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오균택의 4·3 수기
제16장 오균택의 4·3 수기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1.0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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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주민들이 직접 겪은 인민유격대의 본질

오균택의 수기(“내가 겪은 제주 4·3 사건”)

일본군이 패망 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미군 폭격기가 제주도까지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 전투기가 대항하였지만 상대가 안되었다. 일본 전투기가 무수히 떨어졌다. 하늘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돈 많은 사람들은 육지로, 중산층 사람들은 제주도 중산간(산의 중턱) 부락으로 피난하느라 장사진을 이루었다. 우리 가족도 제주시 화북경의 황새왓으로 주거를 옮겼다.

그러던 중 일본이 패망하고 감격어린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거리마다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 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 씩씩한 모습으로 미군이 진주했다. 초라한 모습으로 철수를 서두르는 일본군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해방과 더불어 그간 일본군대에 끌려갔던 청년들과 강제 징용되었던 젊은이들,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던 학도 등이 고향을 찾아 물결 같이 모여들어 자유와 환희를 만끽했다.

우리가 피난 갔던 황새왓 마을은 독립된 마을로 100여 호에 가까운 부락이었으나 행정 구역상 멀리 떨어진 화북동에 속해 있었기에 일제의 압박에 더해 이중의 설움을 받아오던 터라 조국 광복의 물결에 편승하여 화북동에서 독립하는 분구(화북3구) 운동이 전개되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젊은 일꾼들도 속속 모여들어 지금까지 낙후되었던 마을을 부흥시키자는 열기가 높아 마을 총회를 열어 분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위원장으로 나의 선친(오두현)이 선출되었다. 아버님께서는 온화한 성격이나 한번 책임을 맡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고 나가는 성품이어서 당시 제주읍 사무소 출입을 매일 하다시피 하여 불과 몇 개월 만에 화북3구로 분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온 마을 사람들은 조국 광복에 다음 가는 기쁨으로 환호하였다. 다시 마을총회를 열어 구(區) 책임자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역시 아버님이 초대 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삼양3구도 같이 분구되었다. 선친께서는 사양하였지만 분구 추진의 공로를 인정하여 마을 발전에 더 힘써 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못 이겨 승낙하였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피난지에서 생활 터전을 잡고 정착하게 된 계기였고 앞으로 우리 가정의 운명의 갈림길이 되고 만 것이다.

선친께서는 마을 발전 사업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마을회관 부지를 매입하여 회관건립에 착수하였고 도로와 농로를 확장 정비하는 등 온 마을이 일시에 변모하여 갔다. 회관이 완공됨에 따라 그간 일제 압박에 시달려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과 부녀자들을 모아 주간에는 한문, 야간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등 낙후된 마을을 건설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감격스러운 조국의 광복과 마을의 독립으로 메아리쳤던 환호 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악랄하고 무자비한 골육상잔의 만행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4·3 폭동이 서서히 다가온 것이었다. 3.8선 이남에서는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10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방방곡곡이 선거체제로 들어갔다. 제주읍에서는 마을 행정구역 단위로 투표구를 지정하고, 선거위원과 위윈장을 위촉하기 시작했는데 화북3구에서는 구장인 선친을 선거위원장에 위촉하였다. 선거사무가 본격화함에 따라 이를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남로당의 만행이 시작됐다. 4·3 폭동인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군대가 파묻고 간 총칼을 파내 무장하고 열성분자들을 골라 교육·무장시켜 소위 인민해방군이라는 부대를 조직했다. 초대 사령관에는 김달삼, 2대 사령관에는 이덕구가 임명되었다. 이들은 한라산을 거점으로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제주도 전 지역의 주요고지에 봉화를 동시에 올리는 것을 신호로 십 수개 소의 경찰관서에 습격을 감행함으로서 제주도민에게 엄청난 화를 불러왔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인민해방군 유격대에 참여한 사람은 김oo 한 사람뿐 이었으며 2~3명이 그들과 내통하여 정보를 제공하면서 밤에는 삐라를 마을의 곳곳에 뿌리고 집집의 대문에 붙이곤 했다. 날이 밝으면 경찰들과 마을 유지, 대동청년단원들이, 선거위원들과 합세하여 삐라를 제거하고, 밤이 되면 저들이 와서 다시 붙이고 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쯤에 인근 마을인 화북지서가 폭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경찰관과 양민이 살해당하는 참사가 있었고 그로 인해 밤낮으로 경비가 더욱 엄하여졌다.

