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주도의 1947년
제10장 제주도의 1947년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0.1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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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주도 공산화의 뿌리와 인민군 야산대의 태동

1946년은 대구폭동사건으로 마감됐다. 그리고 1947년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UN의 노력이 주를 이루었고 내륙 본토에서는 이렇다 할 폭동이 없었다. 그러나 제주도만은 1947년에도 영일이 없었다.

3월 4일 사건 : 이 사건은 4·3 사건에서 반드시 특별하게 기록 돼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이 날 경찰은 박운봉 등 수명의 형사를 보내 북초등학교 부근 김 모의 집에서 비밀리에 투쟁모의를 하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파업 주동 인물인 안세훈, 김용해, 오대진, 이도백, 조몽구를 비롯한 각 읍면대표 24명을 체포-연행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제주도 미군정의 경찰고문관 패드릿치 대위가 이들을 당장 풀어주라 했고 경찰은 이들을 3월 7일에 풀어주었다. 뚜렷한 증거 없이 사람을 무더기로 구속하는 것은 인권유린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을 구속하여 남로당 조직을 뿌리 뽑았다면 4·3 폭동은 물론 그 이후의 모든 제주도 피해를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24명이 제주도 반란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어설픈 판단이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3·10 파업 : 제주도 남로당은 3·1 사건에서 발생한 사망사건을 최대로 이용하기 위해 3월 5일, “3·1 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 김용관, 부위원장 김상훈, 조직부장 김용해, 선전부장 김영홍 등을 선임하고 투쟁방침에 대한 지령을 하달했다. 사건의 책임이 경찰에 있으므로 경찰이 민중에게 사과해야 하고,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했으니 경찰의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는 억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를 시행하지 않으면 전면적인 파업을 하겠다고 엉뚱한 시비를 걸었다. 한마디로 위장취업자들과 민노총들이 기업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 엉뚱한 트집을 잡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제목 : 3·1 사건 대책투쟁에 관한 건
발신 :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
수신 : 각 읍면위원회 야체이카
지령일 : 1947. 3. 7.

방침 : 1) 3·1 투쟁방침의 연장으로 대중투쟁을 위한 합법전취
           2) 미제 및 반동진영의 약체화에 대한 결정적인 최후 투쟁
           3) 제2혁명단계를 위한 정체성, 사상성, 무력성에 대한 준비
           4) 각 직장별로 파업단을 조직할 것

요구조건 : 1) 발포책임자인 강동호 경찰서장 및 발포경찰을 즉시 살인죄로 처단하라
                   2) 경찰 수뇌부를 즉시 해체하라
                   3) 경찰의 무장을 즉시 해체하라
                   4) 경찰에서 친일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최후통첩조건 : 위와 같은 요구조건이 3월 10일까지 관철되지 아니하면 3월 10일 정오를 기해 전도적인 파업을 단행할 것이다.

이 최후통첩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없자, 이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법원, 검찰, 경찰을 제외한 도청 및 전 행정기관, 학교, 은행, 교통기관 등이 총 파업에 돌입했고, 제주도의 전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연일 불법시위가 줄을 이었다. 이 하나의 사실만 보아도 제주도가 얼마만큼 좌익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장악되어 있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3월 10일의 파업을 단행하자는 아이디어는 남로당 대정면당에서 냈다. 면당 책임자 이운방은 면당 조직부장 김달삼으로 하여금 제주도당에 이 아이디어를 전달토록 했다. 바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달삼이 제주도당 주요 간부로 등장하게 되었다.

