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김하영의 4·3 수기
제17장 김하영의 4·3 수기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1.0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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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주민들이 직접 겪은 인민유격대의 본질

“내가 겪은 4·3 사건”을 쓰기에 앞서 우선 본인의 출생과 가족 소개부터 하고자 한다. 본인은 1933년 12월 24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939년 가을경에 부모님을 따라 오사카~제주 간 정기여객선 군대환(君代丸)을 타고 고향인 제주에 왔다. 정확한 장소는 제주읍 화북리 동부락의 속칭 ‘버렁질’, 조부모님이 남겨주신 가옥에 정착하였다.

제주 4·3 사건 당시 본인의 가족은 조모(1868년생), 부친(1899), 모친(1909), 누님(1931), 본인(1933) 그리고 본인 아래 남동생 1명, 여동생 3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나는 화북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한국말(당시 조선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여 동네 아이들은 물론 동급생으로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500여 호 되는 화북리에는 일본에서 살다 귀국한 부씨, 2명의 양씨, 김씨 등 몇몇 인사들 그리고 마을의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등 이름 모를 다수의 좌파 단체에 가입했다. 이들 좌파단체들과 치안대가 함께 어울려 시도 때도 없이 모임을 갖고 “신탁통치 결사반대, 양과자 결사반대” 등을 주장하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본인은 1946년 6월에 화북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부친이 한동안 일본에 건너가 계셨기 때문에 중학교 진학문제를 결정치 못하여 부득이 1년을 쉬기로 하고 초등학교의 고등반 격인 학습소(지금의 재수 학원)에서 “양치명”을 담당교사로 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1) 관덕정 앞 3·1절 기념 행사와 소요사태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 관덕정 앞 광장에서 거행되는 3·1절 기념 본 행사 참가에 앞서 식전 행사가 먼저열렸다. 주로 청소년으로 구성된 부락민들이 무보수 교사 “양치명”의 주도하에 화북초등학교 교정에서 식전행사를 치른 것이다. 이 식전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옛 음조의 애국가, 적기가, 김일성장군 노래를 부르고,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신탁통치 결사반대, 양과자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마을 행사가 끝나자 부락민들은 “양치명”의 인솔 하에 관덕정 앞 광장으로 향했다. 본인이 관덕정 앞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군중들이 우체국 앞까지 밀집되어 있어서 연단을 바라볼 수 없었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연단을 바라보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옮긴 끝에 관덕정 앞 동남쪽 즉 경찰서 맞은편의 적산가옥(경찰서장 관사) 대문 앞 계단에 자리를 잡아 연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서문동 쪽에서 기마경찰관 1명이 행인의 통행로를 열기 위해 돌진하던 중, 본인이 서 있는 앞을 통과하고 구 제주자동차회사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플래카드용 장대를 뽑아내 말의 항문을 찔러대는 바람에 놀란 말이 이리저리 뛰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어린소년 1명이 말발굽에 밟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군중들은 마치 이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1명의 경찰을 향해 “저놈 죽여라”소리를 치며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기마경찰은 자위수단으로 총을 발사했고, 경찰서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경찰들도 총을 쏘기 시작했다. 관덕정 앞에 모였던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해산 했고, 나 역시 가까스로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귀가했다.

2) 양치명, 경찰에 연행되어 총살당하다

1947년 여름으로 추정되는 어느 날 오후, 나는 친구들과 우리집 앞에서 놀고 있었다. 바로 이때 나는 양치명, 문OO외 1명 등 3명이 포승줄에 묶인 채 경찰관(토벌대)에 연행되어 벌랑동(속칭 버렁)쪽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이 우리 앞을 지난 지 채 10여분도 안 돼 총성이 울렸고, 경찰관 일행만 되돌아 왔다. 호기심에 친구들과 함께 총성이 울렸던 곳을 갔더니 상기 3명이 길 옆 잔솔밭에 총살당해 있었다.

3) 오현중학교 입학과 학교 생활

1947년 여름, 일본에서 귀국한 부친의 지시에 따라 나는 1947년 9월에 제주 오현중학교(4년제)에 무난히 입학하여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1947년 11월 어느 날 오후 수업이 끝나갈 무렵 동급생인 안OO(화북초등학교 1년 후배)이 느닷없이 오늘 민애청 회의에 참석하느냐고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민애청이 무엇이냐고 반문했더니 그는 너는 몰라도 된다고 답했다. 귀가 후 부친에게 민애청이 무어냐고 여쭈었더니 부친은 그런 모임에는 무조건 참석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 후 동맹휴학이니, 백지동맹이니, 동맹파업이니 하면서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부친은 1939년 귀국 후 농사에 종사했다. 특히 특용작물로 양파, 배추 등 씨앗을 일본에서 주문하여 재배하고, 취미로 제주조랑말(경마용)을 사육하고, 또한 일본에서 반입한 종돈(버크셔)을 번식시켜 분양하면서 생활에는 걱정이 없는 편이었다. 이러다 보니 아버지는 마을의 공원(公員)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지금의 동발전위원회와 같은 모임에도 참석하여 마을발전에 참여했고, 때로는 승마동호인들과 더불어 경마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화북리 선거관리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부친은 승마애호가로서 타 지역에 출타할 때에는 항상 말을 이용했다. 승마동호인들과 교제가 많다보니 우리 집에는 연중 내내 2~3명씩의 식객이 끊이지 않았다. 1947년 3·1절 소요사태가 지난 후, 날이 갈수록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고 마을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부친은 무슨 낌새를 감지했는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말을 타인에게 매도하고 집안정리에 착수했다.