그런데, 1948년 4월 27일 오전 11시경 어떤 정보를 입수 하였는지 이웃마을(화북2구)에 주둔한 경찰관 7명이 마을에 당도하여 선친을 비롯한 대동청년들과 같이 마을을 순시하다 김 모 집을 점검하는 순간 거물급으로 추정되는 폭도 한 명이 월담, 도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획한 것이 일본 군인들이 사용하던 대형배낭이었다. 제민일보가 발간한 “4·3을 말한다”의 2권 79쪽의 G.2보고서의 4월 상황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4월 27일 오후 4시 30분경 화북에서 마을리장이 납치됨. 같은 장소에서 경찰관은 인근 산악에 있는 습격대들에게 운반중이라고 믿어지는 일화 50만엔 상당의 긴급 물자와 약품을 압수, 6사단 4월 29일”

경찰관들은 대동청년들과 함께 선거사무소인 우리 집에 들렸다가 각기 떠나 갔다. 선친께서는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필시 뭔가 중대한 사태가 닥쳐올 것 같은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30분도 못 되어 와르릉 하고 울타리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을 포위했던 무장 폭도 20여 명이 집 안으로 쳐들어 왔다. 그들은 긴급물자(일화 50만엔)를 빼앗겼다는 폭도의 연락을 받고 이를 회수하기 위하여 우리 집을 급습한 것이다. 4·3 폭동 이후 폭도들이 대낮에 행동한 것은 우리 집 사건이 처음이라고 한다.

문창송씨가 발행한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소위 제주도 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를 중심으로) 37쪽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4월 27일 리 구장(里區長) 집에서 개(경찰)가 식사 중이라는 정보에 접하여 아 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개는 도주해버리고 반동 구장(區長) 1명을 포로해다가 숙청”

바로 나의 선친 오두현을 숙청했다는 기록인 것이다. 놈들은 아버지를 끌어낸 다음 눈에 보이는 생활용품과 의류 등을 챙기고는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아버지’를 개 끌듯이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다.

어머니는 맨발로 경찰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나는(당시 16세)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울부짖는 동생들을 껴안고 함께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다시 경찰들과 함께 왔으나 아버지는 이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해가 질 무렵 50여명의 경찰관 1개 부대가 사건 발생 보고를 받고 출동하였으나 맨발로 끌려간 아버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경찰관들은 위로의 말을 던지고 떠나버렸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청년들이 동조하며 모여들더니 경찰관들이 물러가자 그림자도 안보였다.

단지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와 가까운 친족 몇 분이 찾아와 밤을 새우며 바람에 흔들리는 문소리에도 혹시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아도 아버지가 안 돌아오자 필시 놈들에게 피살된 것으로 여기고 시체를 찾으려 할아버지와 친지들이 나서서, 놈들이 달아난 방향으로 구석구석 찾아 헤매었으나 허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동네는 완전 빨갱이 물이 들어 버렸다. 부락 사람들도 우리 가족을 보면 인사는커녕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잘못 했으며 아버지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막 대하는가. 의아심과 함께 분노의 싹이 점점 커졌다.

이런 가운데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혹시나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으로 산야를 헤매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피난 짐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날이 5월 9일이라 다음날 총선거를 못하도록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어머님과 상의했고, 그 결과 우리가족 모두 간소하게 차려입고 친척들의 틈에 끼어 따라 나서기로 했다. 피난처는 용강동 마을을 지나 소나무로 우거진 목장 지대였다. 그날따라 봄비는 계속 내려 온 몸은 비에 젖어 견디기 힘들었고, 모두가 밤을 지낼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리도 대충 소나무 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저녁도 간단히 지어 먹었다. 드디어 제헌국회의원 선거일인 5월 10일, 역사적인 총선거의 날이 밝았다. 산속이었지만 화창한 날씨였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끝내니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도 친지 틈에 끼어 약간 떨어진 곳에 집합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놈들의 아지트였다.

왜놈들이 버리고 간 99식 총을 메고 긴 칼(닛본도)을 찬 놈 등 50여명 정도가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제주읍 동남부(화북, 봉개, 삼양, 용강)출신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하북 출신 이욱X 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오현중학교 교모와 교복을 입고 왜놈장교가 신었던 장화구두를 신고 대검을 차고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그 후 귀순하여 토벌작전에 참여 했다가 6·25가 발생하자 해병대 3기로 지원입대한바 있고, 제대 후에는 제주 사회에서 저명인사로 등장해 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각 부락에서 모여든 사람이 너무 많아 집결하는데 시간이 걸려 한참 후에야 연설이 시작 되었다.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으나 나는 아버지 찾는데 정신이 팔려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정신을 잃어 버렸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 일을 도와주시던 송모씨가 나를 깨우며 정신 차리라고 흔드셨다.

