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은 폭동이었다”
“광주 5.18은 폭동이었다”
  • 편집부
  • 승인 2019.01.1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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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남도청 근무 공무원의 육성 증언
5·18 당시 광주 도청 공무원 정의환(필명)
5·18 당시 광주 도청 공무원 정의환(필명)

* 1980년경 광주에서 있었던 5.18관련 실제 상황을 제가 보고 겪었던 사실들만을 말씀드리겠다.

* 나는 그 당시 31세였고 전남도청 보건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 1980년경 광주지역 분위기 

- 이름도 생소했던 전두환씨가 정권을 휘두르고, 광주전남에서는 거의 신격화되다시피한 김대중을 내란음모로 사형선고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전라도민들은 전두환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바닥에 깔려있었고, 대학생들은 날마다 전두환을 죽이자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데모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결코 아니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이미 민주화가 되어 있었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여 먹고살기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구국이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다는 명분 같은 것은 없었기에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대다수의 전라도민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 5.18 민주화란 사건의 시발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대학생들의 데모는 1980년 5월 14일까지 광주 시내에서 산발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결코 과격하다거나 무력을 사용한 데모는 전혀 아니었다. 실제 데모에 참가한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총학생회 간부들의 우격다짐으로 데모를 선동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참가한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 1980년 5월15일경부터 5월21경까지의 광주지역 실제 상황

- 5월 14일 경까지 광주 시내에서 시끄럽게 산발적으로 하고 있던 대학생들의 데모가 5월 15일부터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나도 그 당시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 5월 14일 대학생들의 데모가 자취를 감추자 5월 15일부터는 전혀 낮 설은 청장년들이 나서서 일반 시민들을 선동하여 데모대를 이끄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이 낮선 청장년들이 주동이 되어 갑작스럽게 일반 시민들이 시내를 몰려다니면서 데모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5월 18일 경부터는 본격적으로 데모가 이루어짐과 동시 매우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변하여 공권력을 거의 마비시켜 버렸다. 이때부터 경찰력은 보이지 않고 시가는 완전히 치안공백 상태가 되고, 그 데모대들의 폭력적인 형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 광주 인근의 군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 5월 21일은 5.18사태의 최고 정점기가 되는 날로, 데모대들이 다수 총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데모대들이 탈취한 시내버스와 어디서 몰고 온 것인지는 몰라도 군 장갑차를 앞세우고 금남로 5가 쯤에서부터 금남로1가 끝에 위치한 도청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때 인근의 군 병력이 도청 앞 분수대 앞에서 가로 1미터 세로 0.5미터쯤 되는 콘크리트 화분대에 엄폐해 데모대를 향해 방어하고 있었고, 데모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군 병력 코앞까지 몰려오자 군인들은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군인들 중 2명이 수협 앞에서 장갑차를 피해 뒷걸음을 치다가 그대로 전진해온 장갑차에 깔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시체로 변해버렸으며, 이것이 5.18사태 중 광주에서 최초로 목격한 사망 사고였다. 그 당시 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도청 본관 3-4층 복도에서 금남로 데모 상황을 지켜보던 직원들 10여 명뿐이었다. 데모대는 장갑차 한참 뒤에 있었고 수협 주변에는 시민들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 5월 21일 오후 6시경에 도청이 데모대들의 수중에 함락됐습니다. 나는 도청 바로 옆 동명동 동료 직원 집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 대문 앞에서 데모대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중 유리창은 하나도 없고 엉망진창이 된 시내버스가 집 앞에 멈추는 것을 보고 차안을 살펴봤더니 운전은 건장한 청장년이 하고 있고 뒤에는 중고생들과 몇몇 시민들이 타고 있었는데 차 바닥에는 총알이 그득그득 담긴 탄알 상자와 수류탄, 총들이 어지럽게 수북히 쌓여 있고 아이들은 양쪽에 탄알 띠를 두르고 수류탄을 몇 개씩 허리에 차고 총들을 메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여 얼른 내리려고 하였으나 차가 그대로 출발해버려 어딘지도 모르고 다니게 되었으며 얼마나 시간이 되었는지 모른 채 차가 멈추기에 급히 뛰어내렸으며, 캄캄한 밤중이라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서 있던 중 시커먼 장갑차가 제 앞에 멈췄다. 장갑차 문이 열리고 여성이 나보고 왜 여기 서있느냐고 하길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집에를 가려고 하나 갈 방도가 없는 형편이라고 말하니까 타라고 했다. 생전 처음 장갑차에 탔더니 30~40대쯤 돼 보이는 사람이 운전하고 여성은 시민들을 향해 방송을 하고 다닌다고 하였으나 특히 운전자의 인상이 매우 낮 설고 전라도민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인상이었다. 도청 근방에서 내려주기에 무사히 집에 오게 되었고, 그동안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내가 데모대 차를 타고 간 후 소식이 없자 식구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 그 날 밤에는 집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매캐한 연기 때문에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나와 보니 집 옆에 있던 세무서가 흔적도 없이 불에 타 버렸고, 엠비시 방송국은 반쯤 탄 채 샷타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시내는 곳곳에 타이어 등으로 도로를 차단하고 불을 질러 온 시내가 전쟁 직후의 폐허 상태와 같았다.

