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4·3 사건의 성격
제15장 4·3 사건의 성격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0.27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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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4월 3일 인민유격대의 공격과 5·10 선거 방해작전

정부보고서가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2003년 4월 15일, 고건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4·3 사건의 성격 규정을 후대에 맡긴다는 것을 전제로 4·3사건이 반역적 무장폭동인지 또는 좌파들이 주장하는 바의 ‘인민(민중)항쟁’ 인지에 대한 정의를 규명하지 않았다. 진상 규명 기간에 있었던 뭇 회의에서 보여주었던 그 막강한 권세와 안하무인격인 독선을 자행하면서도 그리고 보고서의 내용이 모두 “제주 4·3 사건이 미군정과 경찰 및 서청의 만행에 항거하여 정당하게 일어선 ‘민중항쟁’이었다”는 취지로 작성되었음에도 정작 보고서를 발간하면서는 첫 머리에 차마 “4·3은 민중항쟁이었다”이렇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실 자체가 제주 4·3의 성격을 웅변해 주는 것이다.

그 보고서에는 남로당 무장폭도들이 저지른 사례는 거의 기술하지 않고 군, 경찰, 서북청년단 등 국가수호 세력이 저질렀다는 만행들이 읽기에도 지루할 정도로 천편일률 적인 패턴으로 기술돼 있다. 5·18 청문회에서 진실은 외면당하고 거짓들만 판을 치던 모습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박원순이 다듬어 만들었다는 이른바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결론에는 좌익 역사관이 교묘하게삽입돼있다. “무장봉기이긴한데 이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 이라는 요지의 결론인 것이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나선 박원순은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했다. “천안함 폭침은 북의 소행이긴 하지만 우리 정부가 북을 자극해서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북한에 아부한 적은 있어도 자극한 적은 없었다. 4·3 사건을 무장폭동, 무장반란이라 하지 않고 정당한 무장봉기라고 그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김대중 같은 골수좌익도 1998년 11월 2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 사건은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사건” 이라고 정의했고, 2010년 진실화해위는 “4·3 사건은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 이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했다.

북한이 4·3 사건 40주년 기념보고회에서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1988년 4월 8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제주도 4·3 인민봉기 40주년 평양시 보고회, 서울에서도”라는 제목으로 “지난 2일 공화국에서 평양시 보고회가 있었다”고 보도 했다.

“허정숙 서기 등이 참가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전금철 서기국장이 기념보고를 하였는데, 미국과 그 앞잡이들에 의해서 주도된 5·10 단선을 반대하여 일어선 제주도 인민의 4·3 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국 식민지 종속화정책과 민족분렬 책동의 분쇄,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애국적 무장 투쟁이었다고 지적하고, 그러므로 제주도민의 염원을 하루 속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미 자주화의 깃발을 높이 들고 조선반도를 비핵-평화지대로 바꿔놓는 투쟁을 가일층 펼쳐나가지 아니하면 안 된다 라고 강조하였다.”

평양에서 역시 4·3 사건을 단선-단정반대를 통해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무장투쟁이라며 4·3 사건이 ‘반역’이요 ‘반란’ 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북한의 4·3 전문가 박설영이 기고를 통해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박설영은 1991년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력사과학’ 4월호에 “5·10 단선을 반대한 제주도인민들의 4·3 봉기”라는 제목 하에 4·3을 적화통일을 위해 일어선 ‘인민봉기’라고 규정했다.

“8.15후 남조선 인민들은 새 사회 건설과 나라의 자주적인 독립을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왔다.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고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에서 선참으로 진행한 투쟁은 제주도 인민들의 4·3 봉기 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김일성 저작집‘ 4권, 376페이지)

북한의 4·3 전문가 박설영이 논문을 통해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박설영은 1991년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펴낸 ‘력사과학론문집’(129~192쪽)에 논문 “제주도인민의 4·3 봉기와 반미애국투쟁의 강화”를 게재했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단독 괴뢰정부 조작책동을 반대하여 벌린 제주도인민들의 4·3 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 책동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대중적인 반미 애국항쟁이였으며 성스러운 민족해방투쟁이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4·3 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자유와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반미애국항쟁이었으며 성스러운 민족해방투쟁이였다.”

4.3이 적화통일을 위한 ‘반미애국투쟁’이며 ‘성스러운 민족해방투쟁’이었다는것이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이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1982년 평양 조국통일사가 펴낸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117~122쪽에도 “제주도 4·3 인민봉기”라는 제하에 1948년 4월 3일부터 5월 9일까지 발생한 제주도 좌익반란 폭동의 내용들이 기술돼 있다.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만행들을 애국운동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제의 남조선단독선거를 저지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서 맨 선참으로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인민봉기 였다…제주도 인민들은 단독선거를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하여 3월 중순 경에는 일부 읍, 면, 리들에서 놈들로부터 빼앗은 무장을 가지고 인민자위대를 편성하였으며 전 인민적인 봉기를 준비하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나산의 련봉과 그 주변에서는 봉기를 알리는 횃불이 올랐고, 총소리가 련달아 울렸다. 봉기자들은 대담하고 기동적인 속공전술로 조천, 함덕, 삼양, 의도, 한림, 구암, 고산, 애월, 남원, 성산, 안덕, 중문, 대정, 무릉 등 14개의 경찰지서와 출장소 그리고 제주, 서귀포 경찰서를 비롯한 경찰 및 테러단의 숙소, 행정기관들을 습격 파괴하였으며, 수많은 악질경찰, 관공리, 반동 우두머리 놈들을 처단하거나 군중심판에 넘겼다. 이 첫 봉기에는 인민자위대를 선두로 한 로동자, 농민, 어민, 해녀, 목동, 학생과 사무원 등 3,00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그들 속에는 칠순의 백발로인과 애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봉기자들은 원쑤들에 대한 첫 타격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4월 4일에 재차 폭동을 일으켜 11개의 경찰지서를 습격, 파괴하고 14명의 경찰과 반동놈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미제는 국방경비대와 경찰을 증강하여 대량적인 학살과 토벌을 감행하여 나섰다. 이에 봉기자들은 대오를 인민유격대로 편성하고 3개 지대와지휘부 직속 특공대로 나누어 한나산을 근거지로 하여 놈들에 대한 타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4월 15일 적 기동부대 25명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준 애월면 광명부락 매복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전투와 단신 또는 2~3명으로 묶여진 무장 소조들에 의한 기습전투를 벌려 연속적인 타격을 안기었다.