내가 정신을 잃은 이유는 무장폭도 중에 우리 집에 습격 왔던 놈이 습격 당시 놈들이 훔쳐간 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어서 저 놈이 아버지를 죽였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을 잃고만 것이었다.

한편 나를 위로하는 송 모씨는 일본에서 공부하다 해방과 더불어 고향에 돌아와 선거관리위원으로 아버지를 돕다가 아버지가 변을 당하고 마을 전체가 놈들의 수중에 들어가자 하는 수 없이 마을의 민애청(민주애국청년회, 공산당 청년조직)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송 모씨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놈들에게 피살 되었다. 네가 살아야 원수를 갚을 것이 아니야, 네가 더 이상 여기서 발악하여 놈들이 구장 아들이라는 것을 눈치 채면 너 하나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그러는 순간 놈들의 선전 선동하는 연설도 끝나고 해가 질 무렵 귀가를 서둘기 시작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밤중이었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와 친지들에게 알리고 나니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그나마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가족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런 일이 38일째 되풀이 되던 날, 할아버지께서 가마니와 새끼줄을 챙기는 것이었다. 나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서로 알고 계신 것 같았다.

나는 무턱대고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는데, 집으로부터 약 2km 지점쯤 되는 아주 험한 소나무 밀림 지대까지 갔다. 38일 동안 아버지를 찾을 때 이 부근도 몇 번 거쳤지만 아무도 발견을 못했었는데 어제 할아버지가 이 부근에 왔을 때 악취가 풍겨 집히는 데가 있어 찬찬히 찾아 헤매다가 아버지가 처참하게 살해된 참상을 보게된 것이다.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참상의 현장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글로도 차마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 가족은 시신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장사 준비를 서두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누구 하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나 사람을 죽인 죄인이라도 이렇게까지 냉대를 할 수가 있을까.

가까운 친지들만 모여 내일의 장례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하고 같은 학교 2년 선배인 강수X와 1년 후배인 김운X가 찾아와 나를 대문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들은 가장 절친한 사이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다. 가뜩이나 사람이 없어 섭섭하고 곤경에 빠져있던 차에 친구들이 찾아와 주었으므로 반가운 심정으로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 돼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너 민애청(당시 공산당의 청소년 조직)에 가입하겠느냐”그 확답을 금방하라는 것이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는가, 아무리 사람 죽이는 일을 파리 죽이듯하는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어떻게 슬픔에 빠져있는 나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까지도 살아 있었고, 그들이 나의 가슴 속에 박아놓은 못은 지금도 녹슬지 않고 있다. 내가 죽어 시체는 썩을지라도 깊이 박힌 못은 썩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생존 시 나에 대한 죄책감에 마음이 편하지 못하게 살았을 것이다. 친구들의 심한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친척 몇 분의 도움으로 장례를 무사히 끝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그간에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왔다.

1년만 쉬고 중학교에 진학시켜 주기로 한 아버지와의 약속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셔야 할 소년가장이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남로당 조직원들의 공갈 협박에 못 이겨 남로당 산하의 민애청에 가입하게 되었다. 조선 인민공화국 깃발을 앞세우고 죽창을 어깨에 메고, 인민항쟁가를 소리높이 부르며 훈련을 받았다.

낮에는 마을 부근 높은 동산에 깃대를 세우고 경비(비깨)를 서면서 군인, 경찰 등 토벌대 접근을 조직원들에 알려 사전에 도피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밤에는 죽창을 들고 마을 골목길을 지키며 조직원들의 야간 활동(삐라 살포, 문서연락, 식량운반)을 도와주는 부역행위를 6개월 동안 하였다.

무덥고 공포에 쌓인 여름도 지나고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에 접어들면서 정부에서는 본격적인 폭도 소탕작전을 감행하였다. 국군이 전투에 가담하면서 중산간 부락민을 해변마을로 이동시키는 피난작전이 시작되었다.

폭도들은 우익인사 집을 골라 불을 지르고 식량을 약탈하는 악랄한 행동으로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 집은 제2의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의 작은 숙부는 형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경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중숙부는 대동청년단원으로 국군 토벌대를 지원하고 있는, 소위 놈들이 말하는 반동분자 가족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1948년 11월 16일 제주읍 영평상동에서 우익진영 가족(그들의 표현으로는 반동가족) 5명이 폭도들에 의해 피살되였다. (제민일보 ‘4·3을 말한다’1999년 8월 13일자 보도). 1948년 11월 16일 무장대에게 희생된 주민들은 바로 대청단원 가족들이었다. 무장대는 60대 노인과 부녀자 등 5명 가량을 대청(대한청년단)가족 혹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그 중에 우리 가족이 하늘 같이 의지하여 살아가려던 할아버지가 끼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또 겪게 된 것이다. 그 폭도들은 이웃 마을(봉개, 용강동) 출신들이며 그 중에는 할아버지의 외4촌(봉개동 임보기)이 끼어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막내 고모(오춘보 당시 25세)가 외5촌인 임보기를 붙잡고 삼촌(三寸)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하면서 매달렸으나 지금 이 마당에 삼촌이 어디 있느냐며 냉정히 뿌리치며 어디론가 할아버지를 끌고 가 살해했다.