4) 제주 4·3 폭동과 지서습격(1차 습격)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별도봉”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화북지서가 무장폭도들의 습격으로 모두 불탔고,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순경 김장하 피살
급사 이시성 불에 타죽음
경찰가족 임산부 1명 피살(김성훈 집에서)
공회당(경찰관 지서) 전소

5) 2차 습격사건

1948년 5월 5일(음3월27일) 새벽1시경 무장폭도들이 화북리를 습격하여 아래와 같이 인명을 살상시켰다.

서부락 : 임형권 구장 겸 화북리 선거관리위원장 피살.

동부락 : 김용효(1893년생) 본인의 당숙부인 선거관리위원 피살.
김찬영(1924년생) : 김용효의 4남 결핵환자에게 머리와 복부에 중상을 입혀 창독으로 인하여 6월에 사망
안정봉 처(성명 미상) : 피살.
김용언(1899, 나의 부친) : 선거관리위원인 나의 부친을 이 때 살해코자 습격했으나 부친은 일단 피신하여 사고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후일 납치되어 피살당하셨다.

참고로 무장폭도들이 본가를 습격할 당시의 모습을 세밀하게 적고자 한다.

습격 전일인 1948년 5월 4일(음3월 26일) 10시경 조모님의 8촌 여동생이 본가를 방문하여 아들 김덕윤(1911년생)이 전하는 정보를 주고 갔다. “내일(5월 5일) 새벽에 우리 집과 당숙부 김용효 집에 습격이 있으니 피신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정보를 가지고 당숙부인 김용효 댁을 방문하여 전언했다. 그럼에도 당숙부는 평소 강직한 성격 때문에 피신치 않고 있다가 피살당했다. 우리 집은 습격에 대비하여 말 매도금 중 약간만 지참하고 나머지 전액을 단지 속에 담아 땅속에 파묻었다. 저녁 무렵부터 이웃에 사는 위 김덕윤과 동명이인인 김덕윤(1906년생)이 술에 취한 척하며 본가를 30분 간격으로 밤10시경까지 출입하면서 부친이 집에 계시는지를 탐색했다.

밤 11시경, 부친은 월담 피신하여 이웃 보리밭에 은신했으며 모친과 본인은 바깥채 방에서 취침하고 있었다. 새벽 2시경, 느닷없이 육중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본군 철모를 쓰고 군도를 소지하고 복면을 한 무장폭도 수명이 방으로 들어와 안채 바깥채 할 것 없이 샅샅이 뒤지며 부친을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지휘자인 무장폭도가 모친의 복부에 군도를 들이대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은 부친의 소재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모친은 “밤 10시경에 복통을 일으켜 정약국 댁에 약을 지으려고 나간 후 지금까지 귀가하지 않았다”고 버텼다.

두 번째 요구는 말과 물건을 판매한 금전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모친은 모든 금전은 남편이 관리하고 생활비로 쓰다 남은 약간의 금전은 남아 있다면서 주머니에서 끄집어 내 주었다.

세 번째 요구는 일본에서 반입하여 팔다 남은 알미늄 식기와 당시 각 부락마다 할당되어 팔다 남은 흑설탕을 부친이 매입했는데 그 설탕하고 식량을 다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창고에 있다고 답하자 무장폭도 일당들이 창고에서 반출하여 집에 있는 일본군용 마차에 싣고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본인은 그 동안 모친의 손을 잡고 겁에 질린 채 이러한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장폭도들이 철수한 후 모친과 나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얼마동안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때 6촌 누님(김용효의 장녀)이 울부짖으면서 아버지는 살해당했는데 삼촌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는 말에 정신이들자 그때서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나와 모친 그리고 6촌 누님은 곧바로 당숙부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숙부인 김용효는 마당에 끌려나와 철창으로 복부를 난자당해 살해돼 있었다. 내장이 밖으로 나온 채 비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6촌형인 김찬영 역시 마당에 끌려나와 철창으로 전신을 난자당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만은 유지되고 있었다.

