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김덕홍-김명국-북 여교사 증언, 연구결과와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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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김덕홍-김명국-북 여교사 증언, 연구결과와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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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5.18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대중사회에 의식화 하였다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에 참전했다 탈북한 김명국 간접출연

실제로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2006년 국방차관으로 승진한 문제심이라는 사람을 지휘관으로 호송하고 광주작전에 참전했다가 귀환 도중 다리를 부상당한 가명 김명국이 2013.3.15. 채널A에 실드 처리돼 소개 됐다. 그는 그가 기억하는 조원들의 이름과 조직표를 밝혔고, 광주에 온 특수군 중에는 몽둥이 전문가와 정치공작 전문가들도 끼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증언 당시 분당에 살고 있었다.

▲ 2013년 3월 15일 채널A 방송자료 ⓒ뉴스타운
▲ ⓒ뉴스타운
▲ 김명국의 증언을 책으로 펴낸 이주성씨 ⓒ뉴스타운

1997년의 황장엽-김덕홍 증언

2013년 4월 22일의 TV조선 방송, 전 월간조선 편집부장이었던 김용삼씨가 1996년과 1998년에 황장엽과 김덕홍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확인한 내용을 밝혔고, 더 자세한 내용이 2013년 월간조선 4월호에 게재됐다. "5.18은 북한이 배후 조종한 후 계엄군에 뒤집어 씌운 사건이고, 그 작전을 기획한 대남부서 사람들이 5.18 종료 직후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 파티를 했다"는 요지의 증언이었다.

▲ ⓒ뉴스타운
▲ 2013년 4월 22일 TV조선 방송자료 ⓒ뉴스타운

전 함경남도 여고 교사의 증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중에서)

오직 막중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는 북한의 여성 교사로 있으면서 '5.18 공화국 영웅'을 내연남으로 맞이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생활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 한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5.18 역사가 바로 서고, 그 역사가 자유 대한민국을 바로 서게 하는데 기여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에, 나는 밤을 함께 지내면서 내연남으로부터 들었던 광주 5.18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여기에 밝히고자 한다.  

나의 유년기 시절 가장 큰 희망은 교육부문에서 최고의 전당이라고 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과 같은 큰 대학에 가려면 하늘의 별따기라고도 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공부도 우선 잘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집안 배경이다. 학교는 군당 교육부에 나를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생으로 추천하였다. 들떠있던 1986년 8월, 군당 교육부로부터 내려온 통지서에는 읍 중학교의 교장의 아들로 확정지었다고 적혀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에 싸여있을 때 나의 친오빠가 한쪽 다리를 저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와서 군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라고 소개했다. "너 지금까지 '공화국 영웅' 칭호 받은 사람을 직접 본적 없지? 이 사람이 바로 5년 전에 김정일 동지를 직접 만나 뵙고 그분 앞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이야."  

공화국 영웅이라는 훌륭한 분을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우리 집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런 그의 추천으로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기로 되었다. 이는 꿈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 달이 멀다할 정도로 그분한테서 편지가 왔고 나도 답장을 보내주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로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 나가 있던 어느 날, 온다는 기별도 없이 '5.18 공화국 영웅'이 의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가 생활하는 숙소에 문득 나타났다. 출장을 왔다가 들렸다고 했다. 18살 때 본 이후 6년 만에 보는 사람이지만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도와주신 분이라 너무도 반가웠다. 이것이 내가 15년 연상인 안창식이라는 '5.18 공화국 영웅'의 내연녀가 된 사연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함경남도 영광군의 시골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2년 뒤에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나의 결혼은 영원히 물건너 갔고 남편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북한에서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목표를 꿈꾸었던 내 인생의 흔적이고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그의 의족이 매달린 다리마저 잘라내야 했다. 그때서야 그는 그가 어째서 다리를 다쳤는지에 대한 속 이야기를 털어놨다.  

