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작전(1949. 3. 2-5. 15)
제23장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작전(1949. 3. 2-5. 15)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1.0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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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발악과 군경의 토벌작전

제2연대의 효과적인 작전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의 준동은 시들 줄 몰랐다. 이들은 군경의 무기를 탈취하여 경비가 소홀한 부락을 습격하고, 청년들을 납치해다가 공비로 훈련시키면서 공비 세력을 꾸준히 양성했다. 때는 흘러 1948년 9월 5일 부로 국방경비대가 육군본부로 탈바꿈 했다. 육군본부로서는 이런 제주도가 골치덩이였다.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열심히 공격적인 군사력을 기르고 있을 때인 1949년, 남한은 제주도라는 섬 하나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 길은 먼데 계속적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제주도 빨치산 유격대에 육군본부라면 당연히 화가 날만 했다. 육본은 녹음이 짙푸르기 전에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해동이 되자마자 소탕작전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약칭 ‘제주전투사령부’는 2연대(3개대대), 제주경찰 그리고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독립 제1대대로 구성됐다. 사령관에는 유재흥 대령, 참모장은 제2연대장인 함병선 대령으로 하여금 겸임케 했다. 같은 3월 2일, 육본은 또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정일권 준장, 6개 대대)와 전남지구전투사령부(원용덕 준장, 6개 대대)를 창설하여 산에서 준동하는 공비들을 소탕하는 작전들을 폈다.

‘선-선무 후-토벌’, 제주전투사령부 작전은 함병선 대령의 작전 개념을 그대로 수용했다. 도내의 지도급 청년들이 산으로 들어가 선무공작을 수행했다. 수용소를 추가로 설치하고 여기에 도청과 협조하여 구호미, 의류품을 제공하고 생활자금도 2배로 늘려주었다. 하산한 주민들로 하여금 직접 간접으로 공비들을 설득하게 했고,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무수한 선무 삐라를 살포했다. 귀순자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공비토벌작전은 제2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펼쳤고, 해안지역 작전은 경찰이 담당했다. 경찰은 마을마다 ‘민보단’을 편성하여 낮에는 농민을 보호하고 밤에는 공비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게 했다. 전투사령관은 민관군이 총체적으로 동원되는 유기적인 작전을 위해 이를테면 합동군을 생각해 냈다. 민보단 1개 소대(25명)에 군인 및 경찰 각 1개 분대를 증강시켜 민-경-군 혼성부대를 여러개 만든 것이다.

혼성부대들은 교사들, 군청 및 면사무소 직원, 청년단 간부들로 조직되었으며, 1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을 거쳐 군사화됐다. 그리고 이들은 공비소탕작전에도 동원됐다. 예를 들어 제2연대 1대대 정수정 상사가 지휘하는 혼성부대는 공비의 아지트를 찾아내 30여명을 생포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이 팀은 또 생포한 자들 중에서 공비의 세포인 고씨를 전향시켰고, 그 결과 공비두목 이덕구와 김민성(군사부 조직책)의 아지트를 알아냄으로써 지체 없이 급습하는 엄청난 기회를 포착했다. 하지만 이때 이덕구는 공비병력을 이끌고 출동한 상태였기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이들 혼성부대들은 공비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대 제주도 공비사령관 이덕구! 그는 김달삼의 부하였지만 김달삼 보다 4살 더 위였다. 그는 1948년 9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에 살고 있던 대동청년단원 문두천을 칼로 난자한 것을 기회로 김달삼의 신뢰를 얻었다. 빨치산들은 이를 이덕구의 9·15 사건 이라고 부른다. 이어서 남로당은 11월 7일, 이덕구를 통해 제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제2의 4월 3일 폭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하지만 이 비밀회의에 참석했던 남로당 앞잡이 순경 한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돌려 자백함으로 인해 음모 가담자들이 일거에 일망타진되는 쾌거가 발생했다. 여기에서도 남로당 주요 인물들은 북한과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곧 세상이 공산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감언이설로 호언장담하던 허위 선전-선동자들은 모두 도망쳤고, 제주도에 남아 고초를 당한 인생들은 이들에 현혹됐던 무지몽매한 맹종자들이었다. 이들 맹종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야생마처럼 한라산 동굴과 밀림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귀중한 청춘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다,

이렇게 공산당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온가족의 인생도 망쳐버린 사람은 이른바 지식인들 중에도 있다. 1942년생인 오길남 박사의 경우다. 그는 서울대학에서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에 독일로 유학가서 윤이상과 송두율의 감언이설에 놀아나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그 부인과 사랑스런 두 딸을 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3모녀는 요덕수용소에 갇혀 있고, 오길남은 혼자 탈출하여 매일 술과 회한의 눈물로 26년째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귀순하는 자들이 나날이 증가함에 따라 공비들의 은신처와 무기고들이 연이어 군경에 의해 접수됐다. 특히 한라산 서쪽 6km 지점의 어승생악에 위치한 그들의 비밀병기창이 발각되어 소총 370정과 다수의 실탄 등이 노획됐다. 무기 없는 공비가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에 육군본부는 공비가 재기 불능상태인 것으로 파악하여 5월 15일부로 제주지구전투사령부를 해체했다. 그리고 5월 20일에는 5개월간의 토벌작전 중 산화한 토벌대 요원 119명에 대한 위령제를 제주읍에서 거행했다. 아울러 제주도민들은 제2연대의 공적을 찬양하고 이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했다. 이덕구가 사살된 지 만 1개월이 지난 7월 7일에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한라산 정상에 평정비를 건립했다.

이렇듯 제주도민들로부터 숭앙을 받은 함병선 대령을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과 고건 및 박원순 등 좌파들이 주도한 정부보고서는 ‘최악의 악랄한 살인마요 초토화의 장본인’이라 모함한다. 이 사람들은 비단 함병선과 이승만에 대해서만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을 구해준 미국과 맥아더에 대해서도 증오를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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