날이 밝자 피신했던 나의 부친이 나타나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가매장 했다. 부모님과 막내 여동생 3명은 진상조사차 제주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차에 편승하여 제주시내에 거주하는 당숙부 김용균(1904년생 김용효의 동생)집으로 피신했다. 6남매 중 나머지 5남매는 불구인 조모님을 모시고 집에 남았다. 이날로부터 나의 가족들은 암암리에 무장폭도들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6) 5·10 선거 반대 입산과 용강동에서 무장폭도 무력시위

1948년 5월 8일부터 화북리에서는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무력부장 김달삼 직속으로 제주읍 동부지역을 담당한 특공대장 김주탁(1927년생 일본군지원병 출신)과 동생 김주영(1929년생) 그들의 부 김우윤(1907년생) 그들의 모 고남국(1906년생)으로 이루어진 일가족의 독려 하에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입산 작전이 시작됐다. 노약자를 제외한 남여 모두 약간의 식량만 휴대하고 제주시 용강동 근처로 입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나는 입산동기도 모른 채 4남매를 이끌고 불구인 조모님을 홀로 남겨둔 채 약간의 식량을 휴대하고 무조건 부락민을 따라 입산했다. 용강동을 약 100여 미터 앞 둔 지점에서 철모와 철창으로 무장한 김주훈(1931년생)을 만났다. 그는 나와 한동네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인정도 없이 우리를 인근 밭 한 복판으로 끌고 갔다. 그 곳에는 철창 등으로 무장한 폭도 5~6명이 있었으며 또한 약 30여명을 매장하기 위하여 미리 만들어진 구덩이(깊이2m 폭5m)속에는 본인 가족 5남매보다 먼저 연행된 아래의 가족들이 들어 있었다.

동부락의 김용효 가족 3명
안정봉의 가족 2명
모한조의 가족 3명
홍OO의 가족 1명
부OO의 가족 3명
중부락의 김성훈 가족 1명
서부락의 김기순 가족 3명 등

이 외에도 몇 가족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덩이 속에 감금되었을 때는 너무 무서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날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체념을 하고나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앞 둔 인간의 심리상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 모두가 다 기적같이 살아났다. 후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용강동에서는 화북출신 원로들과 민애청 소속 간부들이 회동하여 연행된 소위 반동분자 가족들의 숙청여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한다. 앞에 기술된 바와 같이 조모님의 8촌 여동생 아들 김덕윤(1911년생)이 특공대장 김주탁 가족들을 설득한 끝에 풀려나게 됐다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부락민들과 함께 용강동 민가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9일 아침, 용강동 마을 한복판에 소재한 광장에는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입산하는 화북리 부락민들과 인근 부락민들까지 집합돼 있었다. 50여명의 무장폭도들은 동부지역 특공대장 김주탁 지휘 하에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했다. 이들은 적기가, 김일성장군 노래, 혁명가를 부르고 김일성장군 만세 등을 외쳤고, 5·10 선거 반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여 집단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행사가 끝난 후 부락민들은 비를 맞으며 용강동 위쪽 소나무가 우거진 야산에서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은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제주시내로 피신했던 모친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본가로 귀가했으나 5남매가 입산 한 사실을 알고 뒤따라 입산하여 우리 5남매와 함께 은신생활 하다가 5월 17일 정오경에 하산하기 시작하여 무사히 귀가하였다.

5·10 선거 반대 입산시 용강동에서 무력시위에 가담한 무장특공대원으로서 지금 기억나는 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화북리 동부락 출신 : 김주탁(특공대 총지휘),김주영 (김주탁 동생), 김주훈, 홍OO, 모OO 김OO, 허OO, 강OO, 김OO 등
화북리 중부락 출신 : 이OO, 이OO, 허OO, 김OO, 김OO, 김OO, 문OO 등
화북리 서부락 출신 : 양OO, 김OO, 최OO, 김OO, 신OO 등
용강리(웃무드내) 출신 : 유OO(초등학교 동창) 등
아라리(걸머리) 출신 : 문OO(초등학교 동창) 등

이 외에도 화북 출신이 다수 있으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며 또한 삼양, 도련, 봉개, 회천, 용강, 영평, 월평, 아라동 등 타 지역 출신도 상당수 있었다. 위에서 OO으로 기록한 이름들은 내가 다 아는 이름들이며 실명으로 수첩에 기록해 놓고 있다.

7) 당시 무장폭도들의 무장과 구성원

당시 22세였던 지휘자 김주탁은 일본군 복장에 철모를 쓰고 군도와 권총으로 무장했으며, 기타 대원들은 사복에 일본군 철모, 개머리판을 만들어 끼운 99식 장총, 개머리판 없는 99식 장총 및 철창 등으로 무장했다. 무장폭도들의 구성원은 화북리 출신이 다수였으며 당시 제주읍내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 및 남부에 위치한 산간부락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그 구성원 중에는 본인의 초등학교 동창생 및 중학교 선배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초등학교 동창 중에는 본인과의 나이 차이가 5~6세 정도 연상의 남·여학생들이 많았다.

그 중에 지금 생존해 있는 자는 :

화북리 출신의 허순O(일본에서 귀국 민간인) 후일 경찰간부 역임
최OO(농업중학교 학생) 후일 경찰정보계 및 수사계 역임
이OO(오현중학교 학생) 후일 도체육회 사무국장 역임
용강동 출신의 유OO(오현중학교 학생) 후일 OO동지회 청년부OO, 원호청(지금의 국가보훈처)OO을 역임

8) 모창림, 현철하 납치 살해사건

5·10 선거 반대를 위하여 야산에서 은신생활 하던 중 화북리 출신 무장폭도들이 모창림 외 1명을 납치해 끌고 오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과 피살됐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 후 알려진 사실은 아래와 같다.