1968년 1월 21일 남조선 청와대 습격사건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사건의 내용이 남조선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테러로 국제사회에 여론이 확산되자 북한은 황해북도 연산주둔 124군부대를 해산하고 1970대 초에 북한 함경남도 덕성과 량강도 후치령 인근에다가 해산된 기존의 124부대의 기능을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비밀부대를 극비리에 조직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는 평안북도 정주, 동림 일대에 남조선 종심(남한의 후방)에 대한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정예특수부대인 일명 자살부대라고도 불리던 '당원사단' 이라는 최정예부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인 1966년 가을, 조국을 위해 아들을 바친다는 부모의 서약과 함께 조국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 자살부대나 다름없는 국가보위부소속 첩보훈련소에 모집되어 갔다. 그가 간곳은 서해바닷가의 어느 이름 없는 섬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백여 명의 같은 또래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당사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은폐되어 있는 생체실험장도 있다고 한다. 정신훈련교육은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부모와 처자식도 죽여야 하고 친구도 무조건 죽여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생천 처음 보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와서 미국말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과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들을 어린 훈련병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 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당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대원들에게 살인적인 훈련을 가르쳤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부대가 비상대기상태에 돌입해 있던 때인 1979년 11월 중순 쯤에 그가 책임지고 있는 타격대에 폭풍명령이 떨어졌다. 준 전시상태에서 소부대기능을 수행하는 타격대를 대상으로 제한적인 폭풍명령이 떨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대원들에게 비상소집명령을 내리고 지휘부에 달려가 보니 부대지휘관이 아닌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전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지휘관이 긴급명령을 하달하기 위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부대 지휘관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부대의 전투준비상태와 각기 타격대들의 기동성 및 전투임무 수행능력을 점검할 목적으로 임의의 소부대를 예고 없이 지명하여 전투력상태를 판정한다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타격대의 작전구역은 신포시 앞바다에 있는 마양도라는 섬이며 그날 밤중으로 현지로 이동하여 대기상태에 있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상급지휘관의 명령대로 즉시 타격대를 출발시켜 그날 새벽녘에 신포시 마양도에 전개되어 있는 해군기지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30분정도의 시간이 경과될 무렵 사복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 시각부터 타격대는 두 개조로 나뉘어 작전에 임한다는 지시를 전달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름을 호출했고, 호출된 사람들은 도로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 그들보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조는 대기상태에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 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침투훈련을 하면서 남조선 육지는 밟아보지 못했어도 해상으로는 남조선 깊숙이 몇 번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실전을 위한 훈련정도로만 생각했고 공해상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북한으로 올라갈 것으로 그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들의 생각이 아주 크게 빗나 갔다. 안내요원이 들고 온 지휘부의 명령서에는 소부대인원들을 지휘하여 남조선의 후방에 침투해서 현지에서 차후명령을 전달받고 수행하라는 임무였다. 

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이고 육지에 상륙하여 도착 장소까지의 안내과정은 별도의 인원들이 맡아서 수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어떤 임무가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로써는 아무도 모르고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그들이 남쪽으로 급히 파견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보태면 북한 정권은 남조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고 전두환 군부가 등장하면서 조성되고 있던 복잡한 정세와 정치적 혼란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후를 조종하여 국가 전복을 시도하려는 구체적인 작전을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다.  

오늘에 와서는 그 질과 범위가 아주 대담해지고 폭이 넓게 전개되고 있지만 북한이 남조선에서 가장 허점으로 노렸던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체제에 민주정치라는 한 가지 '약점' 이었다. 한국의 정치체제가 다양성에 대한 보장과 존중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북한쪽이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영락없는 틈새였고 합법적으로 친북세력을 양산하고 또한 그들을 이용하여 친북정권을 출연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에돌리지 않고 말하면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겼던 5.18 광주사건의 서막도 북한의 이와 같이 치밀한 대남전략의 차원에서 서서히 준비되고 무르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 요원들(이 7명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 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 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 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 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 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 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어쨌든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적후에서 만난 그들 모두에게 전라도 지역에서의 새로운 무장폭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공동의 과제가 동일하게 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어떤 어려운 일이 제기된다 해도 목숨을 내놓을 지언 정 반드시 수행해야 될 당과 조국 앞에 걸머진 본인들의 임무였다. 그들이 남조선 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 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 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 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주: 김대중은 혁명정부의 예비내각 명단을 작성해놓고 1980.5.22. 전국폭동을 일으키겠다 선언했다가 5월 17일 자정에 일당과 함께 전격 체포되었음).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 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 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본주의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돼서 북한 사람들의 정신상태 이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북한체제를 위해서 주저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지 한 순간의 머리판단으로써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가없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났던 사북탄광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탄력을 받지 못하고 부마사태처럼 속수무책으로 조기에 소멸되자 북한 정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은 남조선에서 전국형태의 대규모항쟁이라는 사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실패한 부분들을 무조건 봉창하려고 접어들었다. 결국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는 광주였고 광주폭동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치밀하게 조작하여 부마사태나 사북탄광사태 처럼 두 번 다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내부를 조작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미봉책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한 남조선청년학생들과 특히 전라도 지역의 민심이 좋지 않았던 만큼 이런 분위기를 광주사건에 적절히 배합하여 지역감정에 이용하고 항쟁의 질을 자극적인 방향으로 극대화시켜 나가게 되면 예상외로 생각지 못했던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북한은 타산하였다. 특히 1980년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 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주: 실제로 5월 4일부터 학생시위가 본격적으로 발동하였음).  