대규모 파업이 지속되자 3월 13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발 빠르게 250명의 육지 경찰을 대동하고 당도했다. 제주도민에게는 신속한 식량지원을 약속했고, 경찰에는 조속한 사태진압을 지시했다. 경무부장의 지침에 따라 중문경찰지서 경찰관이 3월 17일 남로당 민애청 위원장 강팽성 및 부위원장 김성추 등을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하여 지서로 연행해 갔다. 그러자 남로당원 70여 명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문지서를 습격하여 기물을 마구 파손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제주도가 얼마나 좌익화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3·1 사건과 3월 10일의 파업으로 인해 제주도의 행정기능이 총체적으로 마비 되었음에도 제주도지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3·1 사건 26일 만인 3월 26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제주도지사 관사에서 3·1 사건 수습을 위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나마 회의가 열린 것은 3월 13일의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도를 방문했고, 3월 17일, 중문경찰지서에 대한 일대 난동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열린 것이다. 실제로 1947년 3월의 제주도를 맡고 있던 제주도지사 박경훈은 남로당 당원이었고, 경찰의 고위 간부들 상당수가 공산당원 협력자들이었다.

1947년 4월 10일까지 남로당원 500여 명이 연행되었다. 500여명 중 260여 명이 재판을 받았고, 이 중 5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52명이 집행유예, 56명이 벌금, 168명이 기소유예, 나머지는 훈방 조치됐다. 한편 미군정에서는 도립병원 앞에서 총을 쏜 이문규 순경을 파면했고, 파업에 가담한 붉은 경찰 66명에 대해서는 직장 이탈사태로 파면했다. 1947년 3월 31일에는 제주경찰청장 강인수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김영배를 임명했다. 4월 2일에는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이 베로스 중령으로 교체됐다. 4월 10일에는 제주도지사 박경훈이 유해진으로 교체됐고, 경찰 고문관 패트릿지 대위는 레데루 대위로 교체됐다. 발포사건에 대한 엄중한 문책들이었다.

4월 15일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요구에 따라 제주도당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두 가지 사항이 결의됐다. 투쟁 목표를 5·10 단독선거 저지에 둔다는 것과 면 단위에 조직돼 있던 유격대를 모두 합쳐 중앙조직으로 이동하고, 연대 단위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격대를 이용하여 5·10 선거를 저지시키라는 남로당 중앙당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6월 6일에는 남로당 최초의 테러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3월 10일 이후 계속적인 파업이 이루어지고 제주사회가 혼미를 거듭하는 사이에 남로당은 세력을 확장할 목적으로 각 부락에 침투하여 불법집회를 감행했다. 세화지서는 6월 6일 밤 9시 구좌면 종달리에서 남로당원들이 불법집회(민청집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겨우 3명(김순형, 황종욱, 최한수)의 경찰관을 파견했다. 이렇게 안이하게 대처한 결과, 정부보고서에 의하면 이때 남로당원 200여명이 3명의 경찰관을 집단 폭행하여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수배자 71명 중 42명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했고, 주동자인 민청부위원장 부만옥을 4년형에 처했다.

1947년은 무장대 창설과 훈련의 해였다. 6월 6일의 엄청난 테러사건으로 인해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검거대상이 되자 주동자인 인민위원장 오대진과 김택수 등은 일본으로 도피하고, 3.1 사건 주동자인 안세훈이 목포를 경유, 북한으로 도망함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은 순전히 군사체제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해방군이 창설된 것이다.

남한만의 단선-단정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이룩하자는 명분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한 허위주장이었다. 이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고 있었던 시기는 1948년 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1946년 2월 8일, 이미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 놓고 토지 및 산업 국유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밀해제된 소련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북한에는 같은 해 10월 10~13일 사이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했다가 2개월만인 12월 17일에 북조선공산당으로 개명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 임시위원회 즉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같은 해인 1946년 11월 3일에는 북한 전인민이 참가하는 북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도-시-군 인민위원회 즉 도-시-군청을 이미 설치했다. 1946년에 이렇게 다 해놓고 공산주의자들은 무식 무지한 대중을 상대로 하여 거짓말을 퍼트렸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통일정부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미군정과 이승만이 욕심에 사로잡혀 통일을 부정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강행하려 했고, 이에 애국적인 제주도 도민 모두가 저항하여 항쟁에 나선 것이 4·3 사건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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