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김익렬 유고의 진위 가리기
제31장 김익렬 유고의 진위 가리기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2.1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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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좌익세력과 노무현정부의 역사왜곡

여기에서 눈이 확 트인다. 4·28 이라는 날짜에 대한 남한의 기록은 없다. 북한의 억지에 발라 맞추기 위해 그냥 가공해낸 날짜다. 김익렬은 1988년 12월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고라 하는 것은 제민일보의 양조훈 기자가 1989년 8월초에 유족을 만나 6시간 동안 설득하여 가져 왔다는 200자 원고지 346쪽의 가벼운 원고지다. 이 원고지는 지금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의로운 사람’ 코너에 만년필과 함께 보관돼 있다.

그가 죽기 직전에 했다는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이 유언은 차라리 코미디다. 그가 임종할 당시는 물태우라 불리던 노태우 정권으로, 민주화가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얼마든지 그의 유고가 자유롭게 빛을 볼 수 있었던 자유방임의 시대였다. 이런 때에 그가 겨우 346장의 원고지를 세상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그것은 시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를 잘 알고 있는 군의 수많은 장군들로부터 야유와 멸시를 받을까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2011년 2월 24일자 제민일보에 의하면 그는 “1969년에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예편을 했고, 4·3 기록들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데 공분을 느껴 1970년대 초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죽기 전까지 그가 쓴 분량은 겨우 200자 원고지 346장 이며, 이는 별도의 단행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1994년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편집한 “4·3은 말한다” 제2권의 273~357(84쪽)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20년 가까이 ‘회고록’으로 썼다는 분량이 겨우 이뿐인 것이다.

제민일보 특별취재반은 부록의 첫 머리에 “유고를 실으며”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썼다.

(1) 김익렬 장군 만큼 4·3 진상의 핵심에 있었던 체험자도 드물 것이다.

(2) 김장군은 미군정으로부터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받자 ‘선선무-후토벌’ 원칙을 세워 생명을 무릅쓰고 게릴라 총책 김달삼과 담판, 평화를 추구했다. 미군정으로부터의 집요한 초토화 작전 감행 지시를 거부하다 끝내는 딘 장군에 의해 해임됐다.

(3) 죽기 전 김장군은 가족들에게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유언을 남겼다.

(4) 이 유고는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 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사료가 된다.

제민일보의 주장대로 과연 4·3을 겨우 1개월 겪고 파면당한 왕대포 김익렬을 최고 수준의 핵심 체험자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과연 이 유고라는 물건이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 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사료” 인가? 김익렬도 대포 이지만 제민일보도 그에 못지않은 대포다. 제민일보의 보도대로라면 김익렬은 1948년 4·3에서부터 1988년 사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오직 미군정과 경찰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말이 된다. 이런 김익렬을 놓고, 좌익들은 지고지상의 박애주의자로 각색했고, 김익렬의 유고만이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 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사료’라며 합창한다.

1991년에 나온 북한의 논문, 1994년에 나온 ‘4·3은 말한다’, 2002년에 나온 ‘현대사 산책’ 그리고 2003년에 나온 정부보고서는 모두 김익렬 유고를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위 모든 책들이 주장하는 4·28 이라는 날짜는 김익렬 유고에 없다.

1991년에 북한의 박설영은 이렇게 김익렬을 이용하고 있다.

미제는 제주도인민항쟁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벌리기 위하여 교활하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국방경비대 전 9연대장 김익렬은 자기의 유고 ‘4·3의 진실’에서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었다.

“나는 이 무렵 또 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며 제주읍내에 있는 미군 CIC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와있다고 지시했다. 지시한 시간에 가보았더니 군정장관 딘의 정치고문이라는 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국제정세와 남조선의 장래문제 등을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 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립장이 난처해지고 남조선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나는 군인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료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노’라고 대답했다. 내가 초토작전을 감행하여 임무를 완료한 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남조선에서 살기 어렵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미국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을 다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 생활을 소개하는 각종 잡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5만 딸라를 주겠다고 줬다가 또 10만 딸라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나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10만 딸라를 챙기고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것이었다.”(사회와 사상 1990년 1월호 388페이지)

미군정이 김익렬을 불러 초토화 작전을 펴면 미국으로 보내 잘살게 해주겠다고 꼬셨다는 것이다. 남한 좌파들이 쓰는 북의 대남공작 역사는 북한이 지휘한다는 것이 필자의 관찰이요 소신이다.

