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에리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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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에리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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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 운하의 역사를 보면 운하는 역시 ‘19세기의 産物’임을 알 수 있다

 
   
  ▲ 에리 운하 지형도  
 

미시시피 강, 오대호(五大湖) 등 바다처럼 넓은 강과 호수가 많은 미국에는 크고 작은 운하가 많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운하를 하나 뽑으라면 단연 에리 운하(The Erie Canal)이다.

유래

18세기 말 미국 동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서양 연안과 북미 대륙 내륙을 잇는 물길을 만들 수만 있다면 중서부(mid-west)의 평원(平原)을 보다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더구나 그때 영국에선 맨체스터 항(港)과 내륙의 탄광지역을 잇는 브리지워터 운하가 완공되어 미국의 기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몇몇 사람들이 뉴욕주 북부 아디론댁 삼림지역에서 발원해서 뉴욕시를 통해 대서양으로 흐르는 허드슨 강을 오대호와 물길로 연결시키면 중서부 곡창지대와 대서양 연안 인구 밀집지역 사이의 물류 이동을 빠르고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허드슨 강의 상류인 올바니(Albany)와 에리 호(Lake Erie)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면 중서부의 목재, 광물, 및 곡물을 배로 수송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올바니에서 에리 호까지의 거리는 거의 360마일(약 500 킬로미터)에 달했다. 거리도 거리이지만, 올바니 보다 에리 호 수면이 600피트(183미터)이나 높다는 난점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갑문은 12피트(3.5미터) 정도여서 최소한 50개의 갑문을 세워야만 했다. 360마일이나 되는 운하를 파고 50개나 되는 갑문을 세우는 것은 당시로서는 재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 계획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면서 연방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 1908년대 버팔로(Buffalo)의 바지 운송모습  
 

드위트 클린턴 주지사

무모해 보이기만 한 계획은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드위트 클린턴(DeWitt Clinton : 1769-1828년. 상원의원과 뉴욕 시장을 지냈고, 191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한테 패배했고, 1817-1823년 간 뉴욕 주지사를 지냈다.)의 관심을 끌었다. 운하 계획에 매료된 클린턴 지사는 주 의회를 설득해서 1817년에 드디어 예산 700만 달러를 얻어냈다. 공사는 곧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하도 무모해 보여서 사람들은 이를 ‘클린턴의 바보짓(Clinton's Folly)’라고 불렀다.

운하는 폭 12미터 깊이 1.2미터로 건설되었다. 파낸 흙은 주변의 제방 도로를 쌓는데 썼고, 운하의 측면은 돌을 붙였다. 독일로부터 석공 수백 명을 불러 와서 공사를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 남아서 나중에 뉴욕의 많은 석조(石彫) 건물을 건축하는데 참가했다. 울창한 나무를 제거하고 도랑을 파는 어려운 일을 부지런히 해서 1920년에는 유티카에서 시라큐즈까지의 중간 부분이 먼저 완공되었다.

로체스터에서 올바니에 이르는 250마일과 챔플레인 호(湖)에서 북으로 운하와 이어지는 부분이 1823년에 준공되었다. 지반이 견고한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서쪽 부분에 도랑을 내고 갑문을 만드는 공사가 특히 힘들었다. 1825년 10월26일, 드디어 운하가 완공되어 드위트 클린턴은 버팔로에서 바지선(船)을 타고 9일간 항해를 거쳐 뉴욕 맨해튼에 도착했다. 뉴욕시민들은 클린턴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환영했다.

중서부 개발을 촉진시키다

에리 운하의 완공은 대단한 영향을 가져왔다. 중서부로 들어가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고, 에리 운하와 허드슨 강을 따라 도시가 들어섰다. 뉴욕 항은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다른 도시를 젖히고 미국 제1의 항구 도시로 부상했다. 에리 운하와 다른 호수를 잇는 운하 공사가 계속 진행되는 등 뉴욕주에 운하 건설 붐이 불었다. 1835년부터는 증가하는 물동량을 수용하기 위해 운하를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1905년에서 1918년 동안에는 운하를 확장하는 공사가 다시 이루러 졌다. 이 때에는 원래 운하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새 공법을 사용해서 1억 달러 예산을 들여 운하를 새로 건설했다. 이에 따라 원래의 운하는 ‘올드 에리 운하(The Old Erie Canal)’라고 불리게 됐고, 많은 부분은 버려지거나 매립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됐다. 1918년에 새로 준공된 에리 운하는 다른 운하와 함께 ‘뉴욕 바지 운하(New York Barge Canal)’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 1918년 버팔로 부근 록포트(Lockport)갑문  
 

철도 및 고속도로와의 경쟁

1831년에 올바니에서 에리 운하를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고, 1842년에는 버팔로에서 올바니에 이르는 전구간(全區間)에 걸쳐 철도가 완공되었다. 이제 에리 운하는 철도와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승객들은 보다 빠르고 편리한 철도를 택했지만, 아직도 운하는 철도보다 열 배나 많은 화물을 실어 날랐다. 이런 추세는 지속돼서, 1951년에 에리 운하는 520만 톤의 화물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1951년 이후 운하를 이용하는 화물 물동량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철도 뿐 아니라 2차 대전 후에 고속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운하는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다. 

