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부나비 같은 좌파 일생
제5장 부나비 같은 좌파 일생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0.0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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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소련의 대남공작과 남한 공산당의 뿌리

박헌영의 일생

공산주의자들의 일생을 보면 부나비와도 같다. 공산주의의 화신 박헌영은 1900년, 예산에서 태어나 현 경기고(경성고보)를 졸업하고 23세인 1922년 상해에 가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원으로 가입하고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표자회의에 참가한 후 국내로 잠입하다가 3월 25일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1926년 6·10 만세 사건과 관련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온갖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풀려나기도 했다.

박갑동 저 ‘박헌영’ 73쪽에는 박헌영이 미치광이 쇼를 어떻게 했는지 잘 묘사돼 있다. 그는 감옥에서 밥은 잘 먹었지만 미치광이 짓을 참으로 잘 했다. 1927년 11월, 박헌영은 두 차례나 목을 매 죽을 듯이 바동거려 간수들을 놀라게 했다. 수갑을 채우자 온몸으로 방안을 나뒹굴며 자해를 했고, 대변을 벽에 바르고 그것을 손으로 집어먹는 등 미친 쇼를 잘하여 보석에 성공했다.

그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남한 공산당조직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는 해방 후부터 1946년 10월 6일 월북할 때까지 6회에 걸쳐 월북하여 김일성과 단독회담을 한 바 있으며 1946년 7월 초에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로 불려가 스탈린에게 각각 정세보고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9월파업과 10월폭동을 지휘하는 등 폭력전술을 구사했다. 1946년 10월 6일 오전 8시, 그는 미군정의 체포명령때문에 장례식 대열로 위장한 운구차의 관속에 들어가 경기도 포천과 양문리를 거쳐 해주로 도망 갔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생다운 삶을 단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채 그는 54세(1953년 8월)의 나이로 그가 충성했던 북조선 황제 김일성에 의해 6·25 불법남침 전쟁의 실패 책임을 몽땅 뒤집어 썼다. 1953년 3월 11일 체포되어 3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1956년 7월 19일 방학세가 쏜 2발의 권총탄에 의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그가 55세에 희생당했을 때 김일성은 43세 였다. 그리고 남로당에서 박헌영과 함께 김일성에 충성했던 남로당 간부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박낙종의 인생

정판사 사건의 주인공 박낙종을 보자. 그는 1899년 사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에 심취했고,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지부를 재건하여 책임비서가 되어 공산주의 전파를 위한 기관지를 여러 개 발간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 때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 5년의 징역을 살았다. 1945년 8월, 박헌영에 합류했고, 1946년 정판사 사건을 일으켜 목포교도소에서 무기징역형을 살다가 6·25 전쟁을 맞아 총살당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삶다운 삶 한번 살아보지 못하고 51년의 인생 중에서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김달삼의 일생

본명은 이승진(굃承晉), 1924년 남제주군 대정읍 영락리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에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한 후 대구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였다가 아버지를 따라 도일,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교토 성봉중학교를 거쳐 도쿄 중앙대학 1년을 수료했다. 남제주군 대정면 안성리 출신인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인 강문석이 사용하던 가명 김달삼을 이어받고 그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다.

1946년의 대구폭동에도 깊숙이 개입했고,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대구시당 서부지역의 당세포조직 책임자로 활약했다. 그후 남로당 제주도당책과 군사부 책임자로서 4·3사건을 주도하다가 1948년 8월 2일, 제주를 탈출, 목포를 경유하여 그 해 8월 25일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이른바 “김달삼 해주연설”로 제주유격대 투쟁 상황을 보고하여 절찬을 받았고 월북한 주모자 일행 및 장인 강문석과 함께 소위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선 되면서 국기훈장 2급을 서훈 받았다.

1950년 강동정치학원 졸업생 300명을 이끌고 동해안 태백산으로 침투, 준동하다가 북으로 퇴각하던 중 1950년 3월 22일 오후 6시 태백산에서 8사단 22연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하지만 러시아측 보고서에는 김달삼이 1950년 3월말에 북한으로 돌아와 1950년 4월 3일에 노동당중앙위원회에 태백산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현재는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가묘로 안치돼 있다. 그의 장인 강문석은 북으로 가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노동당중앙위원회 사회부장, 전원회의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지만 6·25 전쟁직후 박헌영과 함께 숙청됐다.

이덕구의 일생

김달삼을 따라다니다가 제2대 제주도 인민해방군 사령관이 된 이덕구는 1920년생이었다. 그는 나이 27세에 그보다 4년 아래였던 김달삼의 부하로 들어가 한라산에서 3년의 인생을 험하게 보낸 뒤 1949년 6월 7일 그의 부하 허씨의 밀고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그는 같은 날 새벽 3시에 배를 타고 탈출하여 지리산에서 활동 중인 이현상과 합류하려다 제주읍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를 비롯한 경찰 5명과 민보단원 5명에게 포위돼 자수를 권유받았지만 총으로 대항하다가 벌집이 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가 6월 7일 살해된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이때 그의 나이 30 이었다. 북한은 그에게 국기훈장 3급을 서훈했고, 1990년에 제정된 조국통일상을 추서하였으며, 현재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가묘로 안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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