다음날 새벽 할아버지의 피살 소식을 접하기도 전에 집 인근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밖을 쳐다 보니 10여명의 폭도들이 우리집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렸고, 놈들은 도망을 쳤다. 대동청년단원인 숙부가 전날 밤 할아버지의 피살 정보를 접하고 국군 토벌대를 대동하고 출동한 것이다.

숙부께서는 할아버지의 피살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제주시내로 피난 갈 준비를 서둘르라 했다. 우리는 피난 짐을 꾸리고 제주시내 삼도동 무군성 5촌(五寸)댁 창고 한구석을 빌려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나는 길지도 않은 기간에 죽을 고비를 3번 넘겼다. 첫 번은 무장폭도들이 우리 집을 습격할 때였다. 순경들이 30분 늦게 집을 떠났거나 폭도들이 30분 빨리 우리 집을 습격했다면 우리 집은 폭도와 경찰의 전쟁터가 되어 우리 가족은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둘째는 5·10 선거를 피하여 산으로 갔을 때였다. 아버지를 끌고 간 폭도를 목격하고 정신을 잃었을 때 놈들에 발견되었으면 여지 없이 살해되었을 것이다. 3번째는 1948년 11월 16일이었다. 할아버지가 피살 당하고 난 다음날 아침 폭도들이 우리 집으로 우리를 죽이려고 몰려올 때 국군과 숙부가 10분만 늦었어도 우리가족은 몰살 되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필자가 체험한 바로는 4·3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에 의하여 4·3 주도세력들로 하여금 1948년 5월 10일의 귀중한 선거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자유 민주국가를 세우는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무장한 유격대들이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살인·방화는 물론 선거관련 사무소를 기습하여 선거 관계자와 대동청년 단원 및 민간인 등을 납치 살해함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선거일 1~2일 전부터 주민들을 야산으로 강제 이동시켜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을 제외한 북제주군 2개 선거구에서는 국회의원을 선출하지 못하게 한 것이 바로 4·3 사건 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경찰지서를 습격하면서 폭동을 일으킨 남로당 폭도들은 1948년 5월 10일 선거일에 이르기까지 중산간 부락일대를 장악하고 주민들을 상대로 전단(삐라)을 날마다 배포하였으며, 남로당은 유격대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조직을 부락별로 편성하여 철저한 관리를 하였다.

(1) 자위대 : 죽창으로 무장하고 반동분자를 숙청하고 군, 경 토벌대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한 도로 파괴, 통신망을 두절하기 위한 전선주 절단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2) 민애청 : 청소년 조직으로 부락 주위 요소에 신호대를 세워 토벌대의 침투감시, 야간경비, 문서연락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3) 부녀동맹 : 부녀자 조직으로 재산 유격대를 지원하는 물자공급의 임무를 수행했다.

무장유격대들은 위의 조직원들을 부락이근 안전지대로 집합시켜 교육을 시켰는데 남로당이 내건 선전 구호는 다음과 같다.

(1) 제주도 유격대는 미 제국주의로부터 인민을 해방시켜 통일된 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미국은 식인종 국가이기 때문에 타격해야 한다.
(2) 5월 10일에 시행하는 남한만이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반대하기 위하여 적극투쟁할 것이며 연합국의 선거관리위원단은 즉시 철수하라.
(3) 민주통일정부 수립 전에 외국 점령군의 철수를 요구한다.
(4)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을 즉시 시행하고 사회보장제도의 마련을 요구한다.
(5) 노동자에게 1일 5합의 쌀과 노도자의 가족 및 일반인에게 쌀 1일 3합의 배급을 요구한다.
(6)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 배분할 것을 요구한다.
(7) 통치권을 인민위원회에게 양도하라.
(8)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와 같은 교육에는 무장한 유격대가 직접 주도하고 연사로 등장한 인물로는 당시 화북2구(거로마을)에 거주하는 제주여자중학교 학생 김O O씨(제주도청 고위직에서 퇴직한 강모씨의 부인)였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나와 열변을 토했다. 유격대의 주도자는 이욱행이었다. 그는 5·10 선거 당시 주민들을 산으로 몰아갔던 화북1구 출신이며 학생복에 오현중학교 모자를 쓰고 대검으로 무장하여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와 같이 그 당시 제주 4·3 사건 현장을 직접 체험한 조직원(민애청)으로서 일했고, 폭도들에 의해 선친과 조부를 잃은 피해자 가족이다. 이런 관계로 편견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이라 일축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오직 필자가 겪고 보았던 진실만을 말한다. 4·3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 오늘의 제주 4·3 특별법에 의한 희생자 심사결정은 너무 많이 편향돼 있고, 왜곡돼 있다. 위령공원조성, 진상조사보고서, 화해와 상생백서 등도 너무 많이 편향돼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쓰게 되면 왜곡된 부분이 노출될 것이 분명한데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인지 생각해야 할 문제다.