 
   
  ▲ 에리 운하 관광 유람선  
 

레크리에이션 운하로 다시 태어나다

물동량이 점차 줄더니 1990년대 들어 에리 운하는 전적으로 관광 유람선과 자기용 보트를 타는 레크리에이션 목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운하 군데군데 보트 계류장이 만들어지고 물길을 따라 자전거 타는 길이 만들어 졌다. 뉴욕 운하는 화물 바지가 시커먼 연기를 뿜고 다니던 옛날의 에리 운하가 아닌 것이다.

1992년, ‘뉴욕 바지 운하’는 그 명칭이 ‘뉴욕 운하 시스템’으로 바뀌고 운영권은 뉴욕주 유료도로 위원회로 이관되었다. 화물을 나르는 바지가 더 이상 다니지 않기 때문에 명칭에서 ‘바지’를 빼버린 것이다. 뉴욕주 정부는 이 운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운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위락용 보트가 많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운하가 주로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 쓰임에 따라 겨울이 되면 운하는 물을 빼고 보수를 했다. 2006년 뉴욕주는 운하를 사용하는 보트에 대해 운하 사용료를 면제했다. 따라서 운하의 관리는 유료도로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감당하게 되었다.

2006년 여름에 뉴욕 북부에 대홍수가 나서 운하의 중간부분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복구비용만 최소한 1500만 달러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 2006년 여름 대홍수로 피해를 입은 에리 운하 모습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에리 운하의 역사를 보면 운하는 역시 ‘19세기의 산물(産物)’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에리 운하는 높은 지대인 에리 호와 낮은 지대인 허드슨 강을 이은 것이다. 에리 호 등 오대호는 물이 무진장으로 있어 운하에 흐를 물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또 이미 오대호에는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항구가 있었고, 수량이 풍부한 허드슨 강에도 화물선이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물길을 이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에리 운하는 철도가 깔리면서 물동량을 잃어 버렸고, 2차 대전 후 고속도로가 거미줄 같이 깔리자 화물 수송수단으로서의 용도는 폐기돼 버렸다. 오늘날 뉴욕-올바니-시라큐즈-버팔로를 잇는 유료 고속도로(I-90 하이웨이)는 허드슨 강과 에리 운하로 이어지는 지난날의 물길을 대신하고 있다. 

 
   
  ▲ 대홍수로 피해를 입고 에리 운하에 방치된 유람선들  
 

이명박씨가 추진하는 경부 운하는 에리 운하를 건설할 당시의 뉴욕주와는 상황이 맞지가 않는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깔려 있다. 도로는 많지만 화물이 부족해서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데모를 하는 판인데, 도무지 운하에 무엇을 실어 나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대양(大洋)처럼 넒은 호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충주댐과 안동댐의 물을 흘려 보내지 않는 한 ‘이명박 운하’에는 물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봄철 갈수기에 사람들이 쓸 물도 부족한데 있지도 않은 화물을 나르겠다고 댐의 수문을 열어 물을 흘려 보낼 것인가. 댐물은 돈을 내고 사 쓰는 것인데, 보아하니 청계천 물처럼 억지를 부려 공짜로 퍼다 버릴 심산(心算)인 것 같다.

에리 운하는 역사적 사명을 훌륭하게 해 냈다. 그래서 뉴욕 북부와 일리노이 미시건 등 중서부에는 ‘클린턴’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도시가 곳곳에 있고 시카고에 ‘클린턴 스트리트’, 시라큐즈에 ‘클린턴 스퀘어’라는 지명이 있다. 이는 물론 에리 운하를 세워 내륙을 개발한 드위트 클린턴을 기리기 위함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을 기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이미 끝났으니 바지 운하로서 에리 운하는 역사적 사명을 다 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운하를 만든 드위트 클린턴은 선각자이다. 하지만, 21세기 초에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처 있고, 하천 수량이 부족하고, 또 도무지 하천에 배가 다니지 않는 나라에 엉뚱하게 운하를 세우겠다는 사람을 도무지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 대홍수와 함께 19세기 유물로 전락한 에릭 운하  
 

