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서 대나무 -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어머니라면 먼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51)이 떠오른다. 혹자는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자랑스러운 여자 중에서도 엄지로 꼽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낡은 고리짝처럼 신선한 맛이 없다. 더구나 과거 군사정권이 충효사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보완할 때 정치적으로 그녀를 이용하면서 신인선(申仁善)의 참모습이 교조적으로 잘못 흐른 것도 사실이다.
크다는 책방의 어린이용 도서코너에 가보면, 출판사마다 특징을 살린 한국위인전 시리즈와 마주친다. 그런데 여기에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여자가 틈틈이 끼는데, 이때 마지막 하나는 어김없이 “신사임당”이 차지한다. 그러나 어른을 독자로 삼은 “신사임당” 단행본은 숫제 찾아볼 수가 없다. 있다면, 여자 여럿이 줄줄이 소개되는 곳에 겨우 한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착한 여자는 효녀-양처-현모의 모델을 따라야한다, 이런 고정관념이 한국남자에게는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래서 사임당은 신명화의 딸, 이원수의 아내, 율곡의 어머니로서 이들 세 남자에 종속되어 존재할 따름이다. 남녀의 세계가 공존한다고 해설되는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가 애매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신사임당은 모나리자의 덫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로서 새겨진 사임당의 초상은 그 아들 율곡이 아홉 번씩이나 장원급제했다는 결과로부터 역으로 추정된 것 같다. 이런 아들의 눈부신 후광 때문에 인선은 오히려 탈(脫) 어머니로서의 개성이 바래졌다. 사임당은 일류 화가였다. 생전의 시와 글씨가 몇 점씩 남겨졌지만, 그녀의 작품은 아무래도 초충도(草蟲圖)로 대표되는 여덟 쪽의 연작 그림이 그중에 으뜸이다.
초충도는 화초를 중심으로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눠진 공간에 벌레나 미물이 배치되어 있다. 새로 나온 5000원짜리 지폐의 뒷면에도 일부 보이지만, 정적인 초와 동적인 충이 서로 어울린 세계를 관찰하며 그린 것이다. 그런데 화면에 등장한 사물들의 상호관계가 약육강식이란 자연법칙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단아한 여인상과 다르다.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도 경탄하고 있지만, 화가 사임당의 기량은 어릴 때부터 특출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당에 말리려 내놓은 그림을 보고 닭이 그려진 벌레를 쪼아 댔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그림에서도 기(氣)가 살아있었음을 의미한다. 기가 뭐지? 이분법(二分法)적인 서양과학에 익숙한 우리는, 심지어 전문가까지도 기를 꼭 찍어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사임당의 실체는 삼강오륜으로 굳어진 화석이 아니라 “기 찬 여자”였다. 뚜껑이 열렸다고 하면 분통을 화산처럼 거침없이 내뱉는 상태를 이르지만, 사임당은 기를 이와 같이 뿜어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기의 샘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마초(macho)적 인식 아래 가정윤리에서 벗어난 여자의 다른 문화적 가치를 무시해 왔던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적 손실로 나타난다.
성리학(性理學)의 세계관에서 이상국가를 꿈꾸던 당대의 선비들은 사임당을 소중화(小中華)의 틀 안에서 포장하고 싶었다. 사임당(師任堂)이란 당호(堂號)가 전설적인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고자 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그래서 그들은 임(任) 자에 자유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놓쳤다. 그러나 사임당은 자유를 스승으로 삼아 시대를 앞서 갔던 개척자였다.
강릉 경포대 옆 오죽헌(烏竹軒)은 사임당이 태어났던 곳이다. 뒤뜰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집에서 자신은 검은 비늘로 번쩍이는 용(玄龍)의 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 검다는 것은 거룩함을 뜻한다. 우리가 정문에 들어선 후 좀 걸어가면 자경문(自警門) 앞 광장에 도착하는데, 어디선지 오는 온몸을 추스르게 하는 기를 받는다.
소도(蘇塗)는 우리민족 전래의 성지(聖地)요, 기를 받는 피난처(sanctuary)였다. 오죽헌은 사임당의 생추어리이다. 언젠가 모계사회가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때 율곡은 사임당의 아들로서 마마보이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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