모창림 : 8·15 해방 직전 일본에서 귀국하여 화북리 축구대표선수로 활동하여 그 인기가 높았으며 5·10 선거 반대를 위하여 입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납치되어 당일 김주탁 형제에 의하여 살해됐다고 한다. 당시 동부락 간부 6인(김덕균, 문정규 이완성, 김도윤, 이병생 및 홍길신)회의에서 그를 위해 구명노력을 폈지만 끝내 살해했으며 지금까지 시체마저 찾지 못했다.

현철하 : 아라리(걸머리)출신으로 전술한 김용효의 둘째 사위이며 본인의 6촌 자형이다. 그는 당시 도립병원에 근무하면서 청창에 난자당한 처남 김찬영을 치료해 주려고 처가에 들렸다가 모창림과 같이 납치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용케도 아라리 출신 무장폭도들의 보증 하에 피살을 모면했다. 그 대신 그는 모창림이 죽어 가면서 울부짖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

9) 김주탁 가족들이 화북리에서 제왕적 존재로 등장

전술한 용강동에서의 무력시위 이후 특공대장 김주탁 일가는 부 김우윤(1907년생), 모 고남국(1906년생) 등이 제왕적 존재로 군림하고 마을을 장악했다. 모 고남국은 동내 부인들에게 “내 아들이 제주도 인민해방군 사령관”이라며 “우리 아들 말을 잘 듣고 행동해야 장차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했다. 그 가족들의 언행이 법이 되고 그들의 마음 먹기에 따라 부락민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10) 경찰에 의한 동부락 이완성 집 습격 방화사건

5월 17일 동부락 이완성 집에서 민애청 간부회의 도중 경찰 토벌대가 불시에 습격했다. 민애청 간부 김OO은 사살되고 이수선(이완성 딸)은 불에 타 죽었고, 가옥은 전소됐다.

11) 나의 부친 김용언 피랍

제주시내 동문통 당숙부 김용균(1904년생)집에 피신해 있던 나의 부친은 거동이 불편한 노모님만 남겨 놓고 전 가족이 입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모의 안위가 걱정되어 5월 17일 새벽에 사라봉과 별도봉의 샛길를 통하여 본가로 잠입했으나 잠입도중 본인의 초등학교 동창 백OO(오현중학교 1년 선배)에게 발각되었다. 부친은 잠시 노모님을 뵙고 본가의 뒤편 보리밭에 은신해 있었다. 5월 17일(음 4월 9일)오후 우리 가족이 하산 귀가해 보니 집 대문에 “반동분자 김용언은 자수하라”는 경고성 삐라가 붙어있었고 얼마 후 부친이 나타나 가족들을 상봉한 후 재차 제주시내로 피신 중에 또 발각되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부친은 속칭 “동주원”에 거주하는 지인 한OO의 장남 한OO에게 숨겨 줄 것을 간청했다. 장남 한씨는 방언으로 “굴묵어귀”(방 뒤쪽에 온돌 불을 지피는 장소) 속에 숨겨주는 척 하고는 이웃에 거주하는 신OO(식육 판매)에게 이 사실을 밀고했고, 신OO은 즉시 부친을 납치 해다가 용강동 야산에 있는 김주탁과 동생 김주영 일당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그 형제는 당일로 부친을 살해하여 암매장 했다고 한다. 모창림 살해와 나의 부친이 납치되어 살해될 때까지의 모든 정황은 후일 이웃에 거주한 김덕윤(1906년생 김주탁과 친척)이 알려 주어서 알게 된 것이며 이 자는 4·3 사건을 전후하여 우리 집으로부터 물질적 금전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때 본인의 집은 동부락 버렁질 끝집이었기때문에 삼양지서 경찰관과 토벌대의 침입을 감시하는 아지트가 되어 민애청 소속 학생들이 상주하며 교대로 집 앞에서 “빗개”(보초)를 서기도 하고 또한 본인 역시 보초를 서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빗개의 아지트”라기보다는 우리 가족들을 감시하기 위한 위장된 수단이 아니 었나 생각된다. 우리 가족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부락 간부들이무장폭도들의 식량보급을 위하여 금전 또는 식량을 요구하면 다른 가정보다 더 많이 기부했고, 백지에 날인을 요구하면 내용도 모른채 날인하여 주기도 했다.

12) 남로당 도 당책 안세훈, 김달삼, 김주탁이 화북리에서 월북

1948년 8월 20일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되는 공산당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남로당 제주도당책 안세훈, 김달삼, 김주탁” 등이 월북하였다.