2001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의해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함에 있어서 위원장 국무총리 고건은 정부보고서 서문에서 “4·3 사건 진상보고서는 제주 4·3 특별법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과희생자 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 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 합니다.”라고 명시 했다. 이렇게 해놓고 진상조사보고서 536쪽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았다.

[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서문에서는 4·3 사건의 성격과 평가를 후대에 맡긴다고 해놓고는 결론에서는 4·3 사건의 성격과 평가를 명확하게 내놓은 것이다. 국가가 발행한 역사보고서를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속임수로 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건국의 시발점이었던 1948. 5. 10.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북한공산당 및 남로당의 전략 전술에 의거한 제주도 일원의 공산반란이었고, 무장유격대에 의하여 경찰, 군인 양민들이 피살되거나 상해를 입고 많은 재산상 피해를 입었던 것도 사실이다.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토벌대에 의한 양민의 피해도 많이 있었지만 인민유격대 역시 수많은 양민과 경찰 가족들을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고건 국무총리 주도로 작성한 4·3 진상보고서는 전적으로 왜곡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경찰, 군인이 폭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석 분별이 어려워 선량한 주민이 많이 희생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제주 4·3 사건을 ‘무장폭동’이 아닌 ‘무장봉기’로 표현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왜곡이요 날조라 아니할 수 없다.

2008년 12월 10일자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행한 ‘화해와상생제주4·3위원회 백서’설립배경(12쪽)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제주도민들은 1948년 미군정 시절 실시된 남한 단독선거를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영구히 분단시키는 선거, 라고 반대하고 나섰다가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4·3 백서는 또 제주도민이, 5·10 남한단독 선거가 남과 북으로 영구히 분단시키는 선거를 반대하다가 희생당한 영웅적인 사건이 4·3 사건 이라고 찬양했다.

위 표현들은 제주도민의 명예회복이 아니라 제주도민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불명예의 구덩이에 처박아 놓으려는 허위사실이다. 그 당시 제주도민은 5·10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사실이 절대 없다. 필자가 직접 체험한 바와 같이 제주 4·3 폭동은 5·10 선거 저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그래서 4월 말경으로부터 남로당 유격대와 자위대 등 남로당 폭력 조직들이 선거관계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주읍을 예로 든다면 동부 쪽으로 화북1구, 화북3구, 선거관리위원장을 살해했고, 남부 쪽으로 아라1구와 오등리 선거위원장 집을 습격하였으나 선거위원장이 출타중이라 그 가족(처, 노모, 어린자식)을 살해했으며, 서부 쪽으로 이호, 도평리 선거관리위원장을 살해하여 주민들의 공포분위기를 조성시켜 부락민들을 완전 장악하고, 5월 10일 선거일을 1~2일 앞두고 부락 주민들을 강제로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사실들은 현재 70대 이상의 제주도 생존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4·3 백서의 표현대로라면 희생된 제주도민들은 공산국가를 세우기 위해 피를 뿌렸다는 말이 되며, 그렇다면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다가 살해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한민국 국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라는 명예를 안겨줄 수있는 것인가?

필자가 그 당시 살해되어 영혼으로라도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1) 나는 억울하다, 참으로 억울하다, 내게 죄가 있다면 제주도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다.
(2) 나는 억울하다, 참으로 억울하다, 내게 죄가 있다면 나이가 젊었다는 죄밖에 없다.
(3) 그러기에 그들의 말을 들어야 했고 피할 길이 없었다.
(4)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시대를 원망한다.

그 당시 희생자들은 다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이런 표현이 희생자의 명예를 진정하게 회복하는 길이 아닌가 한다.

2011년 3월
오 균 택 (193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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