* 도청 앞이나 거리 곳곳에 군용 차량들이 즐비하고 그 위에는 무장 비슷한 옷과 헬멧 등을 쓴 역시 매우 낮 설은 사람들이 헬멧이나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특이하게도 찔레꽃 같은 것을 꼽고 있고 무리를 지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 있었으나 평화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 5월 22일에는 시내는 교통수단이 없어서 무장 시민군들이 운전하는 군용 트럭들이 일반 시민들의 운송 수단이 되어 있었다. 나도 가족을 데리고 광천동 이모님 댁으로 가기 위해 시민군들이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갔었고, 이모님 집에 있는 동안 이상한 놈들이나 동네에서 도둑질이나 하던 자들이 총까지 휴대하고 집에 들어와 밥을 달라거나 집안을 살피거나 매우 위협적인 태도들을 보이는 터라 이모님은 그들이 주라는 대로 얼른 주고 돈도 주웠는데 이 자가 내 처를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데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상태가 보통 심각한 정도가 아니었다. 또 내 처가 보통 미인이 아니기도 했었고. 겨우 그 순간을 모면하고 그자가 간 후에도 가슴이 떨렸고 그 당시 시내 곳곳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들이 파다했고 금고나 슈퍼마켓 등은 이미 다 털려 버렸고 그때는 동네 건달들이나 좀도둑들의 세상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그 후 21일까지 숨죽이며 버티다가 상황이 도저히 힘들어 22일 아침에 몇 시간을 걸어서 담양 밖에까지 가서 시골집 방향으로 가는 차편을 얻어 타고 시골집에 도착했다. 담양 밖에 오니까 나뿐만 아니라 피난 행렬이 줄을 서고 있었다.

* 5월 27일 도청이 수복되었다는 방송을 듣고 급히 광주로 내려가 출근했다. 출근을 해보니 도청 민원실 앞에는 무기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 출근하자마자 보건과 의료진들과 함께 사망자, 부상자를 파악하고, 부상자 치료 및 시신 검안 등을 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 우선 도청 중앙 공간 등에 시신들을 쌓아 놓은 곳으로 갔더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시신들은 일부는 관 안에 들어 있었고, 일부는 비닐 등에 싸여 있었고, 일부는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시신들을 살펴보니 거의 다 황토 땅에 묻혔다가 파온 것처럼 황토흙투성이였고 시체들의 형체는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상태였다.

* 어떤 여성 한 명이 시체들 위에 촛불을 켜고, 찔레꽃을 꽂고 있었다.

* 시체들이 그렇게 많아도 유가족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트럭들은 어디선가 시신들을 계속 싣고 오고 있었는데 도대체 시체들을 어디서 누가 찾아서 가지고 왔는지가 매우 궁금하고 의아했었다. 의료진들이 시체들을 대략 검안하고 시신 숫자를 파악하고, 사무실에 와서는 국군통합병원을 비롯해서 각 병원들로부터 부상자를 파악하기 시작 했다. 부상자들은 현장에 가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각 병원이나 의원들로부터 접수된 것만을 파악했고, 부상자들의 인적사항도 함께 파악했다.

* 부상자들을 파악하는데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중복된 환자들이 있었고 경상이나 중상환자들이 서로 겹치고 하여 인원수가 들쑥날쑥 했고 보고를 하고서도 틀린 경우가 많았다.

*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시신이나 부상자들이 나오지 않아 최종 집계를 하였다. 부상자는 437명, 사망자는 121명인 것으로 기억한다.

* 부상자들의 인적사항은 파악이 됐지만 사망자들의 인적사항은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그 후 시신들을 관에 넣고 방부제와 탈취제들을 쏟아붓고 시신들을 모두 도청 앞 상무관으로 옮겨서 유가족들이 시신들을 확인하도록 했다.