일시 : 1948년 8월 초순
승선장소 : 화북리 동부락 선창
수송선박 : 김OO 소유 동력어선(그의 아들 김OO의 증언)
선원 : 이OO효(해방전 제주-목포간 여객선 흥아환(興亞丸) 선원), 김OO, 안OO
행 선 지 : 전남 완도군 청산도
승선현장보초 : 안구훈(본인의 중학교 동창이며 안세훈의 8촌 동생)

당시 화북리에는 4월 3일 경찰지서가 방화로 인하여 소실된 후 삼양지서에서 주간에 경관 2~3명이 파견 근무하다가 저녁 무렵이면 철수하여 야간에는 치안부재의 상태였으며, 그래서 월북하기에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본 사건은 그들의 월북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49년 여름에 화북리 동부락 속칭 “연뒤밑”에 거주하는 김주탁의 최측근 참모인 부녀동맹위원장 안방훈(일본에서 여고 중퇴하여 8·15해방 후 귀국)과 김춘화 등이 경찰 당국에 체포될 당시, 숨겨두었던 극비문서 등이 압수되어 수사하는 과정에서 월북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이며 또한 그 비밀문서가 빌미가 되어 화북리에서 “안구훈” 외에 다수의 사람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13) 1948년 가을경, 동주원과 서부락 중간지점(비석거리)에서 동원된 부락민들이 보는 앞에서 제주시 도두동 출신 송계남(본인6촌 자형)외 4명을 군인들이 총살시키는 현장을 목격했다.

14) 1948년 11월 5일경, 무장폭도 주동자로 지목된 김주탁, 양동표, 안방훈(여, 김주탁 최측근 참모) 등의 가옥을 경찰이 방화하여 소각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부락 : 김주탁 가옥
동부락 : 김종성 부친 가옥(안방훈의 가옥으로 오인하여 방화함)
서부락 : 양동표 가옥

15) 화북리 앞 일주도로 변에서 군 수색대를 습격

1949년 1월 5일(음 48년 12월 7일)제주시 삼양리 “원당봉”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괴선박이 출현하여 무기를 하역한다는 정보를 삼양지서로부터 통보받은 국군 제2연대본부 정보처(주임장교 박태원 소위) 소속 수색대(주로 서청출신) 1개 소대가 확인 수색 차 출동했다가 귀대하던 도중 화북리 남측 일주도로 변 속칭 “횃선거리”(지금의 남문버스 정류소 부근) 커브길에서 무장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전멸당했다.

무장폭도들은 계획적으로 도로상에 돌을 쌓아놓고 매복해 있었다. 수색대가 귀대 도중 상기 지점에서 석축을 발견하고 전 대원이 하차하여 철거작업을 시작하자 그 순간에 습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생존자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전사했다. 저들은 군용차량 “스리쿼타” 1대를 불태우고 전사자의 군복과 군장비 등을 탈취하여 무장폭도 전원이 화북리로 잠입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다음 날 1월 6일(음 1948년 12월 8일) 군경에 의한 소탕작전이 화북리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16) 화북리에서 무장폭도 수색작전 전개

1949년 1월 6일(음 12월 8일)아침부터 바람이 불며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대문이 열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니 생각치도 않은 6촌형 김은영(1929년생)과 김환영(1931년생) 두 분과 군인 수명이 나타나 빨리 나오라 했다.

나는 엉겁결에 두 형들을 따라 초등학교 한 모퉁이에 임시로 마련된 화북지서로 향하던 중 김OO의 부친 집에 하얀천을 단 깃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외에도 몇몇 집에 똑 같은 깃대가 세워져 있었다. 경찰은 김OO의 부친 집만 골라 방화하여 소각시켰다.

내가 화북지서에 도착하여 대기하는 동안 서부락 쪽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서부락 넘어 속칭 “곤을동” 쪽에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으며 또한 동부락과 중부락에서도 가끔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읍내 당숙부 김용균 집에 도착하여 위로를 받으며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집에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17) 화북초등학교 방화 및 김도영(나의 누님) 피살

1949년 1월 7일(음 48년 12월 9일)아침 나는 가슴을 졸이면서 6촌 형님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10시경에 군복차림의 낯선 분이 찾아와 6촌 형들과 그 무엇인가 귓속말로 대화를 나눈 후 그 분을 뒤따라 6촌 형님 두 분과 같이 대로변에 나오니 어제 작전에 임했던 군인들이 차량(GMC) 두 대에 분승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6촌 형 두 분과 나도 편승하여 무언 속에 사방을 경계하며 화북리에 도착해 보니 어제와 다른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전날 떠나올 때 부락 한복판에 우뚝 서있던 역사 깊은 초등학교 건물 4개 동이 무장폭도들의 습격에 의해 방화되어 온데간데없이 소실되어 그 잔해만이 남아 연기 속에 쾌쾌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다행히도 경찰지서만은 경찰과 민보단원의 필사의 방어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오직 가족이 무사하기만을 빌면서 집에 당도했다. 나의 집 역시 무장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안채는 소실되고 마당에는 누님 김도영(1932년생)이 피살될 때 흘린 혈흔만 남아 있었다. 누님의 시신은 이미 이웃분들의 협조로 가매장이 완료된 상태였고, 가족들은 공포에 떨며 사색이 되어 있었다. 모친은 1월 6일 본인이 제주시내로 피신함에 따라 필히 무장폭도들의 습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막내 여동생을 데리고 밤 10시경에 본가에서 몰래 빠져나와 얼마되지 않은 거리에 홀로 사는 “점빵할머니댁”에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할 수가 있었다. 군경에 의한 수색작전과 사태수습이 끝난 후 나의 가족 전체가 군용차에 편승하여 제주시의 친척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4·3 폭동으로 부터 만10개월 만에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보금자리를 버리고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18) 화북초등학교 교정에서 경찰에 의한 구장 및 보초 근무자 총살