김익렬 유고를 활용하는 방법 역시 북한이 지휘했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김익렬과 김달삼은 일본 복지산 예비사관학교 동기생으로 둘 다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김익렬은 연대장에서 해임된 지 만 3개월 만인 8월 6일부터 3일 동안 부산 국제신문에 “동족의 피로물들인 제주 참전기”(원고지 72매)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다. 여기에서는 회담 날짜가 4월 30일 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988년에 나온 유고에는 4월 27일로 암시돼 있다. 기고에서는 협상이 결렬됐다고 썼고, 유고에서는 협상이 성공했다고 썼다. 기고에서는 “4·3은 좌익세력의 폭동”이라 했고 유고에서는 “압정에 항거한 순수한 민중폭동, 무장공산화 폭동”이라 했다. 기고에서는 집필 이유를 “김달삼이 신출귀몰 지휘를 잘한다는 등의 선전선동을 차단하기 위해서”라 했고, 유고에서는 “4·3을 여·순반란사건과 동일선상에 놓는데 분개했기 때문”이라 했다. 김익렬은 거짓말쟁이이고, 4.28은 없었던 것이다.

북한 논문에 나타난 김익렬

북한 논문에 나타난 김익렬은 완전한 좌익이었다. 김익렬은 연대내의 남로당 세포들에 완전 장악되었고, 인민유격대 앞에 완전히 무장해제하고 협력할 것에 합의 했으며, 그가 지휘하는 9연대는 유격대에 인력과 장비를 보충해주는 인민군 보충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더우기 5·10 망국 단선을 며칠 앞두고 인민들과 유격대의 반항투쟁이 보다 발전하여가는 정세 속에서 9연대장은 연대 내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미봉책의 하나로서 유격대와 경찰대와의 3자회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경찰대에 “동족살륙적인 범죄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권유해 나섰다. 그러나 미군과 괴뢰두목이 회담을 반대하여 결국 파탄되게 되었다.

그러자 9연대장은 유격대 측에 양자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무장대 대표 김달삼과 9연대장 사이에 양자회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회담에서 9연대장은 다음과 같은 유격대 측의 요구조건에 응하였다.

첫째, 단선단정반대 둘째, 경찰 완전무장해제와 토벌대 즉시 철수 셋째, 반동 테러 단체 즉시 해산과 서청단 즉시 철거 넷째, 피검자 즉시 석방과 비법적인 검거, 투옥, 학살 즉시 중지 등. 이 인민의 요구는 미제와 리승만 역도의 방해 책동으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경찰대와 국방경비대 호상간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그들 사이는 무력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국방경비대의 일부 애국적 병사들은 그 후에도 계속 반미 애국투쟁에 합류하였다. 9련대 문상길 중대는 유격대와의 련계를 긴밀히 취해왔다. 4월 27일 약 100여명의 애국병사들은 중대장의 지휘 밑에 대촌병사의 군기고를 헤쳐 수많은 무기와 군수품으로 장비하고 대정, 보성, 안덕, 중문, 서호, 신효, 법환 등지의 토벌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그들은 계속하여 서귀 ‘토벌군’에 타격을 가한 다음 적들의 아성인 제주성을 포위공격하고 단번에 온 섬을 해방시키려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사변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완전무장한 채 근거지로 넘어와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애국적 병사들이 이러한 의거는 다른 병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탈주, 리탈, 의거, 입산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애국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그 결과 무장대의 전투력이 더 한층 강화되었다.

남북련석회의 결정과 호소문에 적극 호응한 제주도인민들은 거기에서 제시된 숭고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하여,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투쟁에 과감히 돌입하였다. 선거 날을 며칠 앞두고 약5만 명의 제주도 인민들은 한나산에 올라가 집단적으로 투표참가를 거부하였다. 단독선거가 감행되는 5월 10일 새벽에 제주도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칼과 몽둥이, 휘발유병, 낫과 망치를 들고 원쑤들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봉기한 군중은 제주읍의 투표장으로 되었던 관청과 세무서, 신한공사 출장소 등을 습격 파괴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단선 결사반대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농민들은 적 ‘토벌대’의 준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도처에서 교량과 통신선을 파괴하고 중요 도로에는 바위 돌을 쌓아놓거나 웅뎅이를 파서 적들의 기동을 차단하였다.