에리 운하는 역사적 사명을 훌륭하게 해 냈다. 그래서 뉴욕 북부와 일리노이 미시건 등 중서부에는 ‘클린턴’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도시가 곳곳에 있고 시카고에 ‘클린턴 스트리트’, 시라큐즈에 ‘클린턴 스퀘어’라는 지명이 있다. 이는 물론 에리 운하를 세워 내륙을 개발한 드위트 클린턴을 기리기 위함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을 기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이미 끝났으니 바지 운하로서 에리 운하는 역사적 사명을 다 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운하를 만든 드위트 클린턴은 선각자이다. 하지만, 21세기 초에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처 있고, 하천 수량이 부족하고, 또 도무지 하천에 배가 다니지 않는 나라에 엉뚱하게 운하를 세우겠다는 사람을 도무지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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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07-04-18 18:15:48
무식한 건설사업이 운하 사업이다.
그리고 이번에 명빡한테 안티 거는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운하건설현장에 강제 동원되어 일하게 될 것이다.

ㅋㅋㅋㅋ

ㅋㅋ 2007-04-19 15:29:13
성공한 운하도 많은데 왜 꼭 실패한 운하만 들먹이는 것일까?

익명 2007-04-19 18:58:48
성공한 운하는 어딧는데???

굿뉴스 2007-04-22 10:58:34
치밀하게 검토 준비한 한반도 대운하

두 전직 총리들께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정식 토론을 제안하며...


지난주에 이해찬 前총리와 한명숙 前총리가 잇따라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이 본격적으로 ‘이명박 때리기’, ‘대운하 때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동안 이러한 작업은 친여매체와 단체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진행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전직 총리들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이명박이 무섭고, 한반도 대운하가 무섭기 때문이다. 영관급과 장성급으로 안 되니까 대장들이 직접 나선 꼴이다.

특히, 이해찬은 지난 대선 때 수도이전공약을 기획한 장본인이다. 그때 그들은 수도이전 공약을 내걸고 한나라당이 때려주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한나라당이 공격하고 나오자 환호작약했다. ‘드디어 걸려들었다!’라며.

그런 그들이 이제는 역으로 어리석은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젠 그들도 거꾸로 걸려들었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위험부담까지 감수하며 이렇게 나서는 것은 대운하의 파괴력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을 의미 한다.

더구나 그들의 공격 논거는 일일이 공박할 필요도 없이 유치하고 찬란하다. 일국의 총리를 지낸 분들이 어쩌면 이런 정도의 수준일까 할 정도다. 물론 실무자들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읊조리다 보니까 그렇긴 하겠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이명박의 대운하는 수도이전처럼 대선용으로 급조된 공약이 아니다. 이미 십여 년 전 국회의원 시절에 연구회까지 만들어서 치밀하게 검토해 왔고, 1996년 7월 대정부 질문을 통해서 ‘정권과 상관없이 국운융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국가과제’라고 역설한 바 있다.

결국 전직 두 총리들의 대운하 반박은 남이 십 수 년을 고민하고 연구한 일에 대해 잠깐 얻은 귀동냥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식이다. 남대문 안 본 자가 본 자보다 더 잘 안다지만, 총리를 지낸 분들조차 이 지경이니 참여정부가 왜 국정파탄을 초래했는지 저절로 이해가 간다.

길게 얘기할 게 없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가 청계천복원 공약을 내세울 때 모든 사람이 반대했고 말렸었다. 심지어는 청계천 주변의 수십만 상인들도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되었는가? 개통 후 지금까지 국내외 연인원 4,500만 명이 다녀간 ‘대한민국 대표 명품’이 되지 않았는가! 청계천에 비하면 한반도 대운하는 오히려 양반이다. 찬반이 나뉘고 있지만 각종 여론조사 상에는 찬성이 앞선 것으로 나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해찬, 한명숙 두 전직 총리들께 제안한다. 한반도 대운하에 대하여 전직 총리들답지 않게 실무자들이 써준 원고를 가지고 게릴라식으로 찔끔찔끔 공격할게 아니라, 시간을 내어 제대로 공부를 한 후 정식으로 토론장으로 나오기를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에게 그럴 용기와 지식이 있을까?
정두언

무식한 2007-04-22 18:56:49
지금이 어느시대 인데 운하 운운 하느가?
노가다 시대는 끝났다.
생각의 발상을 바꾸어라..
지금 누가 노가다 가서 일하겠는가?
무식한 경제논리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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