1949년 1월 8일(음48년 12월 10일)오후 경찰은 구장 장용순 외 다수의 부락민(전일 습격당시 보초근무자)을 무장폭도와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부락민 앞에서 총살했다. 그 후로도 종종 화북리에서는 무장폭도들의 습격과 군·경에 의한 수색작전 및 총살 등으로 인해 인명피해가 많이 발생했다. 무장폭도들로부터도 당했고, 토벌대로부터도 당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집에서 따로 셋집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으나 막내 여동생은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고, 모친은 한때나마 4·3 사건의 후유증으로 정신분열 증상으로 고생하시다가 4·3의 한을 품은 채 1996년 12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19) 축성과 소개령

1949년 초 폭동사태가 심각해지자 무장폭도들의 식량보급로를 차단시키기 위하여 군 당국은 불가피하게 제주도 전체의 일주도로변 위쪽에 있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이동하라는 소개령을 내렸다. 부락민들은 해변마을로 이동하여 무장폭도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축성했다. 부락민과 민보단 스스로가 부락을 방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간에 외부로 출타하려면 경찰지서장이 발행하는 통행증을 발부 받아야 했다.

부락민 이동이 완료된 중산간부락의 가옥을 차례차례로 방화 소각했다. 대대적인 무장폭도 소탕작전이 전개되자 무장폭도들은 식량보급이 차단된 상태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되면서 일부 무장폭도 또는 비무장폭도들이 군·경 당국에 생포 또는 귀순하기 시작했다.

20) 귀순 무장폭도들을 이용한 선무공작

군·경 당국은 생포 또는 귀순한 폭도들을 이용하여 선무공작에 투입함으로서 하산 귀순하는 폭도들이 급증하여 한때 옛 주정공장에 수용하기도 했다. 전세는 군·경 쪽으로 유리하게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4월경 수사관 황복만의 부름을 받고 국군 2연대 정보처에 들려보니 화북리 출신 무장공비 이태형이 생포되어있었다. 나는 나의 부친 김용언에 대하여 그를 추궁했고, 이태형은 나의 부친을 “김주탁과 김주영” 형제가 살해하여 암매장 했다고 진술했다.

21) 무장폭도 총사령관 이덕구 사살

1949년 6월 초, 무장폭도의 보급담당 간부(화북출신 허OO)가 화북지서에 투항하여 남로당 제주도당 무력부 총사령관 “이덕구”의 은신처를 알려줌으로써 6월 7일, 화북지서 주임(경위) 지휘 하에 경찰과 민보단의 합동작전으로 “이덕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덕구”의 시체는 화북리를 거쳐 한때 관덕정 앞에 매달아 시민들에게 전시했으며, 총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자 그들 세력은 빠르게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덕구의 나이 30세였다. 이 외에도 1948년 가을, 화북지서 경찰과 민보단의 합동작전으로 “황사평 아오롱” 지경에서 무장폭도와 일대 접전이 벌어져 민보단 단장 김배현이 전사했다. 폭도들은 폭동이 종료될 때까지 식량조달을 위하여 다발적인 습격을 가했다.

22) 부친 시체 발굴

나의 부친이 “김주탁과 김주영” 형제에 의해 살해 됐다는 무장공비 이태형의 진술을 득한 후 나는 오직 “김주탁과 김주영” 형제가 귀순 또는 체포 되기만을 학수고대 했다. 1949년 6월 어느 날 우연히 화북 사람으로부터 김주영이가 헌병대에 자수한 후 석방되어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사관 황복만에게 의뢰하여 그를 재검거한 후 그를 취조했다. 그 결과 자기 형제가 용강동 위쪽 야산에서 살해하여 암매장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나와 나의 모친 그리고 수사관 황복만외 당시 경찰에서 정보처에 파견된 임 수사관, 유 수사관, 문 수사관, 군인 5명, 인부 2명이 김주영을 앞세워 살해 암매장 했다는 장소에 갔다. 가보니 바로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입산하여 은신했던 그 장소에 묘를 둘러싸고 있는 석축(산땀) 곁에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피랍 일로 부터 만 1년여 만이었다. 그리고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봉개리 서쪽 양지바른 곳에 가매장 하였다.

4·3 폭동 이후 “별도봉”과 “원당봉”에 봉화가 오르는 밤이면 그리고 지금의 화북 남문 쪽에서 무장폭도와 민애청원들이 모여 “왓샤 왓샤”하며 무력시위를 하는 날 밤이면 나는 단 하나뿐인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집 울타리 안에 있는 고구마 저장용 구덩이 속에 숨든가 아니면 마루 밑이나 울타리 넘어 이웃 보리밭 심지어는 돼지우리 속에 숨어 밤을 지새기도 했다.