“5월 10일 오전 9시 조천면에서 봉화투쟁이 벌어지고 군중들의 함성 시위가 일어났다. 조천-함덕 간 도로를 위시하여 각지 도로는 시위 군중에 의하여 차단되었다. 함덕에서는 9일 밤부터 밤을 새워 봉화가 올랐는데 이것을 신호로 전도민이 봉기하였다.”(로동신문 1948.5.12)

무장 유격대 상황일지에도 4·28은 없었다

유격대 ‘극비’ 문서(한라산은 알고 있다)를 보면 4·28 평화협상 이있었다는 기간은 무장유격대의 제3차 작전기간(4. 20~5·10)이었고, 이 기간에는 조직을 정비-확대하고, 엄호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부락 주둔을 개시하고, 반동 숙청에 주력했다. 좌익들의 주장대로 4월 28일의 평화협상이 합의 되었다면 무장유격대는 아래와 같은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격대가 쓴 상황일지에는 4·28 평화협상이 없었다. 아래는 공비가 쓴 상황일지의 일부다.

제주읍에서 인민유격대가 저지른 만행

4월 27일에는 리구장 집에서 경관이 식사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 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개(경관)은 도주해 버리고 반동 구장 1명을 잡아다가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노형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22명과 아부대 20명이 약 6시간 동안 접전한 후 이를 격퇴시켰다. 경관(개) 3명이 부상 당했고, 경관 모자 1개, 문서 다수, 카빈 탄창 2개, 카빈 탄환 9발, 백미 1두(斗)를 노획했다.

5월 1일에는 경관 7명, 반동 2명이 화북리 3구에 침입한 상태에서 아부대원 20명이 포위하고 도주하는 경관들을 추격했지만 반동 1명만 숙청했다.

5월 3일~7일까지는 동, 서 각 지구에 아 부대 각각 1대대씩 주둔하면서 1개 대대는 본부에서 근무했다. 노형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을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반동 3명을 숙청하고, 적 기동부 약 30명과 20분간 접전 후 적의 다른 부대에 포위당해서 퇴각했다. 상호간 희생은 없었다. 월평리에서 5월 4일 소각하다가 남은 경관집을 완전 소각했다. 5월 6일에는 서 대대가 산으로 가던 도중 적 기동대 약 30명과 조우하여 약 8시간 동안 접전 후 이를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경관 2명이 즉사 했고, 우리 대원도 2명이 희생됐다. 7일에는 화북리의 반동분자 4명, 삼양리 2구의 반동분자 2명, 삼양리 3구의 반동분자 2명, 도련리 1구의 반동분자 2명 계 15명의 반동분자를 숙청했다. 죽성리에서 반동분자 3명을 숙청했다.

5월 8일에는 삼양리로부터 화북에 이르기 까지의 전선을 완전 절단했다. 아침에는 죽성의 반동 거두의 가옥 4호를 소각하고, 반동분자 11명을 숙청하고 반동의 집 2호를 소각하고, 반동의 가족 2명을 숙청했다. 아라리 1구의 반동 가옥 2호를 소각하고, 반동 가족 2명을 숙청했다.

5월 10일에는 도두리의 반동 4명을 숙청했다. 읍사무소(투표장소)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투표를 방해했다.

대정면에서 인민유격대가 저지른 만행

4월 27일에는 동일리의 반동 거두 1명을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아 부대 8명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반동 직원 1명을 숙청하고 1명에 부상을 입혔다.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못해 동무 직원 1명이 희생당했다.

4월 30일에는 모슬포지서를 습격했다. 아 부대 15명을 후면으로 배치하고 전면으로는 국방경비대의 보초(동무)를 배치하고, 측면으로는 여관 2층에 특무대를 2명 배치, 특무대원이 지서를 향하여 황린탄을 투척하고 그 폭발음을 신호로 일제 포위 습격하기로 작전했으나 황린탄 불발로 인하여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5월 1일에는 신평리와 영락리에서 각각 반동 1명씩 숙청했다.

5월 4일에는 무릉지서를 습격했다. 적은 개(경관) 12명이고, 아 부대는 30명. 약 20분 접전하였으나 지형상 불리하여 퇴각했고, 동무 1명이 희생됐다.

