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처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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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를 해체하라!

[역사 진단 제5편]
역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처단하라!

국사편찬위원회를 해체하라!

현행 국사의 조직형태는 고조선은 나라가 아니고 부족사회이며. 국조 단군왕검은 왕이 아니고 부족장입니다. 또한 중국은 기원전 3천년 경 황제가 등장하여, 청동기를 사용하고, 황금 문명이 크게 발달되었으나 중국과 이웃한 고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조선 시대의 기원전 150년경부터 비로소 청동기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라고 상식적으로 통할 수 없는 역사를 초, 중, 고등,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기막힌 국사입니다. 먼저 우리민족을 문명이 제일 뒤 떨어진 미개한 민족으로 철저히 비하(卑下)시키고, 치졸하게 구성된 현행 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기막힌 실상부터 관찰해 봅시다.

[중학교 국사]

◆ 선사시대의 생활.
[학습개요] 우리 민족의 생활 무대였던 만주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수십만 년 전이다. 우리 민족은 인종적으로는 몽고인종에 속하고, 어족으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 선사시대는 구석기(1만 년 전), 신석기(기원전 8,000년), 청동기시대순으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은]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가 성립” 하였다.

[1]. 중국은 기원전 3천년 경에 청동기 문명이 발달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활동을 전개함으로서 인류의 생활양식은 크게 변하였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중동지방을 비릇하여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기원전 3000년경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중국의 황하강 유역에서 관계 농업의 발달, 청동기의 사용 도시의 출현, 문자의 사용,국가의 형성 등이 이루어져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고등 20쪽)

 
   
  ▲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2]. 한국은 기원전 194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중국은 기원전 3000년경 황하강 유역에서 청동기를 사용하고, 도시의 출현 국가가 형성되어 거대한 왕궁이 있었으며 황금 문화가 크게 발달되었다. 고대 중국의 국왕은 정치와 더불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만주지역에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고, 특히 한반도 속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의 위만조선시대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 (고등 국사 20쪽)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국사를 지금 우리의 아들 딸 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3]. 국조 단군왕검은 왕이 아니고 부족장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중학교 국사)
기원전 10세기의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면서 만주 요령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에는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단군의 건국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에서는 선사시대에 형성되었던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신앙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 바람, 구름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정치.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년).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위만의)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어 부강해졌다.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한무제(漢武帝)의 막강한 군사들에게] 왕검성(평양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한무제는 한4군(낙랑, 진번,임둔, 현도)을 설치하고 조선국을 속국으로 삼아 식민지로 다스렸다.) 끝. (중학교 국사 18쪽)

[ 고등학교 국사 ]

(1), 단군과 고조선 [고등학교 국사 35쪽]
고조선은 요령지방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후략)

(2), [위만조선(衛滿朝鮮)]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말미암아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중략) 그 후 한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漢)의 군대와 맞서 왕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漢)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고등학교 국사 본문]

(3). 현행 국사의 엉터리 삼한(三韓)

위만 조선이 있었던 기원전 2세기경에 남쪽에는 진(辰)이 있었으며, 여기에서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1세기경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더불어 부여, 동예, 옥저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부여 및 마한의 목지국은 왕을 칭할 정도로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렀다. 이후 동예, 옥저, 삼한의 소국들은 연맹 왕국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었다. 이 시대를 고고학에서는 철기 시대 후기(기원 1~300년)라고도 한다. [고등 국사 도움글 39쪽]

1,[마한]은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고,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모두 10여만 호였는데 그 중에 큰 나라는 1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2, [변한]은 김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12개국으로 이루어졌다.
3, [진한]은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12개국으로 이루어졌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모두 4만~5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천~5천호,작은 나라는 6백~7백호였다.

 

 
   
  ▲ 엉터리 3한 지도  
 

마한 목지국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 직산,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주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등국사 41쪽 도움글)

註 : 목지국(目支國)은 본래 월지국(月支國)이며 마한 54국 중의 1국 입니다. 삼국지 한전(漢傳)에 마한의 54국 중의 1국으로 월지국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혹 중국 대륙 속에 존재한 월지국의 정체가 들통 날 것을 염려하며, 바로 고치지 않고 굳이 목지국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목지국의 위치에 대한 증서도 없이 임의대로 직산으로 추정된다. 라고 주석했습니다. [중, 고등학교 국사 본문 끝]

국사편찬위원회를 해체하라

[1] 패배의식의 망국적 치욕의 식민지국사입니다.