* 그 때 가장 특이하고 의아했던 점은 5.18 민주화 사태는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임에도 부상자들이나 사망자들 중 대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고 한 사람도 없었다.

* 당시 도청에서 부상자나 사망자들을 파악하고 치료 등을 해주는 담당실무자는 나였으나 도청 직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내가 소속해 있는 보건과 직원들조차 거의 관심이 없었고 계장, 과장, 국장, 도지사만 업무를 챙기신 정도였고, 오로지 나 혼자 5.18관련 모든 업무를 수행했다.

그 까닭은 5.18사태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학생들과 일부 어리석은 시민들이 데모를 하다 우발적으로 이런 사태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고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때문이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고. 만약 지금 시대에 5.18사태가 일어났다면 도청 직원들. 경찰들, 검찰들, 의원들, 시민 단체들 등이 총동원되어 사건을 수습했을 것이다.

* 그 후 여론들은 사망자가 최소한 500명에서 5000명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대세였으나 나는 그런 여론에 코웃음 치고 있었다. 당시 부상자에게는 400만원 사망자에게는 600만원을 무조건 지급하기로 하였고, 또 내 가족이나 친척들이나 선후배들이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크게 다쳤다면 신고하거나 찾아 나서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 후에 광주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되는 바람에 5.18관련 업무가 도청에서 광주광역시로 이관되었고 5.18사태가 점점 민주화 운동으로 변질되고 광주광역시와 5.18관련 단체들이 합세하여 부상자들에 대해선 전혀 이견이 없었고, 사망자들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당시 행불자들 등을 대상으로 숫자 파악에 나섰으나 순전히 어거지로 자기들 입맛대로 부풀린 숫자가 154명으로 공식적으로 최종 발표를 했다. 

나는 거기까지인줄로만 여기고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었는데 2018년 7월 우연히 망월동에 있는 5.18 국립묘지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 까무러칠 뻔 했다. 5.18 유공자 묘기가 무려 824기가 있고 앞으로도 여기에 들어올 유공자가 약 4천5백명이 더 있다는 직원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공자 외 그 가족들까지도 묻히는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아니고 순수하게 5.18 때 다치거나 사망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하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5.18단체들의 수없이 많은 비리들을 훤히 알고 있는 나였지만 이토록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지금 현재 5.18 관련 단체, 부상자, 유가족협회의 회장은 김후식이란 자가 역임하고 있다.

김후식은 80년경 나이가 40세쯤으로 충장로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이발사였는데 5.18때 부상자로 접수가 되었던 자이다. 그 때 처음으로 5.18관련 단체로 5.18관련 부상자 및 유가족협회가 결성되고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 자가 김후식이다. 어떤 경로로 부상자가 된 줄은 모르지만 경상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회장 직을 역임해 오다 십몇 년 전에 유공자 부정 지정 사건으로 회장 직에서 사퇴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 가서 다시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금까지 35년여 간 회장을 역임하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어 5.18 민주화운동 단체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 5.18관련 단체에 관하여

-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저열하고 저속한 자들로만 구성된 단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단체 회장 김후식은 광주전남에서는 가장 거물급 유력인사이고 단체 소속된 임원들도 많지만 이들은 절대로 매스컴이나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력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인식 등도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각종 이권개입 등은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고 따낸다. 예를 들어 충장로 지하상가는 광주에서 최고로 꼽는 알짜배기 사업권인데 거기에 황금알을 낳는 자판기 사업까지 따내고 그 외 광주 전남 이권개입에는 안 끼는 곳이 없을 정도고 5.18회관, 국립아세아문화전당 등 수많은 운영 매체 등에서 어마어마한 이권을 챙기고 정부 지원 자금도 가장 우선적이다.

또 호남 출신 국회의원들이나 유력인사들은 이들에게 삥을 뜯겨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 많은 사람들이 특히 광주 전라도민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광주 전라도민들은 5.18에 대해서 대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둘째, 5.18 관련자들에 대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매우 심한 기피증을 갖고 있다. 5.18 관련자들하고는 접촉을 극히 꺼리고 그들과 연관되는 것을 창피하게 여길 정도다. 일반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5.18 유공자가 되거나 관련 단체 등과 엮이는 것을 극히 꺼려한다. 

셋째, 5.18 관련자들과 일반 시민들은 거의 딴 세상에 존재하는 식이다. 쉽게 말하면 물과 기름 같은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5.18에 관련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들은 거의 무조건 들어주는 식이다. 왜냐 하면 이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고 조금이라도 엮이기 싫어서 이기 때문으로 본다.