5월 5일에는 보성리의 반동 1명, 영락리의 반동 고술생(高戌生) 외 가족 2명을 숙청하고, 그 가옥을 소각했다.

안덕면에서는 4월 하순에는 동광리 반동 1명을 숙청했다.

위 인민유격대가 쓴 상황일지만 보더라도 그들은 4월 28일을 전후하여 줄곧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4·28 평화협상이 아예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만일 4·28 평화협상이 있었는데도 유격대가 이런 공격을 감행했다면 좌익들은 유격대를 평화협정 파괴자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4월 28일에 김달삼과 김익렬 사이에 평화협상이 있었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인 만큼 김달삼 측이 작성한 유격대 상황일지에 반드시 명기되어 있어야 했다. 그 외 4·3 진상보고서, 미군보고서, 경찰보고서들을 종합해 보면 4월 27일부터 5월 3일까지 매일 무장유격대의 공격과 파괴활동이 있었고, 토벌대의 반격이 있었다. 이 기간에 무장유격대에는 평화가 전혀 없었다.

9연대는 김달삼의 보급 및 보충대

인민유격대 상황일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1) 관계 시작 경위

1947년 3·1 투쟁 직후 때마침 제주도에 국경(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어 제1차 모병이 있었다. 이에 대정 출신 4동무(고승옥, 문덕오, 정두만, 류경대)를 프락치로 입대시켰다. 그 후 5월에 내도(來島)한 중앙 올구(조직지도자, organizer) 이명장(李明章) 동무에게 이것을 보고하여 지도 문제와 활동 방침을 전남도에 가서 지시하여 주도록 요청한 바 있었으나 그 후 아무런 지시도 없었고 그 후로도 내도(來島)한 올구를 통해서 재삼재사 프락치 지도에 관한 시급한 지시를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도당부(島黨部)에서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어 독자적으로 선(線)을 확보하였으나 위 프락치 4명 중 정두만 동무는 탈출하여 일본으로 도피했고, 류경대는 군기대로 전근한 이래 반동의 기색을 띄었다.

(2) 4·3 투쟁과 국경과의 관계

3.1 투쟁 직후에 내도한 도(道) 올구 이(李)동무가 전남도로 복귀할 때 국경(國警) 문제에 대한 시급한 대책을 요청하였고, 이(李)동무는 3월 중순에 다시 제주도로 와서 무장 반격에 관한 지시를 했다. 또한 국경 프락치는 제주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으며 이번의 무장 반격에 이것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야 된다고 언명하였다.

이 지도를 중심으로 4·3 (사건)투쟁의 전술을 세우는데 있어서 감찰청(監察廳)과 1구서(1區署) 습격에 국경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고 나머지 각 지서는 유격대에서 담당하기로 양면작전을 세워 즉시 프락치에게 연락을 하고 동원 가능 수를 문의한 바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 하였다.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을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동시 만일 경비대가 동원 된다면 현재 9연대에는 차(車)가 없으니 5대 정도만 돌려주면 좋고 만약 불가능하면 도보로라도 습격하겠다는 보고를 해왔다. 이 보고를 중심으로 즉시 4·3 투쟁에 총궐기하여 감찰청(監察廳)과 1구서(1區署)를 습격하라는 지령과 아울러 자동차 5대를 보냈다.

그런데 이외에도 4·3 당일에 국경이 동원되지 않아, 이상한 일로 생각하고 있던 바 4월 5일, 국경 공작원(島常委靑責 동무)의 보고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진상이 판명되었다. 파견원이 최후지시를 가지고 국경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기에 횡적으로 문상길(文常吉) 소위를 만났다. 파악해 보니, 국경에는 2중 세포가 있었다. 하나는 문상길 소위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직속의 정통적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고승옥(高升玉)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 조직이었다.