현행 국사를 요약하면 구석기시대(1만 년 전)→ 신석기시대(기원전 8,000년)→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4세기(400년)경에 철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 고조선은 요서지방을 경계로 하여 기원전 3세기경에 부왕, 준왕이 등장하여 연나라와 대립 할 만큼 강성하였다.

연나라에서 도망쳐온 위만은 [한나라가 조선을 처들어오니 왕험성을 지키겠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올리고] 수도인 왕검성(평양성)에 쳐들어와 고조선국 준왕을 몰아내고 BC 194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후 계유(BC 108년)에 漢(한)의 劉撤(유철)이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여 왕검성이 함락되어 위만의 손자 右渠(우거)를 멸망시키고 한무제는 한반도 속에 한4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을 식민지로 다스리고 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라고 고조선의 역사를 요약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국사는 중국 역사인가 한국의 역사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우는 우리나라의 국사에서 첫 장부터 고조선은 멸망하고 중국의 식민지가 되어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민족의식이 투철한 어떤 학생이 슬픈 어조로 국사를 읽는 다면 교실 전체의 학생들은 통곡소리로 가득 할 것입니다.

[2] 중국은 왕국이고, 우리나라는 부족장이다

중국과 한국의 제왕년표

 
   
  ▲ 중국과 한국의 제왕년표  
 

(1), 단군의 고조선 역사는 공백입니다.

상기의 [중, 고등학교 국사]의 본문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부터 위만조선 멸망까지 무려 2,000년의 우리 역사입니다. 단군왕검과 같은 시대의 중국의 堯(요)는 임금이고, 고조선의 국조 단군은 부족장입니다.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공백화”된 현행 국사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라고 세계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현행 중학교 국사는 단군이 개국한 BC 2333부터 무려 2천년의 역사는 공백이고, 중국의 한무제에게 고조선이 멸망한 마지막 준왕에 대한 멸망의 역사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만약 단군이 부족장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행적은 기록돼야 마땅함에도 단군왕검에 대한 역사는 단 한 구절도 없이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외국인이 우리 국조에 대한 역사의 실상을 탐독한다면 비웃을 뿐입니다.

(2), 단군왕검은 국조라 할 수 없습니다.

[단군의 건국 : 중학교 국사 읽기자료 18쪽] 옛 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하여 인간 세상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환인(桓因)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상 세계를 두루 내려다보니 태백산 지역이 인간들에게 큰 도움을 줌직 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중략) 그때 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환웅은 영험 있는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톨을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으면서 동굴 생활을 시작하였다. 곰은 삼칠일(21일) 동안 잘 참고 견디어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이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인이 된 곰(웅녀)은 혼인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를 본 환웅이 잠시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어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본문 끝.]

(3), 단군을 그 누가 국조로 믿겠는가?

우리민족이 단군을 국조로 숭배한다면 대한민족은 모두 다 곰의 자식이 된다. 그 누가 단군을 국조로 믿겠는가? 대한민국의 중학생이 처음 배우는 국사에서 단군을 신화로 취급함으로서 무지몽매한 어떤 신앙인들은 단군의 목을 칼로 자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국 여러 곳에서 자행 되고 있었습니다. 근본적 원인은 단군을 곰의 아들로 취급한 현행 국사에서 비릇된 것을 어찌 그들을 책망 할 수 있겠는가? 현행 중학교 국사는 현세의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신화를 첫 장에 싣고 있으니 참으로 얼빠진 작태의 괴이한 대한민국의 국사입이다.

현행 중학교 국사는 단군왕검의 고조선(BC 2333년)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부족이었으나, 기원전 4세기경에 위만 조선 때 중국으로부터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국가로 발전]하였다. 즉 단군왕검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다스린 부족장이며, 단군은 임금이 아니고, 고조선은 나라도 아니고 부족입니다. 또한 단군은 백성을 통치한 행적의 역사는 전연 없으며, 더구나 곰의 아들이 단군이기 때문에 단군은 국조라 할 수 없습니다.

(4). 위만조선을 수록하고 기자조선은 삭제했다.
기자(箕子)는 중국의 조상인가? 한국의 조상인가?