당사자들 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 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 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 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일어나서 공권력이 흔들리게 되면 인민군대의 남침 도발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고 하니 소름이 끼칠 만도 한 일이었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났던 5.18 광주폭동에 대한 계획은 이런 북한의 끈질긴 도발과 조작의 어두운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준비상태가 마무리되어 갔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 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광주작전에 참가하기 위해서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요원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필요가 없는 철저한 보안 사안이기 때문에 해당 당사자들 외에는 어느 부대에서 몇 명이 내려왔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안창식을 비롯한 일행들도 광주사건이 터지기 대략 1~2개월 전에 배후교란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들에서 적지 않은 인원들이 광주작전을 위해서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같은 부대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온 인원이 몇 명이고 그들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등 구체적인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소부대 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광주를 포함해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극열해지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북한 지휘부는 남조선에 파견된 전투원들에게 일제히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 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광주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때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들에게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전면에 섣불리 나서서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라는 지휘부의 엄명이 떨어져 있었고 그들은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행동이 의심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들 스스로가 철저히 경계하였다

일면식이 전혀 없는 다른 부대에서 파견된 북한전투요원들이 광주시내의 사방에서 각기 자기들이 맡은 임무에 따라 복잡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은 서로의 행동에서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고 우연히 스칠 때마다 간단한 눈인사 정도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남조선 진압군과 봉기군들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교전이 치열하던 어느 날 뜻밖의 일 때문에 몇 명의 일행이 노출될 뻔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남조선의 광주 시내가 치안부재상태로 방치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잔인하게 난도질 당한 끔찍한 시체들(시민들을 자극할 목적으로 특별히 여성들을 골라서 조작한 시체가 많았다고 하였음)이 광주시내의 골목들에서 하룻밤을 자고나면 줄줄이 쏟아져 나오자 정보기관들 뿐만이 아니라 언론기관과 심지어 봉기군들까지도 그런 작품을 만들어내는 주인공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감시인원들을 동원시켰다. 

지금에 와서 소위 민주화 단체들 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광주에서 일어났던 모든 살인행위를 대한민국국군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들과 일명 가공된 "시체작품"들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고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 상황이 다급하지만 동지들이 나설 수 없는 형편이어서 망설이는 와중에 감옥습격작전에 같이 참가한 남조선의 봉기군들이 중상을 입은 북한전투요원을 들것에 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북한요원들 중에는 눈먼 총알에 맞거나 서로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다친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자기들이 계엄군의 총에 맞았는지 아니면 반대편에서 움직이는 같은 전우들의 총에 맞았는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현지의 상황이 그만큼 매우 무질서하고 혼잡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감옥소에 대한 습격이 봉기군의 실패 쪽으로 기울어지자 안창식의 일행들은 즉시 현장을 탈출하여 중상을 당한 대원이 있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많은 부상자와 시체들로 아수라장인 병원 한쪽에 부상당한 대원이(그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하였음) 아무 기척도 없이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런데 참 그 장소에서 안창식과 조원들을 놀라게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부상당한 대원이 누워있는 침대 앞에서 30대 중반의 한 남조선의 여자가 카메라를 들고서 그의 모습을 방향을 바꿔가면서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창식과 그의 일행들은 뜻밖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대원의 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한발 떨어진 거리를 둔 채 그 여자의 행동을 긴장한 눈길로 주시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당사자로 말하면 남조선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고 굳이 신분을 밝히자면 광주작전을 위해서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사람인데 그런 사람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의 정체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시민군과 진압군 사이의 유혈적인 교전으로 워낙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가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체를 자기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가끔씩 생기는 일이었지만 그 여자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사람을 찾거나 확인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여자도 이쪽을 의식했는지 불시에 돌아보다가 공작원들과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무장을 하고 서있는 안창식의 일행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표정은 굳어져 있었고 눈가에서는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뜻한 당황한 기색이 확실하게 엿보이고 있었다. 안창식의 일행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대충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였다.  