23) 안세훈 등 월북사건에 관련된 안구훈, 이OO 및 김OO 등 구명 요청

안구훈은 안세훈, 김달삼, 김주탁이 제주도를 탈출할 때 망을 보아준 사람이었다. 1949년 여름 어느 날 안구훈의 모친과 나의 이웃집에 사는 탈출을 도와준 선원 “이OO”의 처 등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찾아온 목적은 자기들의 아들과 남편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어 있는데 구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3일 후 황 수사관으로부터 제주경찰서로 와달라는 부름을 받고 경찰서에 갔더니 황 수사관이 유치장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느끼는 바가 있어 황 수사관을 따라 유치장에 들어갔다. 화북리 출신으로 전기 안구훈, 이OO, 김OO 외 다수의 남녀 지인들이 체포되어 수용되어 있었으며 죄명은 역시 월북에 관련된 것으로 4·3 사건이 다소 진정된 시기여서 조사가 끝난 후 안구훈, 이OO, 김OO 외 단순 가담자들은 석방되었다. 안구훈은 4·3 사건 당시 화북리 민애청 소속 열성당원으로 석방된 후 제주오현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밀항, 오사카에서 재차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졸업한 후 조폭단체에 가입 활동하다가 20여 년 전에 귀국, 고향에서 생활하다가 10여 년 전에 중풍환자가 되어 지금까지 생존해 있으며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지금도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이다.

24) 도 당책 안세훈과 김주탁의 월북에 관한 증언

안구훈이 일본에서 귀향한 후 본인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를 만났더니 다음과 같은 양심 고백을 했다.

<안구훈의 고백 내용>
가) 본인의 당숙부(김용효)를 살해할 때 당시 자기가 보초를 서서 감시했다.
나) 자기 8촌 형도 안세훈, 김주탁 등이 월북할 때 현장 보초를 함께 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다) 나의 누님인 김도영을 이욱형 자신이 살해했다고 허순옥에게 자랑삼아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1991년 5월 31일 발간된 ‘화북동향토지’(발행인 : 화북동운영위원회, 편집인 : 백자훈, 양영선)146~156 쪽에 의하면 무력부 총책인 김달삼이 화북에서 월북했다는 사실이 다루어져 있다. 이 내용을 간략하게 발췌하여 수록하기로 한다.

화북동 향토지 146 쪽 4·3 사건과 화북

4·3 사건 발발전후 147 쪽 15번째 줄부터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위원회 : 군사부장 이덕구의 가족이 별도봉 기슭에서 처형되고 이덕구도 화북지서와 화북민보단 합동작전에서 사살되고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김달삼이 화북포구를 통하여 월북(당시 동내 소문)하였다고 하니 4·3 사건의 종지부는 역시 화북에서 끝을 맺으면서 화북은 4·3 사건의 전면에 부상되고 말았다.는 표현이 있고”, 마무리 155쪽 끝 부분에는 “화북은 공교롭게도 4·3 사건의 신호가 화북지서인 공회당이 소각되는 불꽃이 신호가 되었고, 이덕구의 사살과 김달삼의 월북으로 역시 화북에서 끝마무리 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있다.

여기에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화북동향토지 146~156 쪽에 4·3 사건에 관해 기술하면서 화북리 출신 무장폭도와 남로당 산하단체서 열성적으로 활동한 간부들의 이름들 모두가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김달삼의 월북과 이덕구 사살 사건은 다루면서 김주탁의 월북에 대하여는 다루지 않은 것은 김주탁 동생 김주전(군 제대 후 8대 화북동 “부락장”과 초대 통장협의회 회장 등 역임)의 압력과 마을에서 입산한 무장폭도 가족들의 신상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감추어 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으며 또한 당시에 활동했던 간부들은 이미 안세훈, 김달삼 및 김주탁 등이 화북리에서 월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서 2006년 여름 어느 날 부산 대정공원 묘지에서 화북리 출신 임제호(제주시 부시장 역임, 피살된 임형권의 차남)을 우연히 상봉, 4·3 사건 관련 대화중에 임제호는 이런 말을 하였다.

2006년 제58주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 봉행일 다음날인 4월 4일 이욱형과 함께 4·3 평화공원을 방문하여 안치된 화북리 출신 위패 등을 보다가 김주탁의 위패를 발견하고는 ‘월북한자의 위패도 안치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등의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임제호는 강원도 태백산 근처에서 군 복무를 할 때, 현지 주민들로부터 월북한 김달삼의 빨치산 활동상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특히 화북리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활동하다 일본으로 밀항한 “부OO”을 위시하여 조총련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한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또한 화북리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된 사람도 많이 있었고,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6·25 사변 당시 행방불명된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화북리는 그만큼 좌파성 인물들이 많았고 또한 좌익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밀항, 북송선을 이용하여 월북한 자들도 다수가 있는 동네이다.

나의 집안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원인은 조상대대로 잘 살아온 “부르조아” 집안으로 좌익 활동에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과 종숙부 김용균이 당시 한독당에 가입한 후, 화북리에서 지인들과 같이 한 술자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농담 한마디를 한 것이 와전되어 그들의 숙청대상이 된것이다.