고조선 삼한 중의 변한 왕이었던 기자(箕子)는 성군(聖君)으로서 8조금지법을 제정하여 대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이 없었고 백성들에게 양잠기술을 가르쳐 비단옷을 입게 했습니다. 또한 당시 주무왕(周武王)에게 홍범9주를 설법하여 폭군을 어진 임금으로 교화하신 기자(箕子) 성군(聖君)은 우리나라의 조상이 아니고 중국의 조상인가? 어찌하여 기자조선의 역사는 삭제하고 연나라 사람 도적 괴수 위만을 우리나라 조상으로 수록하고 있는가?

그리고 중, 고등학교 국사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하고도 고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가 있었다. 라고 고등학교 국사 37쪽에서 기술돼 있습니다. 도대체 8조 금지법은 누가 제정한 법인지 국사편찬위원회는 알고나 있는가? 어찌하여 기자조선은 국사에서 삭제하고 배은망덕한 연(燕)나라 도적의 괴수인 위만을 우리나라의 국조로 취급하고 있으니 도대체 얼빠진 민족인가?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 쓴 국사인가?

◆. 이병도가 기자(箕子) 조선을 삭제한 사유

우리나라의 고조선 삼한(진한, 마한, 변한)은 세계적 대국이며, 4국(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또한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아시아적 大國(대국)입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는 말살하고, 3국(신라, 백제, 가락국)은 마치 한반도 속에서 건국된 것처럼 얽어 맞추어 축소 왜곡하여 반도조선사를 편찬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한반도 속의 소국으로 얽어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기자(箕子) 조선을 국사에 수록하면 광대한 고조선의 강역이 곧 바로 밝혀지기 때문에 이병도는 제자들에게 기자에 대한 언급을 강력히 피하고 기자조선의 역사를 삭제했던 것입니다.

◆. 위만 조선은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

[고등국사 19쪽 도움글]에 문헌상 나타나는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정치적 변화를 거친다. 라고 기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삭제하고 연나라의 도적 괴수 위만을 우리조상으로 인정하고 [단군조선-위만조선]을 수록돼 있습니다.

[고등국사 36쪽 도움글] (연(燕)나라 사람 도적 괴수)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라고 위만을 우리나라 조상으로 수록한 사유를 괴이(怪異)하게 기술돼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1858~1932)은 위만은 한명의 날강도이다. 국사에서 다룰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위만은 조선을 계승한 자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 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연나라의 도적 위만은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을 해방 62년을 맞은 지금까지 고조선을 계승한 우리조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때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고 왕권을 탈취한 위만을 조선을 계승한 왕으로 기술한다면, 일제 침략으로 조선의 왕권을 탈취한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등을 대한제국을 계승한 국왕으로 가르치는 꼴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국사입니다.

[4], 우리나라의 국조는 준왕인가? 위만인가?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경, 연(燕)나라에서 1000여명을 이끌고 도망쳐 조선으로 망명해 오자 준왕은 위만에게 조선 땅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은덕을 베풀었으나 얼마 후 세력을 키운 배은망덕한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왕이 되고부터 고조선이 강성해 졌기 때문에 위만을 우리나라의 국조로 받들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金馬郡(금마군)의 지금 益山(익산)에서 마한을 건국했으나 곧 백제의 온조왕에게 멸망했다. 고 기술돼 있습니다. 즉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좌우궁인을 거느리고 海城(해성:요녕성)에 들어가 후마한을 건국하고 무려 204년을 존속했으나 현행 국사는 준왕이 건국한 후마한의 역사를 삭제했습니다.

백제의 온조왕은 재위 26년(A.D 8년) 7월 온조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해성으로 들어가 마한을 재 건국했으나 그해 돌아가셨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상하의 인심이 이반하니 마한은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서기 8년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표면적으로는 사냥한다는 핑계로 몰래 기습 공격하여 후마한을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 성(城)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온조왕 27년(A.D 9년) 4월에 원산, 금현 2성이 항복하므로 두성의 백성들을 漢山(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드디어 기준왕이 재 건국한 후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즉 백제 온조왕의 공격으로 A.D 9년에 홍성 금마가 항복하고 마한이 멸망하자 금강이남(조작된 글)의 소국들이 다시 뭉쳐 새로운 마한연맹(馬韓聯盟)을 만들기에 홍성, 금마에 마한왕의 후손을 왕으로 옹립해 주었다. 이로서 후 마한은 서기 9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조국을 배신한 이병도는 기준왕이 건국한 204년의 역사를 말살, 삭제했다. 또한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백제를 한반도 속에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성(城)과 우곡성(牛谷城)에 대한 검증도 없이 金馬郡(금마군)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益山)이라하고 국호를 고쳐 馬韓(마한)이라고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춰 조작했던 것이다.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

