다.

좀비였다면 몰라도 비록 짧다고 해서 예수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고 2천 년 전 예수의 빈 무덤이 유허로 발굴되어 부활이 인정된 적도 없다.

오늘날의 냉정한 지성적 분위기는 유물론적 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땡 치는 것이다. 참으로 부활은 대꾸조차 지루하고 웃음꺼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 아직도 지구에 살고 있는 세 사람 중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기의 부활만 기원하고 있을 뿐인가.

근래에 따로 발표된 소설 “다빈치 코드”와 다큐 “잃어버린 예수의 무덤”은 사람들의 안티-그리스도적 관심을 끌어들였다. 그 공통점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부부로서 성관계를 맺어 한 아이를 낳았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둘의 차이는 이 아이가 여아(사라)와 남아(유다)로 서로 다르게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양쪽의 제작 의도는 명백하다. 예수는 한 남자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의 부활사건 역시 터무니없는 허구임을 간접적으로 밝히는데 있다.

실제로 험난한 십자가에서 임종을 맞는 예수의 절규는 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성경은 이를 친절하게 번역해놓았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오전 9시에 못 박히고, 정오를 지나며 온 땅이 어둠이 깔린 지 세 시간이 지날 때였다. 이 비명은 십자가에서 뱉어낸 일곱 마디 중의 네 번째 말이었다.

이때 그리스도는 천지인(天地人) 삼면에서 외면을 당했다.

첫째, 평소 그가 아버지라고 호칭했던 하나님으로부터였다.

둘째, 온 땅이 대낮임에도 일식처럼 어둠으로 바뀌었다.

셋째, 지나가는 자와 종교지도자는 물론 심지어 함께 못 박히던 강도들까지 그를 조롱하였다.

재정을 맡았던 제자에게 전날 밤 배반을 당했고, 수제자 베드로에게 새벽에 세 번씩이나 부인됐는가 하면, 나머지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십자가 형장에는 서너 여자만 지키고 있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서로 다른 주석(comment)은 흥미롭다.

1. 예언의 성취 - 약 천 년 전 다윗이 읊었던 시편 22편의 말씀을 이룬 것
2. 대속의 기도 - 세상에서 아파하는 “나”를 위하여 고통을 담당하는 기도
3. 비탄의 절규 - 하늘로, 땅으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한 사람의 처절함
4. 라마승의 염불 - 티베트불교의 진언, “엘리 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다라니”

사람의 몸은 일시적(temporary)이다. 그런데 예수는 영속적인 변태(transform)를 시도했다. 즉 불멸의 부활이다. 일시에서 불멸로 신체의 부활과정은 곤충의 탈바꿈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치에서 날개를 펼치며 비상하는 매미를 유추하면 된다. 이때 매미는 고치에서의 탈출에 사력을 다할 것이며, 그 신음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을까.

예수의 변형은 적어도 그의 제자들에게만큼은 현실로써 믿음을 주었던 것 같다. 왜냐 하면 그의 부활사건을 기점으로 비겁했던 제자들이 결사대의 전사처럼 태도가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몸을 던져 순교하기를 명예로 받아드렸다. 가톨릭 교황의 백색 예복은 부활을, 추기경의 진홍색 예복은 제자들의 순교를 상징하고 있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 그 다음 열매는 순교했던 제자들의 몫이 되리라.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 통로는 누구든지 고통을 뚫고 지나간다. 영생에 이르기까지 일단 육체가 반드시 죽어야하는 것이다. 부활로 통하는 문은 천국(heaven)의 영광을 여는 입구이면서, 세상(world)의 영화를 닫는 출구이다.

죽음은 “나”와 우주가 한 몸이 되는 신비한 체험이다. 육체는 물질이며, 물질은 별들의 재(ash)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혼은 생명이며,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은 흙의 자연이자, 별의 우주로 돌아간다. “나”는 곧 몸이요, 마음이며, 영혼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여기에 성별(gender)을 합쳐 네 개로 구획된 개별체로 존재한다.

원자는 자체로 작은 우주이다. 그러면 특정 원자에 포획된 전자들은 각각 네 개의 양자(quantum) 상태로 구획된 곳에 배타적으로 분산된다. 원자가 하나의 종합병동이면, 전자는 하나의 입원환자로서 “A층별-B통로-C호실-D침대”하는 식으로 구분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전자는 원래 구별할 수 없지만, 이때 전자 각각의 양자상태는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갖는다. 마이너스 부호와 크기는 전자의 자유가 속박되어 있는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이다.

현대물리학을 지탱하고 있는 양자역학은 “원인-결과”와 같은 결정론적 상식을 무시한다. 즉 물리적 사건은 다음 상태가 준비되어 있지 않는 비결정적 시스템으로 파악한다. 다만 어떤 가능성을 확률적으로 나타낼 뿐, 이것은 언제나 n가지의 다양성이 열려져 있는 우주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자이론은 과정진화론이나 연속창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1927)는 양자론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 원리만 요약하자. 질량 m인 한 입자는 정지된 위치 x와 이동하는 속도 v가 동시에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때 확정되지 못한 양은 플랑크 상수 h보다 더 작지 않다. 즉 불확정성은 언제나 상수만큼의 애매함을 남기고, 이 크기는 다른 가능성을 잉태하는 바탕이 된다.

사람에게 불확정성은 물질적 하늘(sky)과 정신적 천국(heaven)의 경계에 존재한다. 사람의 불확정성은 어느 정도일까. 그 크기는 꼭 “나”만큼일 것 같다. “나”는 스카이의 안정을 잡고 헤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몸과 영혼에서 직교하며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또 하나의 우주이다.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한계 밖에 있다.

오늘도 설산(雪山)에서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하는 선승(禪僧)들이 있다. 그들은 그라운드의 경계에서 부활을 이뤄낸 예수처럼 새로운 탈출을 획책하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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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fficult 2008-03-24 13:37:45
불교에서 연기론(緣起論)과 같은 것이구만요~~~~~~~
자아(自我)는 있으면서 없는 것인가? 아니면 없으면서 있는 것인가?
자아는 나로써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런 이미지인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 바로 나인가?

익명 2008-04-01 22:06:35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허구든 허구가 아니든 심적으로 인도하고 나는 그곳에 다가가려 하다 보면 결국 내가 이루어 낸 것인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예수가 보이고 천국이 있지 않을 까 합니다.

남동웅 2008-04-01 22:34:50
결국 종교든 믿음이든 그 주체는 바로 내가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 나를 행복과 안위의 세계, 영원의 세계로 안내할 메시아는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안태수T 2008-11-01 12:58:32
창1:1 In the begi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고 적혀 있습니다. heavens 복수의 의미는 히브리인의 하늘 사상은 1번째 하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권 하늘이고, 2번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사는 하늘이고, 3번째 하늘은 하나님 보좌의 하늘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번째 하늘이 sky이고 3번째가 heaven(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분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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