4·3 투쟁 직전, 고승옥 하사관이 문상길 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투쟁하기를 권유했던 바 문 소위는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도(島) 파견 국경 공작원은 깜짝 놀라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재사 요청 하였으나 중앙지시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결국 4·3 투쟁 시, 국경에 의한 거점(감사청 및 1구서) 분쇄는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올구를 파견하여 문(文)소위와 정상적인 정보 교환을 하여 오던 바 4월 중순에 이르러 돌연히 부산 제5연대의 1개 대대가 내도(來島)하여 우리의 산속 부대를 포위 공격하게 되었음으로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된다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이에 군책(軍責)이 직접 나섰다. 군책(軍責)과 문(文)소위가 만난 결과 국경의 세포는 중앙 직속이므로 도당(島黨})의 지시에 복종할 수 없으나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밀접한 정보 교환, 최대한의 무기 공급, 인민군의 원조부대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탈출병을 유도하고, 교양자료를 배포하고 최후단계에서는 총궐기하여 인민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또 9연대 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중이니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에 의한 산(山)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전후 2회에 걸쳐 군책(軍責)때 김익렬 연대장과 면담했다. 구국항쟁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 특히 인민과 국경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 등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아 김(金)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제1차 회담에는 5연대 대대장 오일균(吳一均)도 참가하여 열성적으로 사건 수습에 노력했다.

그 후 5월 7일에 내도(來島)한 중앙 올구는 국경 프락치에 대한 지도는 도당(島黨})에서 할 수 있다고 언명 하였기에 국경과의 관계는 복잡하여지고 투쟁에 결정적인 약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후 5·10 투쟁까지는 국경으로부터 아무런 공격도 없어 우리의 활동에는 크나큰 이익을 가져왔다.

5월 10일, 제주읍에서 도당(島黨) 대표로써 군책(軍責), 조책(組責) 2명과 국경에서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9연대 정보관 이(李) 소위 등 3명, 계 5명이 회담하여 1)국경 프락치에 대한 지도 문제 2) 제주도 투쟁에 있어서의 국경이 취할 바 태도 3)정보교환과 무기 공급 등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한 결과 다음의 결론에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① 국경 지도 문제에 있어서 일방에서는 도당(島黨)에서 지도할 수 있다고 하며 일방에서는 중앙직속이라고 함으로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 하다. 그러므로 도당(島黨)에서 박아 놓은 프락치만은 도당(島黨)에서 지도하되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각각 소속 당부의 방침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② 제주도 치안에 대하여 미군정과 통위부(統衛部)에서는 전면적 포위 토벌 작전을 지시하고 있으나 이것이 실행되면 결국 제주도 투쟁은 실패에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국경에게서는 포위 토벌 작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보타지 전술을 쓰고, 국경의 호응투쟁에 관해서는 중앙에 건의한다. 특히 대내(隊內) 반동의 거두 박진경(朴珍景)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최대의 힘을 다하여 상호간의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그리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탈출병을 적극 추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3) 국경으로부터 우리에 대한 원조 경위(탈출병을 중심으로)

① 3월 25일 경 한림면 협재리에 와 있던 해경(海警) 중에서 동무 1명이 99식 소총 5정을 가지고 탈출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그 후 4·3 투쟁 후에 기관장으로부터 조명탄통 1정과 탄환 7발을 보내왔다.

② 4월 중순, 문(文)소위로부터 99식 소총 4정,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카빙 탄환 1,600발,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카빙 탄환 15발을 각각 공급받았다.

③ 5월 중순 5연대 통신과 동무로부터 신호탄 5발을 공급받았다.

④ 5월 17일 경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M1총 2정, 탄환 1,443발, 카빙총 2정 및 탄환 800발을 공급받았다.

⑤ 5월 20일 문상길 소위 지시에 의하여 9연대 병졸 최(崔) 상사 이하 43명이 각각 99식 소총 1정씩을 휴대하고 탄환 14,000발을 트럭에 실어 탈출하였다. 탈출도중 대정지서를 습격하여 경관 4명, 급사 1명을 즉사시키고 지서장에게 부상을 안겨준 후 서귀포를 경유하여 산으로 가려 했으나 그 연락이 안 되어 결국 22명이 붙잡혔다. 다수의 탄환을 분실 혹은 압수당하고 겨우 4·5일 후에야 나머지 21명과 아 부대 사이에 연락이 이루어졌다. 이때에는 99식 소총 21정과 99식 탄환 2,100발만 남아 있었다. 연락이 안 된 원인은 문상길 소위가 우리에게 보낸 연락 방법과 탈출병들이 연락한 연락방법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든 것에 기인했다.