[1]. 3국1체(三國一體)의 고조선 삼한시대

고조선은 3국 일체의 [고조선 3한]이 바른 국호입니다.
현행국사의 고조선은 [1.단군조선]⇒[2,위만조선]으로 구성하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 삼한이 등장하고, 고조선과 삼한이 마치 다른 시대로 기술돼 있습니다. [고조선]은 삼국일체제의 단군이 다스린 [고조선 3한]입니다. 즉 고조선 삼한 중의 진한(辰韓) 왕은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제후왕을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 고조선 3한과 현행국사의 3한  
 

[2]. 기자(箕子)는 고조선 삼한의 변한왕이다

기자는 고조선의 왕이 아니고 고조선 3한 중의 변한(弁韓)왕이다. 조국을 배신하고 우리역사를 말살했던 이병도는 箕子聖人(기자성인)이 변한 왕위를 계승하고 무릇 41대 929년의 역사를 말살했습니다. 그리고 위만에게 패한 준왕(기자의 후손 기준)은 해성(海城:요녕성)에 들어가 후마한을 재 건국하고 제 1세 武康王(강왕:기준왕)부터 8세 稽王(계왕)까지 무려 204년의 역사도 말살하고, 연나라의 도적 위만을 우리조상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삼한 중의 변한을 계승한 제 41대 箕準(기준)왕은 정미(BC194년) 연나라 위만이 침략해 오자 좌우궁인들을 거느리고, 海南(해남:요녕성 해주)으로 탈출하여 후마한을 건국했으나,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의 충견(忠犬)이었던 이병도는 금마군(金馬郡)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사(益山)에서 국호를 고쳐 馬韓(마한)이라 했다. 라고, 임의대로 지명을 변조하고, 우리나라를 철저히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말살했던 것입니다.

[3].이병도는 죽기직전 한4군의 위치를 밝혔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 요서(遼西)지방의 대릉하(大凌河)에 위치한 패수(浿水)를 북한의 청천강으로 지정하고, 또 하북성의 왕검성(왕험성)을 평양으로 지정하고 요서(遼西) 지방에 위치했던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을 평양으로 설정해서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의 강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B.C 108년까지도 국가다운 체제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부족사회(諸部族聯盟社會)를 강조했습니다. 한편 한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여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을 멸망(기원전108)시키고. 한은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을 설치하고, [한무제가 북한지역을 다스렸다]라고 입증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한반도 속에서 건국 되었것 처럼 철저히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꺾고,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편찬한 이병도는 죽기 전에 한4군에 대한 위치를 명확히 밝히고 죽었습니다. 대한민국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국사편찬위원회를 창설하고 국사학계의 최고 원로 이병도가 밝힌 한4군에 따라 당연히 새로 개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의 국사를 그대로 고수(固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이병도가 지정한 2곳의 한4군 위치도  
 

우리나라를 일찍 멸망시키고, 오직 개인의 영달과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이병도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미 이병도는 죽고 없는 지금도 망국적 치욕의 식민지 역사를 개편하지 않는 사유가 무엇인가?

이병도가 지정한 지명에 대해 단 한번의 검증도 없었다
이병도는 그의 스승 금서룡(今西龍)의 열대패삼수고(洌帶浿三水考)의 논문을 증거로 삼아 청국학총(靑丘學叢 13, 1933)의 패수고(浿水考)에서 패수를 청천강(淸川江)에 비정하고, 낙랑(樂浪)을 평안남도의 대부분이라 했습니다. 또 진번(眞番)은 낙랑 남쪽 자비령이남의 황해도지방과 한강이북으로 비정하고, 임둔(臨屯)은 함경남도의 대부분과 강원도 일부지방의 동해안으로 비정하고, 현도(玄菟)는 압록강 중류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망국적 국사를 고수하고 있는 국사편찬위회 위원들과 이병도를 추종하는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지명에 대해 단 한편이라도 검증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서울), 공주(公州), 전주(全州)와 가야국의 수도, 김해(金海) 등 삼국사기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에 기록된 각 지명과 왕도(王都)에 대하여 1945년 8.15이후 단 한 번의 검증도 없었다.

