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성문화 학풍조성과 자원봉사 확산을 위해 사회봉사센터가 실시한 자원봉사활동 동영상, 사진, 수기 공모전은 지난해 12월5일까지 접수를 받아, 사회복지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수상자를 선정했다. 3개 부문에 44개 팀(개인 포함)이 참가했으며, 수기부문 금상 이누리 학생 등 22개 팀(개인 포함)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방학임에도 토익캠프에 참가하고 있는 이누리 학생을 만났다.
[아기들의 웃음에서 피로를 잊었다 “그 순간 나는 진짜 엄마였다”]
봉사를 위해 처음 아기방에 들어갔을 때의 ‘설렘’과 ‘떨림’을 기억한다는 이누리 학생은 "기저귀 갈고, 젖병 물리고, 목욕시키고, 옷 갈아입히는 등의 아기돌보기 활동으로 항상 옷이 땀에 젖고 힘들었지만 아기들의 웃음에서 피로를 잊었다"며 “그 순간 나는 진짜 엄마였다”고 말했다.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우는 아이를 품에 안아서 달래주지 못하고 그냥 침대에 두고, 장난감을 줘 혼자 놀게 할 때”였다며, 돌봐야 하는 아기들은 많은데 봉사자가 적어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항상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 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아기돌보기 봉사활동을 하면서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며 가끔 엄마에게 “나 대충 키웠지?”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경솔했음을 반성한다고 했다.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 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며 항상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으로 생활하는 우리들이 되자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보육원에 있는 모든 아기들에게 부모가 생겼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는 이누리 학생은 입양이 활성화 되어, 새해에는 아기들이 사랑 듬뿍 받으며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윤운성 사회봉사센터장은 “자원봉사활동 공모전을 통해 봉사가 특별활동이 아니라 일반적 활동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4년 동안 엄마가 되다.]
광주의 한 보육원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원래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보육원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보육원에서 봉사를 해야 될지 알아보던 차에, 친구가 인천에서 보육원 봉사를 다닌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친구에게 어떻게 신청해야 되는지 물어봤고, 신청 날짜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전화로 신청을 한 다음에 면접을 봤다. 내가 봉사를 하게 될 보육원은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간단하게 면접을 보고,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아이들의 정서상 최소 1년 이상은 봉사를 해달라는 당부의 말을 마음속으로 깊이 새겼다.
처음 봉사활동을 시작했을 때 어떻게 했는지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많이 긴장도 됐었고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다. 그러나 ‘설렘’ 이라는 감정 하나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보육원은 1세부터 7세까지 맡고 있었는데 내가 봉사를 하게 될 방은 신생아부터 돌전까지의 아이들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너무나도 작은 아이들이 꼬물거리며 있었다. 아이들이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에 안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보육사 선생님들은 아기들을 안는 법부터, 기저귀 가는 법, 옷을 입히는 법, 젖병을 물려주는 방법 등 세세하게 알려주셨다.
봉사활동은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진행 되었다. 나는 아침 시간으로 배정 되었는데 전날에 과제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늦게 잤으면 다음 날 일어나기가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아이들과 나와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렇게 지친 몸으로 일어나서 보육원에 가면, 아이들이 환하게 웃는 걸 보고 피로가 풀리곤 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어느새 입고 있던 옷이 땀으로 적셔져있었다. 그래도 아기들을 안고 있으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아이를 안고 있는 것도 힘겨워했는데 꾸준히 봉사를 하다 보니 두 명을 동시에 안을 수도 있게 되었다.
신생아 방에서는 혼자서 5명의 아기를 돌봐야만 했다. 그런데 아직 목도 못 가누다보니 한 명밖에 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손이 두 개이고 안을 수 있는 아이는 한 명이었는데 안을 수 없는 아이는 4명이나 되었을 때 마음이 아팠다. 가끔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기도 했었는데 아기가 아픈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덧 나는 베테랑이 되어 있었고 같이 봉사하는 분들한테 ‘준비된 엄마’ 라며, 애들을 정말 잘 돌본다고 칭찬도 많이 듣게 되었다.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아이들을 좋아해서 했는데 점점 생각도 많아지고 느끼는 것도 많아지게 되었다. 우는 아기들을 동시에 안지 못할 때나 아플 때 문득 부모님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도 나를 키울 때 이런 마음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치레로 엄마에게 “나 대충 키웠지?” 라고 했었는데 그렇게 말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람 한 명을 돌본다는 것은 절대로 대충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봉사활동을 통해서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우는 아이를 가끔은 울더라도 내버려둬야 할 때였다. 처음에는 이유를 모르고 우는 아이를 계속해서 안고 달래주었는데 선생님들이 나를 종종 막으셨다. 슬쩍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니 계속 그렇게 안아주면 버릇이 들어져서 봉사자들이 가면 선생님한테 안아 달라고 운다는 것. 그러면 선생님들은 제대로 된 업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보육사 선생님들이 하시는 일이 따로 많았기 때문에 봉사자가 없는 시간에 아이들 하나하나를 안고 달래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우는 아이가 있으면 개인 침대에다가 장난감을 주며 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품이 필요한 아이에게 장난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는 침대에서 엉엉 울다가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는 옆에 놓여 진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일정 개월이 채워지고 나서는 다른 방으로 아이들이 간다. 자주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봉사를 갔는데 안 보이는 아이들이 없으면 다른 방으로 가서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는 입양을 가게 되어 안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입양을 가게 되면 참으로 좋은 경우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계속해서 방을 옮겨야 했다. 개월 수가 어릴수록, 그리고 여자아이일 경우 입양 될 확률은 높아진다고 한다.
‘좋은 곳으로 갔어요.’ 라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되었지만 아니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아이들이 좋은 부모님에게로 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보육원 안에서 간혹 내가 이전에 돌봤던 아이들 (하지만 새로운 방으로 갔던)을 볼 수 있었는데 비록 그 아이들은 나를 기억할지 몰라도 잘 자라고 있다는 모습에서 기쁨을 느꼈다.
처음엔 그저 ‘아이들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점점 할수록 나도 모르게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친구들에게도 “너가 보육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 정말 행복해보여.” 라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전에는 돈을 많이 번다거나, 시험을 엄청나게 잘 본다거나 하는 것들만 행복인 줄 알았다.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게 어떤 것인지 몰랐었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작은 행복’ 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한 주간 스트레스로 쌓여있던 일상들이 보육원에서의 3시간으로 다 풀렸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단순히 사회적 미소를 지어보였더라도 나는 그 미소 하나로 치유 되었던 것이다.
집에서 왕복으로 2시간 걸리는 거리였지만 가는 길에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단 생각에 행복했고, 오는 길에는 아이들을 만난 기억으로 행복했다.
제 힘으로 걷지도 못하고 밥도 혼자 못 먹지만 존재만으로 내 삶의 일부에 행복이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다.
아직도 내가 돌봤었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뭉클하다. 그들과 함께 했던 268시간이라는 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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