⑥ 5월 21일 대정면 서림의 수도(水道) 보초(步哨) 2명이 99식 소총 3정을 가지고 탈출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⑦ 5월 말일, 애월면에 주둔하는 5연대 병졸 4명이 각각 M1총 1정씩 가지고 탈출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⑧ 같은 5월 말일 9연대 고승옥 상사 이하 7명이 카빙 총 1정과 99식 소총 7정을 가지고 탈출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⑨ 6월 초순 대정에서 9연대 상사 문덕오(文德五) 동무가 99식 소총 1정을 가지고 탈출 인민군에 입대했다.

⑩ 6월 20일 대정면에서 해경(海警) 1명이 99식 소총 2정을 가지고 탈출했다.

⑪ 7월 1일 대정면 서림의 수도(水道) 보초(步哨) 10명이 99식 총 11정을 가지고 탈출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⑫ 7월 12일, 대정에서 9연대 병졸 1명이 99식총 1정을 가지고 탈출했다.

⑬ 7월 14일 9연대 병졸 2명이 탈출하여 이 중 1명은 산(山)까지 왔다가 비겁하여 도주했다.

⑭ 7월 18일(문창송의 주 : 6월 18일의 오기로 보임), 6연대 이정우 동무는 오전 3시 박진경(朴珍景) 11연대장을 암살한 후 M1소총 1정을 가지고 상산(上山)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⑮ 7월 24일, 9연대 병졸 1명 99식 소총 1정 및 탄환 10발을 가지고 탈출하여 인민군에 입대했다.

⑯ 7월 초순 병졸 1명이 M1 1정을 가지고 탈출했다.
      계(計)  :  탈출병수 52명 (피검된 22명과 도주한 1명 제외)
      총 :  99식 소총 56정, 카빙 3정, M1 8정  합계 67정
     탄환 :  M1 1,443발, 카빙 탄환 2,415발 합계 3,858발
    기타 무기 :  조명탄통 1정 및 탄환 7발, 신호탄통 5개

김달삼의 기록병이 쓴 상황일지는 위와 같이 매우 소상하게 정리돼 있다. 더구나 국경과 유격대와의 관계를 별도 항목으로 설정하여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렇게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기록된 상황일지에도 4·28 평화협상은 전혀 언급돼 있지 않은 것이다. 위 자료들을 보면 9연대장 김익렬은 스스로 카빈 소총탄을 김달삼의 손에 쥐어주면서 충성의 마음을 전달했고, 9연대는 김달삼 부대의 보급창고요 인력 보충대였다.

위 355쪽에 “9연대 연대장 김익렬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 이라는 표현이 있다. 미 육군기록(1948. 4. 18)에 의하면 딘 군정장관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소요집단의 책임자와 접촉하여 항복할 기회를 부여해 주라는 요지의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김익렬은 이러한 명령을 받고 김달삼과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결국 김익렬은 김달삼을 만났고, 만난 장소에서 경찰을 미워한다는 말을 했고, 이어서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에서 카빈소총탄 15발을 건네준 것이다.

북한 논문에도 4·28 평화협상은 없었다

북한의 박설영은 그의 논문에서 “인민유격대는 4월 26, 27, 28일에 마을들을 습격하여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전화선을 끊고 선거관리원을 살해하는 등의 공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선거방해 행위는 5월로 접어들면서 더욱 맹렬해졌다.”고 썼다. 여기에 무슨 4·28 평화협상이 있었다는 것인가?

4월 26일 새벽 3시 30분경 삼양리에서 6명의 폭도 마을습격, 4월 27일 하모리에서 2개 다리 파괴, 선거업무차로 한림에 갔다오던 관리 6명이 신엄지경에서 피습, 낮 12시~27일 오전8시 사이에서 제주읍 부근의 전화선 절단, 도련마을에서는 경찰과 무장대가 교전하였는데 무장대는 기관총도 사용하였음, 4월 28일 새벽3시 30분경 14명의 폭도들이 신엄리 습격”

4월 28일에는 화북 3구 ‘황새와’마을 선거관리위원장 오두현(필자 주 : 4·3 수기 오균택의 부친)이 산사람들에 의해 납치되었는데 마을에서 2키로 가량 떨어진 소나무 밭에서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와 투표소에 대한 습격은 5월로 접어들면서 더욱 치열해진다. G-2보고서는 이 무렵 ‘선거사무소에 대한 많은 공작으로 인해 선거관리위원들은 투표용지와 투표함을 투표장소로 배치하는데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5월에 들어 서면서 인민유격대는 적에 대한 습격작전을 더욱 맹렬하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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