[4]. 국사편찬위원회는 언제까지 국민을 기만할 것인가?

교육인적자원부, 국사편찬위원회는 1, 교과용도서 개발 기본계획의 수립, 2, 교과용도서의 편수, 수정, 보완 등 편찬에 관한 사항, 3,교과용도서의 집필지침 및 검. 인정기준에 관한 사항 등 4, 한국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 편찬하는 국가 연구기관으로서 소장 자료, 논문, 저서, 한국사 관련 안내 등 막중한 책무가 있습니다.

[단군의 건국 : 중학교 국사 읽기자료 18쪽]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하여 인간 세상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즉 현행 중학교 국사교과서에 환인, 환웅, 단군왕검에 대한 이름이 명확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가 말살한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를 복원할 책무가 없단 말인가?

국사편찬위원회는 민족사학자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三聖)에 대한 역사가 명료히 수록돼 있으나 국보적 정통사서의 환단고기를 부정하고, 망국적 국사를 고집하며, 삼성(三聖)의 역사를 복원하지 않는 사유가 무엇인가?

1945년 8.15 해방이후 환단고기를 비릇하여 무수한 사료(史料)들이 발견되어 국사편찬위원회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수집한 사서(史書)로 현행 국사에 반영 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수집하며, 왜 사고(史庫) 속에 잠자고 있는가?

상기의 중, 고등국사를 살펴본 것과 같이 현행 국사의 구성은 고조선의 국조 단군을 비릇하여 3국의 시조는 왕이 아니고 부족장이며, 문명 또한 제일 뒤떨어진 미개한 민족으로 철저히 비하(卑下)하고, 한반도 속의 소국으로 구성하여 민족적 자금심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돼 있습니다. 그러나 7천만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민족의 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추종하고 현행 국사를 고수하고 있는 무리들은 정보문명시대의 대명천지에 도대체 언제까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며, 7천만 대한민족을 기만 할 작정인가?

역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처단하라...!

(1). 1938년의 조선사와 현행 국사는 똑 같습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38년 반도조선사 편찬 핵심위원 이케노우치(池內宏), 이마니시(今西龍)등 20여명의 일인들과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편찬했던 조선사] 와 [2005년 3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된 현행 중, 고등학교 국사]는 그 구성 형태와 근본적 내용은 똑 같은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의 요결문과 조선사 편찬 지침과 똑 같이 현행 국사는 철저한 식민지사관과 패배의식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로 확인했습니다.

(2). 일제가 만든 망국적 국사를 고수하는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족기관인가? 일본정부 대리기관인가?

현 국사편찬위원회는 1910년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가 모태입니다. 즉 1945년 8월 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등이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서 국사연구기관을 준비하여 미군정하인 1946년 3월 23일 일제식민지시대 중추원 내에 있던 조선사편수회 사무실에 국사관(國史館)이란 이름으로 발족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다음해의 1949년 7월 현재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정식 발족했습니다.

즉 일제식민지세대의 조선사편수회 => 국사관 => 국사편찬위원회로 계승되었습니다. 일제가 1910년 설치한 중추원은 조선총독직속으로 민족독립사상의 탄압, 전통적 문화와 역사, 말살, 왜곡, 찬탈,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는 정책’으로 대한제국의 민족존립 자체를 망치는 악질적인 통치정책기관이 바로 중추원입니다.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역사를 말살, 왜곡시키기 위한 한국역사 변조 연구기관이란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선사편수회의 일인들이 만든 조선사를 철폐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족기관인가? 나라를 망치는 일본정부 대리기관인가? 또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추종하며, 온갖 괴변으로 망국적 국사를 사수(死守)하는 강단사학자는 민족반역자인가?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반민족적 대리인들인가?

