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속의 왕릉들(2) 정릉 (貞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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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의 왕릉들(2) 정릉 (貞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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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읽는 문화유산 이야기 (7)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의 봉분왕비로서의 부귀영화 보다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배어 있다.
ⓒ 사진/두산동아백과^^^

서울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성북구 정릉동. 흔히 정릉 하면 유원지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이 곳에는 조선 초기 비운의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 잠들어 있다.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탓인지는 몰라도 무덤은 왠지 모를 적막감에 쓸쓸함마저 베어나 있었다. 하다못해 무덤 주변에 세워진 석물들의 모습에서도 쓸쓸함과 허전함은 끝내 감출 길이 없었다. 이렇게 막막감에 휩싸인 무덤가를 거닐다가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세원지우(洗願之雨)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세원지우(洗願之雨) 라는 말을 접해 본 일이 있는가? 세원지우라는 말은 대대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채 한이 맺혔던 것이 풀리게 되자 감격하여 내리던 비를 말한다. 사람으로 치자면 억울함이 풀리게 되어 더없이 감격했을 때 흘리던 눈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원지우라는 말은 바로 이 무덤의 주인인 비운의 주인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원지우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의 한을 맺힌 이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이 주인공은 오늘날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정릉 유원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데,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 세원지우라는 유래를 남긴 주인공 강씨는 그동안 맺혀있었던 한을 홀가분하게 씻어내리고 오늘날 사람들의 왕래가 오고가는 틈속에서 조용히 몸을 누이며 사람들의 움직임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2명의 부인을 두었다. 하나는 고향인 함흥에서 맞이한 본부인 한씨로서 향처가 되는 셈이고 바로 이 강씨는 그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맞아 들인 부인으로 향처라고도 하며 후실이었지만, 태조가 관직생활을 주로 개경에서 하게 되었으므로 사실상 태조의 본부인 역할을 한 것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태조가 새왕조를 세울무렵 한씨는 남편의 왕조창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고, 강씨는 남편을 도와 새왕조 창업게 적잖이 도움을 주었다. 결국 강씨는 향처 한씨의 죽음으로 사실상 조선의 첫 왕비가 된 것이다.

새왕조의 첫 왕비가 된 신덕왕후 강씨는 정치적 야심도 대단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남편이 새왕조를 개창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편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강씨의 욕심은 과욕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곧 자신의 소생을 남편의 뒤를 잇도록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녀의 집념은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태조가 자신의 후계자인 세자를 정하기 위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을 불러모아 의논하고 있었는데, 개국공신들 사이에 후계자 문제로 이야기가 엇갈리고 있을 때 태조와 공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씨는 옆방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제서야 강씨의 뜻을 짐작하고 있던 태조와 신하들은 서둘러 강씨 소생의 왕자 가운데 한 명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다고 한다.(방석)

이렇게해서 강씨는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앉히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곧 한씨 소생의 왕자들의 강한 반감을 불러 일으킨다.특히 태조를 도와 조선조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태종)은 그 누구보다도 심한 거부감을 갖게 되고 결국 이방원과 강씨는 계모와 아들 사이가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정적이 되고 말았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강씨는 그동안 앓고 있던 지병으로 인해 세상을 뜨지만, 그녀의 집념 덕분에 세자의 자리에 오른 방번은 이복형 방원의 칼날에 맞아 무참히 희생되었다. 이로서 이방원은 사실상 조선의 실세가 되었고 강씨와 그 왕자들을 지지했던 세력들은 대거 제거되었다. 강씨가 죽기 무섭게 자신들의 소생이 제거되고 말았으니 구천을 헤매고 있었을 강씨는 또 한번 절규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강씨가 세상을 뜨자 제일 먼저 슬퍼한 사람은 남편 태조였다. 특히 자신의 대업을 이루는 데 뒤에서 뒷받침했던 부인의 죽음이었기에 그 슬픔은 유달리 컸을 것이다. 그러한 태조였기에 능을 조성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도성안 (현재 경운궁 부근 - 현재 정동(貞洞)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때 정릉의 조성으로 생겨났다고 한다)에 그녀의 능을 조성한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명복을 빌기위해 흥천사라는 절까지 세웠다. 그 흥천사에서 신덕왕후의 재를 올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서야 수라를 들 정도로 태조의 상심은 컸다.

태조가 정성들여 치장했던 정릉은 강씨를 증오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훼손되고 만다. 태조가 세상을 뜬 (1408 년) 이듬해인 태종 9년인 1409년, 태종은 도성안에 묘를 쓰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정릉을 지금의 자리(성북구 정릉동 - 당시 지명은 사을한록 골)로 옮겼다. 그러나 그 해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자 정릉에 조성되어 있던 석물들을 뜯어다가 그 복구 재료로 사용하고, 다시 제사를 지내던 정자각 마저 철거하여 사신 접견 장소인 태평관을 보수하는 재목으로 쓰도록 하였다. 게다가 태종은 강씨에 대한 예조차 올리지 못하게 하여 사실상 황폐화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해서 정릉은 그 흔적조차 남지 못하고 그저 주인없는 무덤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이후 선조때 강씨의 후손들이 호소하여 능자리를 찾은 끝에 지금의 자리에 강씨의 묘소를 찾았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복위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명분의리론이 팽배해져 있던 현종때에 이르러 송시열의 상소로 정릉은 복구될 수 있었지만 태조 당시에 치장된 화려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송시열의 상소와 현종의 특명으로 정릉이 복구되던 날,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고 이 비는 신덕왕후의 억울한 한을 씻어주었다 하여 세원지우라는 말이 회자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단촐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는 정릉.. 억울함을 씻어 한을 누그러 뜨렸는 지는 모르지만 조선 초기의 첫 왕비의 능이라는 모습과는 달리 왠지 초라하고 쓸쓸한 것이 퍽 애처로워 보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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