25) 화북 출신 허OO, 이OO, 최OO 및 유OO 등은 4·3 사건 진상을 밝혀야 한다

상기 자들은 생포 또는 귀순하여 토벌대 측에 서서 선무공작대원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석방되어 있다가 6·25 사변을 맞았다. 이들은 재 검속돼야 할 대상들이었지만 검속 직전에 혈서를 쓰고 군에 지원했다. 이렇게 해서 군 복무를 마친 그들은 요직들을 두루 거치며 잘 살고 있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4·3 무장폭동시 화북에서 자행한 모든 사건을 진솔하게 화북 동민에게 밝히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제주도내 그 어느 부락보다도 화북리는 희생자도 가장 많았고, 재산 상의 손실도 가장 많았다. 김주탁 일가의 협박을 못 이겨 그들에 동조한 순진한 부락민들이 많이 희생된 것이다.

26)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2000년 7월경 상기 위원회로부터 제주 4·3 사건 희생자 신고를 하라는 통지가 있어 본인은 부친 김용언과 누님 김도영에 대한 신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된 어느 날 상기위원회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4·3 사건 희생자 신고서를 제출한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질의내용이 어설픈 감이 있어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바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대학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개개인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군·경에 의해 희생된 폭도가족들은 희생자 신고서에 언제 어디서 군·경에 의해 희생(대략 13,447명)됐다고 신고를 했지만 우익인사 639명(국가보훈처에 등록)을 살해했다고 신고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우익 인사 639명은 누가 살해했다는 것인가 ?

진상조사가 공평하게 이루어지려면 일차적으로 “동” “리” 또는 “마을” 단위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신고된 제주 4·3 사건 희생자 신고서를 심사, 무장폭도의 활동과 죄질 여부와 죄의 경·중을 구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민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은 우연한 기회에 2006년 제58주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 봉행위원회가 발간한 책자를 입수하여 제주시 화북리편 희생자 명단을 보았다. 본인 부친을 살해하고 월북한 무장특공대장 김주탁과 동생 김주영 등 형제의 위패가 소위 4·3 평화공원에 안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도 놀라고 또한 분노가 치솟아, 밤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후 수차례에 걸쳐 4·3 사건 진상규명사업소를 항의 방문하여 위패철거를 요청했고 또한 관계 당국에 진정했으나 화해와 상생과 명예회복이란 미명하에 거부당했고, 물적 증거와 서류상의 증거가 없다며 거부당했다.

2008년 5월 1일 대통령 실장 류우익 앞으로 청원서를 제출한 결과 국민권익위원회 경유로 제주 4·3 사업소에서 조사토록한 바 동년 12월 24일부 회신에 의하면 당시 4·3 사건에 관련된 현지 거주 생존자 및 관계기관 등을 대상으로 현지 조사한 결과 무장특공대장 김주탁이 월북했다는 증언 등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물적 증거를 확보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족대표가 ‘김주탁이 4·3 희생자로 결정된 것’을 자진 철회함에 따라 제주 4·3 중앙위원회(국무총리실 소속)의 심의의결을 거쳐 위패철거 등의 조치를 취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후일 확인한 결과 위패가 철거되어 있었다.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어 법제정의 근본 취지는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과 동시에 희생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이 아닌 진실을 가린 후, 억울하게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리고 50여년 이란 긴 세월동안 상호간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고 화해와 상생의 길을 열고자 함이 그 목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취지를 마다할 희생자 가족 또는 국민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가리지 않고 “명예회복과 상생” 이라는 미명하에 무조건적으로 4·3 사건 희생자 양측 전원(신고자)의 위패를 4·3 평화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로 인해 현재 제주도 전역에 걸쳐 양측 희생자들은 “화해와 상생”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오히려 반목만이 극대화되고 매일같이 송사가 판을 치고 있는 실정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정협”의 홍보물에 의하면 노무현 정부에서는 무장폭도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그 장소에 국민의 혈세 993억 원을 투입하여 12만평에 이르는 4·3 평화공원을 세웠고, 거기에 봉안된 13,447명의 위패들 중에는 안치해서는 안 될 악질적인 무장폭도들의 이름도 많이 들어있다.

월북한 무장특공대 대장 김주탁의 동생 김주전(77)은 2008년 3월 29일 제주일보 사회면에 별첨한 신문과 같이 4·3 연구소 ‘분풀이 마당’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언급했다.

“큰 형님이 유인물을 배포 지시했다는 경찰의 일방적인 말 한마디에 아무 죄 없는 가족들이 끌려가 죽음을 당하고 평생을 연좌제에 걸려 죄인처럼 지내야 했다.” “아이들과 노인들까지 죽여야 했는지” “60년 넘어도 가슴 아픈 4월” 등의 표현으로 자기들이 토벌대의 피해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화북리 동민들에게 자기 형들이 아니 자기 가족들이 저지른 살인 만행과 과오를 솔직하게 사과하여 용서를 구하고 또한 4·3 평화공원에 있는 가족들의 위패를 스스로 철거하는 것만이 화해와 상생을 이룰 수 있는 길일 것이다.

2011년 3월
작성자 : 김하영 (1933년 12월 24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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