1945년 독립국이 되었으면 당연히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철폐하고, 말살, 왜곡, 유린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마땅 할 막중한 책무를 기피한 역대 교육부 장관들은 직무유기 죄로 처단해야 마땅 할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된 조선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는 당연히 해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하의 친일 반민족적 반역자들의 처단만 일제식민지의 잔재 청산이 아니라 1945년 해방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반민족적 반역행위자들을 완전히 색출 소탕, 척결해야 진정한 의미의 일제식민지 잔재 청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근본적으로 뒤 틀린 현행 국사를 지적한다

현행 국사 조직형태는 중국과 이웃한 고조선의 단군은 국왕이 아니고 부족장이며, 문명 또한 연나라의 망명객 위만조선시대의 BC 4세기경에 이르러 비로소 철기를 쓰기 시작하여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문명이 제일 뒤떨어진 미개 민족으로 철저히 비하한 국사로 밝혀졌다.
또한 단군왕검은 고조선 삼한을 3국 1체제로 다스려 세계적 대국이었으나 마치 삼한(三韓)이 다른 시대의 나라처럼 위만조선이 멸망 한 후에 한반도 속의 중부 이남에서 건국된 소 부족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 또한 아세아적 대국이었으나 마치 한반도 속에서 건국 된 것처럼 소국 적 역사관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뒤 틀린 국사]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더구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백제의 시조 온조, 가야국의 수로왕 등은 왕이 아니고 부족장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왕국이 시작한 때는 고구려는 6대 태조왕(53년)부터,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년)부터, 왕국이 제일 뒤늦은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의 356년부터 비로소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문명과 왕국이 세계에서 제일 뒤늦게 기록된 한국의 역사는 참으로 기막힌 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漢戊帝(한무제)는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을 북한 지역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3국은 중국 황제에 의하여 책봉되는 속국으로서 주체적으로 발전된 나라가 아니라 항상 소국이 대국을 받들고 조공을 바치며 유지 발전되어 왔다. 는 요지의 이른바 “ 한반도 속의 소국 적 사대역사관(事大歷史觀)과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교과서 ”를 일제의 손으로 편찬하여 오늘날까지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정부기관의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가 만들어 준 망국적 국사를 철폐하고 반드시 개편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기피했기 때문에 소위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이 창설되어 막대한 국고 소실을 초래했습니다. 상기에서 열거한 것과 같이 더 이상 국사편찬위원회가 존속할 존재가치를 상실했습니다. 국민의 혈세인 국고만 낭비하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즉각 해체하고 역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처단하라...! 처단하라...!!

만약에 역대 국사편찬위원장과 소위 강단사학자들이
본 논설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필자는 달갑게 감수할 각오가 준비돼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는 [역사 진단 제6편]
[동북아역사재단을 해체하라] 가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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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쏘 2007-10-31 12:12:31
역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처단하라...!

(1). 1938년의 조선사와 현행 국사는 똑 같습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38년 반도조선사 편찬 핵심위원 이케노우치(池內宏), 이마니시(今西龍)등 20여명의 일인들과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편찬했던 조선사] 와 [2005년 3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된 현행 중, 고등학교 국사]는 그 구성 형태와 근본적 내용은 똑 같은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의 요결문과 조선사 편찬 지침과 똑 같이 현행 국사는 철저한 식민지사관과 패배의식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로 확인했습니다.

(2). 일제가 만든 망국적 국사를 고수하는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족기관인가? 일본정부 대리기관인가?

현 국사편찬위원회는 1910년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가 모태입니다. 즉 1945년 8월 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등이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서 국사연구기관을 준비하여 미군정하인 1946년 3월 23일 일제식민지시대 중추원 내에 있던 조선사편수회 사무실에 국사관(國史館)이란 이름으로 발족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다음해의 1949년 7월 현재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정식 발족했습니다.

즉 일제식민지세대의 조선사편수회 => 국사관 => 국사편찬위원회로 계승되었습니다. 일제가 1910년 설치한 중추원은 조선총독직속으로 민족독립사상의 탄압, 전통적 문화와 역사, 말살, 왜곡, 찬탈,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는 정책’으로 대한제국의 민족존립 자체를 망치는 악질적인 통치정책기관이 바로 중추원입니다.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역사를 말살, 왜곡시키기 위한 한국역사 변조 연구기관이란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선사편수회의 일인들이 만든 조선사를 철폐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족기관인가?

나라를 망치는 일본정부 대리기관인가?
또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추종하며,
온갖 괴변으로 망국적 국사를 사수(死守)하는 강단사학자는
민족반역자인가?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반민족적 대리인들인가?