바로 그때 담당의사가 하얀 백포를 들고 나타나서 침대위에 누워있는 대원의 시신을 조용히 덮어주었다. 그때야 비로써 대원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순간 그들의 신경은 죽은 사람보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여자한테 더 집중되어 있었다고 했다. 침투요원들의 눈길을 피해서 의사와 조용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여자는 이내 그 자리에서 떠났다. 여자가 자리를 뜨자마자 모르는척하고 의사한테 접근하여 방금 사라진 그 여자가 죽은 사람의 가족이냐고 물으니 죽은 사람의 가족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시신이 본인의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는 가고 다시 물으니까 그 여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자기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지만 시신을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다치지 못하게 보관하되 그날 중으로 자기가 다시 와서 처리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자의 행동이나 말투에서 직업인과 같은 절제되고 규칙적인 냄새가 나는 것으로 봐서는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 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순간을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날수도 있는 매우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책임자인 안창식은 육감적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안창식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 갔고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안창식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는 죽기 전에 통곡을 하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사정하면서 자기는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고 광주시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무장폭동을 주도하는 배후세력을 알아낼 데 대한 임무를 받았다고 자기의 정체를 실토하였다. 북한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따지니까 무기고를 탈취할 때 자기도 같이 갔었으며, 그곳에서 움직이는 행동을 보면서 그때부터 의심하고 따라 붙었다고 자백하였다. 여자는 마지막까지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사정했지만 사정은 그 여자의 것이고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의 적후활동 규정에는 정체를 아는 사람을 살려두라는 항목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철없는 어린애나 노인에 이르기까지 북한군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 이유 없이 무조건 죽여야 되는 것이 북한첩보요원들의 철칙이고 엄격한 준수사항이라는 것을 그 여자는 자신이 그들에 의해서 시신의 정체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살해된 뒤에야 늦게나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3명의 인원이 광주사건 당시의 교전 중에서 사망했는지 아니면 남조선 땅에 살아남아서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본인이 부대에서 제대될 때까지 상부로부터 들은 적이 없고 파악한 바도 전혀 없다고 했다. 광주에 파견되어 내려왔다가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북한정권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배려되지 않았고 국기훈장 1급만 가족들에게 수여하였다고 한다.  

김대중을 수괴로 하는 친북좌파세력들이 5.18 광주사건의 피비린내는 평화적인 민주시위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무차별적인 탄압에 의해서 비롯된 일이라고 교묘하게 가공해서 선전하고 있지만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나름대로 한수 더 떠서 남한 사회를 양분화하고 남남갈등을 조성하는데서 성공한 대표적인 '작품' 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남조선의 광주사태를 기념하기 위하여 같은 날짜인 5월 18일에 어느 공장을 현지지도 하면서 북한의 철도부문에서 '5.18 무사고정시견인운동'이 나왔고 1만 톤 대형프레스의 이름에 '5.18 청년호', 제철소의 이름에 '5.18 청년제철소', 학생들이 파철을 모아 군수공장으로 보내서 만든 탱크의 이름에 '5.18 전진호'라고 이름을 붙이는 등 북한은 전당과 전 국가, 전 국민적으로 5.18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대중사회에 의식화 하였다. 이처럼 북한의 대남전략은 체제의 합법적인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조직되고 한국 사회에 다량의 친북좌파세력들을 양산해낼 정도로 그 범위가 질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 사진은 북한의 1만톤짜리 프레스, 이 장비는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 제작에 사용된다. 5.18 청년호 제1호 및 제2호의 사진이다. ⓒ뉴스타운
▲ 사진은 북한 기차역 플랫홈에 쓰인 천리마 운동 '5.18 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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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보수 2015-04-07 18:53:59
여교사의 증언? 자기 내연남이 잠자리에서 저런 내용을 주절주절 디테일 하게 말했다는 걸 믿는 게 더 이상하다. 저 증언이 대체 얼마나 공신력이 있단 말인가? 팩트만 놓고 보면 어떤 유부남이 불륜을 하는 와중에 한 이야기라는 건데 이런식이면 아무나 기사를 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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