* 이해찬과 김경수가 5.18 유공자라는 소문이 있고 이해찬은 답변으로 자기가 신청도 안 했는데 5.18단체에서 그냥 만들어 준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 이해찬의 답변이 맞을 것이다. 5.18단체에서는 이해찬뿐만 아니라 많은 국회의원들이나 유력인사들에게도 방패막으로 5.18 유공자증을 만들어 준 것으로 충분히 심증이 간다.

* 모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5.18사태 주동자 및 시민군의 실체와 시민군 본부, 시민군 본대일 것이다.

* 저보다 몇 살 아래인 사람이 20여 년 전부터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면서 지금까지 매우 친하게 지내오는 사람을 소개한다.

- 5.18 당시 순수하게 부부가 자영업을 해오고 있었고, 5.21일 이사준비로 시내로 볼 일을 보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으나 모든 교통수단이 끊긴 상태라 할 수 없이 소위 시민군이 운행하고 있는 트럭을 탔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그랬었다. 트럭을 탓지만 운전수가 가는 대로 가다가 적당한 곳에 이르면 내려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운전수는 자기 맘대로 한없이 화순 쪽으로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이 생전 처음 와보는 화순 어느 산골마을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500여명이 와 있었다고 한다. 먼저 와있는 500여 명도 모두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차에 탔을 때 차 안에는 총, 수류탄, 탄알 등이 수북히 쌓여 있어 일단 호신용으로 총을 들었다고 한다. 마을에 도착하니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마을 이장 가족이 주축이 되어 동네 부인들이 하루 삼시세끼 밥을 계속해주었다고 하고 그곳에서 5월 21일부터 5월 27일까지 도청이 수복되었다는 방송을 듣고 1주일 만에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1주일 동안 하는 일 없이 동네 빈터에서 서로 웅크리고 야영을 하였다고 한다. 식사는 끝날 때까지 동네 부인들이 해주었고, 500여 명 중에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낮설기만 건장한 청장년들이 기관총 등으로 무장을 하고 감시 지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상황이 하도 무서워 누구 하나 말도 못하고 포로수용소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 곳에서 1주일을 감금당한 채로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당시 대학생인 이장 딸이 식사 심부름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 중 한 명이 오발을 하는 바람에 이장 딸이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이장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단지 사람들을 향해 앞으로는 이런 오발 사고가 없도록 총기를 땅을 향해 관리해 주라고만 했다고 한다. 그 때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자기 딸이 죽었는데도 울지도 못하고 항변도 하지 못한 상황이 충분히 심증이 간다. 

지금이라도 그 마을에 가서 확인해보면 당시를 확인할 수 있을 터이고 내 후배도 얼마든지 증언을 해줄 것이다. 당시 화순 주남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었고 후배 말로는 여러 번에 걸쳐서 건장한 시민군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그곳을 빠져나가 주남마을을 통과해서 광주로 진입 하려고 하던 중 주남마을 산 중턱에서 미리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트럭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우선 타이어를 겨냥하고 차를 전복시킨 다음 차에 타고 있던 시민군들을 향해 시민군들이 무차별사격을 하여 죽였다고 한다. 그 사실은 겨우 살아온 사람한테 들었다고 했다. 

그 당시 주남마을 산에서 매복하고 있던 시민군들에 의해 군인들도 죽고 많은 전상자를 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후배가 머무르고 있던 곳이 시민군 본부요, 시민군 본대였고 후배들은 시민군들이 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있는 사람들은 낮선 시민군 감시원들이 데리고 가 죽여버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도 세상이 무법천지고 어디로 나갈 곳도 없고 하니 시민군 감시원들이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처음 5.18사태의 시발이 된 대학생들은 지금까지 나타난 사실들만 봐도 대학생들은 5.18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다.

* 5.18 민주화운동이라 했으나 5.18사태 이전부터 민주화운동을 해온 사람들도 지금까지 나타난 사실들만 봐도 이들 또한 5.18사태와는 관련이 없다.

* 당시 광주 시민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계엄군이나 순수한 일반 시민군들에게 칼로 찔렸거나 죽임을 당했다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 당시에 장갑차를 몰거나 차량 등을 운전하였다는 사람들도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 그 후 5.18이 진압되고 난 후 후배에게도 시민군으로 본대에 있었으니 5.18 유공자로 된다고 신청하라고 했으나 5.18 민주화 투쟁과는 전혀 관련이 없기에 양심상 도저히 유공자로 신청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 후배가 1주일 동안 그곳에 갖혀 있는 동안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고 온 가족들이 후배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 5·18 당시 광주 도청 공무원 정의환(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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