1945년 독립국이 되었으면 당연히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철폐하고, 말살, 왜곡, 유린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마땅 할 막중한 책무를 기피한 역대 교육부 장관들은 직무유기 죄로 처단해야 마땅 할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된 조선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는 당연히 해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하의 친일 반민족적 반역자들의 처단만 일제식민지의 잔재 청산이 아니라 1945년 해방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반민족적 반역행위자들을 완전히 색출 소탕, 척결해야 진정한 의미의 일제식민지 잔재 청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근본적으로 뒤 틀린 현행 국사를 지적한다

현행 국사 조직형태는 중국과 이웃한 고조선의 단군은 국왕이 아니고 부족장이며, 문명 또한 연나라의 망명객 위만조선시대의 BC 4세기경에 이르러 비로소 철기를 쓰기 시작하여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문명이 제일 뒤떨어진 미개 민족으로 철저히 비하한 국사로 밝혀졌다.

또한 단군왕검은 고조선 삼한을 3국 1체제로 다스려 세계적 대국이었으나 마치 삼한(三韓)이 다른 시대의 나라처럼 위만조선이 멸망 한 후에 한반도 속의 중부 이남에서 건국된 소 부족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 또한 아세아적 대국이었으나 마치 한반도 속에서 건국 된 것처럼 소국 적 역사관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뒤 틀린 국사]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더구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백제의 시조 온조, 가야국의 수로왕 등은 왕이 아니고 부족장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왕국이 시작한 때는 고구려는 6대 태조왕(53년)부터,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년)부터, 왕국이 제일 뒤늦은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의 356년부터 비로소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문명과 왕국이 세계에서 제일 뒤늦게 기록된 한국의 역사는 참으로 기막힌 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漢戊帝(한무제)는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을 북한 지역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3국은 중국 황제에 의하여 책봉되는 속국으로서 주체적으로 발전된 나라가 아니라 항상 소국이 대국을 받들고 조공을 바치며 유지 발전되어 왔다. 는 요지의 이른바 “ 한반도 속의 소국 적 사대역사관(事大歷史觀)과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교과서 ”를 일제의 손으로 편찬하여 오늘날까지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안

고구려 2007-10-31 23:07:35
조선사편수회에서 낸 [조선사] 정말 보신 것 맞나요?
보셨다면 이런 주장을 하실 수 없죠.
[조선사]는 역사책이 아니고 [사료집]입니다.

orumi.egloos.com/2922462

여기 가서 확인하신 뒤 반성 하시기 바랍니다.
못 미더우시면 중앙도서관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박병역 2007-11-01 11:15:45

♦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중국 각처에 산재한
한국 관계의 각종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 중국에 출장 갔다가 돌아온
조선사편찬 실무자들에게 [ 조선사 ] 편찬 시책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국의 고대 역사, 전통적 문화를 알지 못하게 불태워 말살하면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과장하게 들추어내서 조선사를 편찬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하므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은 자국의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 하나의 기풍이 조성될 것이다.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조선인들이 일본사람으로 동화되는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사를 만들어 주는 목적이며,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의 지시에 따라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 결의에서 [환인, 환웅, 단군의 고조선과 북부여의 해모수까지 무려 7,166년의 역사는 짤라 없애고] 제1편「삼국이전」을 「신라통일이전」으로 정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938년(소화13년) 3월에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이케노우치(池內宏),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신석호․ 홍희 같은 한인역적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5] 1938년의 조선사와 현행 국사는 똑 같습니다.

(1) 1938년 일제가 독자적으로 편찬한 조선사] 와 (2),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5년 3월 1일 발행된 현행 고등학교 국사]는 그 구성 형태와 근본적 내용은 똑 같습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의 요결문과 조선사 편찬 지침과 똑 같이 현행 국사는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로 곧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명 고구려는 본심을 속이지 말고 진심으로 각성하세요
일왕에게 충성한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현행국사는

중국은 기원전 3천년 경 황제가 등장하여, 청동기를 사용하고, 황금 문명이 크게 발달되었으나 중국과 이웃한 고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조선 시대의 기원전 150년경부터 비로소 청동기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라고 우리민족을 문명이 제일 뒤 떨어진 미개한 민족으로 철저히 비하(卑下)시켜서 편찬했던 것이다.

필명 고구려님은
아래의 관련 기사 지난주에 연재되었던
[역사마을] 제 4편 [반도조선사 이렇게 만들어 졌다]부터
탐독한 후에 다시 지적해 주시면 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고구려 2007-11-02 01:17:14
조선사에 지도가 있다고 하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br>br>소개해준 블로그는 보지도 않은 모양이니 조선사 목차를 올려드리지요. 이게 국사교과서와 뭐가 같단 말인지 해명해 보시기 바랍니다.br>br>구 분 권차 내 용 분량(쪽) 간행연도br>br>----------------------------------------------------------------------------------------br>br> 총목록 1 범례 및 목록 191 1938br>br>----------------------------------------------------------------------------------------br>br> 1 편 1 조선사료 732 1932br> 신라 2 일본사료 352 1932br> 통일이전 3 중국사료 808 1933br>br>------------------------------------------------------------------------------------------br>br> 2 편br>통일신라 1 신라 문무왕9년(669년) 457 1932br> 시대 ~고려 태조 18년(935년)br>br>-------------------------------------------------------------------------------------------br>br> 1 고려 태조 19년(936년)~선종 1년(1083년) 530 1932br> 3 편 2 선종 2년(1084년)~의종 1년(1146년) 600 1932br>고려시대 3 의종 2년(1147년)~고종 10년(1222년) 581 1933br> 4 고종 11년(1223년)~충렬왕 5년(1278년) 550 1933br> 5 충렬왕 6년(1279년)~충혜왕 1년(1330년) 543 1934br> 6 충혜왕 2년(1331년)~우왕 1년(1374년) 479 1935br> 7 우왕 2년(1375년)~공양왕 4년(1392년) 1935br>br>--------------------------------------------------------------------------------------------br>br> 1 조선 태조 1년(1392년)~태종 10년(1410년) 556 1932br> 4 편 2 태종 11년(1411년)~세종 5년(1423년) 516 1933br>조선시대 3 세종 6년(1424년)~세종 24년(1442년) 683 1935br> 전기 4 세종 25년(1443년)~세조 12년(1466년) 756 1936br> 5 세조 13년(1467년)~연산군 3년(1497년) 1038 1937br> 6 연산군 4년(1498년)~중종 10년(1515년) 563 1935br> 7 중종 11년(1516년)~중종35년(1540년) 642 1936br> 8 중종 36년(1541년)~선조 4년(1571년) 772 1937br> 9 선조 5년(1572년)~선조 25년(1592년) 677 1937br> 10 선조 26년(1593년)~선조 41년(1608년) 1282 1937br>br>---------------------------------------------------------------------------------------------br>br> 1 광해군 1년(1608년)~인조 3년(1625년) 537 1933br> 2 인조 4년(1626년)~인조 15년(1637년) 482 1933br> 3 인조 16년(1638년)~효종 8년(1657년) 584 1934br> 5 편 4 효종 9년(1658년)~현종 14년(1673년) 546 1934br>조선시대 5 현종 15년(1674년)~숙종 15년(1689년) 634 1935br> 중기 6 숙종 16년(1690년)~숙종 36년(1710년) 810 1936br> 7 숙종 37년(1711년)~영조 2년(1726년) 852 1936br> 8 영조 3년(1727년)~영조 25년(1749년) 1034 1936br> 9 영조 26년(1750년)~영조 51년(1775년) 784 1937br> 10 영조 52년(1776년)~정조 24년(1800년) 1016 1937br>br>------------------------------------------------------------------------------------------br>br> 1 순조 1년(1800년)~순조 20년(1820년) 720 1934br> 6 편 2 순조 21년(1821년)~헌종 6년(1840년) 710 1935br>조선시대 3 헌종 7

고구려 2007-11-02 01:22:37
일제가 20만권을 태웠다는 책자 내용은 확인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일제 군수를 지낸 악질 친일파 문정창의 헛소리에 부화뇌동해서 떠드는 것밖에 할 줄 모르고 실제 발로 뛰어서 자료 확인은 해보셨나요? 문정창이 근거로 댄 것은 일제 관보고, 그 관보에는 해당 서적들이 모두 나열되어 있습니다. 51종의 책입니다. 보나마나 무서워서 확인도 못하시겠지만 다시 한번 해당 목록이 나온 블로그를 소개해 드리죠. 제발 눈으로 확인하고 그런 자료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나서 떠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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