봉기자들은 적군 와해공작을 전군적으로 벌렸다 그들은 국방경비대 안에 침투하여 5·10 단선의 매국적 본질을 해설, 선전하였으며, 그들의 민족적 양심을 불러 일으키며 “애국자들과 인민을 테러 학살하는 데 가담하지 말라, 인민들과 함께 반미 구국투쟁에 궐기하라”고 호소했다…그 결과 병사들 속에서는 인민의 편으로 의거하는 현상이 속출하였다.

4월 27일에는 국방경비대 제9련대의 한 개 중대 100여 명 군인들이 련대장놈을 처단하고 애국적 의거를 단행함으로써 제주도 인민들의 무장역량을 강화하고 적들 속에서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

적들도 놈들대로 선거놀음을 기어이 성사시켜 보려고 “5·10 토벌공세”를 준비하였으며 증강된 미군부대 외에 1,500여 명의 무장경찰, 3,000여 명의 국방경비대, 수천 명의 무장 테러단과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놈들은 대중학살과 초토화 작전을 배합하면서 도처에 학살장을 설치하고 무고한 인민들을 ‘빨갱이’, ‘산부대와의 연관자’라는 감투를 씌워 잔인하게 대량학살하였으며, 수십 개의 부락을 불태워 버리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5월 7~10일 사이에만도 5만425명의 애국 인민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적들의 토벌공세를 맞받아 4월말-5월초부터는 유격대의 무장투쟁, 대중의 폭동과 시위 등 각종 형태의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선거자 등록의 거부, 선거자명부의 탈취, 선거사무소의 습격, 파괴, 경찰과 반동의 처단 등과 같은 투쟁을 벌려나갔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인민유격대는 적에 대한 습격작전을 더욱 맹렬하게 벌렸는데 5월 애월면 장전과 수산 사이에서 있었던 전투, 5월 8일의 도순, 화순, 상.하 가리 전투 등은 대표적인 전투들이었다. 인민들은 낮에는 ‘벼락데모’ 밤에는 ‘횃불시위’를 벌였고, 5월 8일, 9일에 가서는 여러 공장 기업소의 로동자, 사무원들과 적 통치기관의 하급관리들까지 파업과 태업으로 선거를 반대하는 자기들의 립장을 표시하였다.

선거 날을 며칠 앞두고 약 5만여 명의 인민들이 한나산에 올라가 집단적으로 투표참가를 거부하였다. 산에 올라간 인민들은 횃불을 올리면서 기세를 높이었다. 봉기자들의 습격에 의하여 많은 선거구들에서는 투표함마저 비치하지 못하였으며, 선거자 명부는 거의가 탈취 당하였다. 단독선거가 감행된 5월 10일 새벽에 제주도 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칼과 몽둥이, 휘발유병, 낫과 망치, 돌과 삐라를 안고 원쑤들을 향하여 총 공격을 시작하였다. 봉기 군중은 제주시의 투표장으로 되었던 시청과 세무서, 신한공사 출장소들을 습격, 파괴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단선반대 결사반대를 소리높이 외치며 번개데모를 단행하였다.

유격대는 한나산에서 일제히 내려와 경찰지서 습격과 반동을 처단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날 외도, 고산, 무릉, 삼양, 제화, 도리, 화순, 남원, 위미, 아라, 중문, 함덕 등지의 수많은 경찰지서, 출장소들을 습격, 파괴하고 악질경관들을 처단하였으며 감금된 인민들을 구출하였다. 삼양경찰지서 습격에 참가한 60여명의 봉기자들은 견고하게 구축한 화점을 과감하게 까부시고 악질경관 3명을 처단하였으며 급보를 받고 달려오는 적 응원부대를 불의 습격으로 포위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비롯한 많은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봉기자들은 또한 평대, 안덕, 조천의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불태워 버렸으며, 국방경비대의 병영과 반동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 봉기 농민들은 토벌대의 기동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다리와 도로, 통신선을 파괴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제주도에서의 5·10 단선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미군정장관 띤 놈도 제주도의 선거무효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인민 봉기는 유격투쟁과 기타 각종 형태의 투쟁이 결합된 새로운 특징을 지닌 반미 구국투쟁이었으며 전체 도민 30만명 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 인민적인 항쟁이였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5·10 단선을 파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투쟁은 그 후에도 2년여에 걸치는 장기간에 피어린 항쟁으로 이어졌다.

위와 같이 북한의 모든 자료들은 제주폭동이 단선-단정을 저지하고 미국을 몰아낸 후 우리민족끼리 적화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무장유격대가 야수적인 방법으로 경찰, 관공서, 투표소를 공격하고 경찰과 반동들을 학살한 테러적 공격행위였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의 좌익들은 가만히 있는 제주도민을 미군정이 괴롭히고 탄압하기 때문에 이에 자위 목적으로 항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정의한 4·3 사건의 성격

“1948년 2월 7일을 기해 공산주의자들은 살인, 방화, 폭력, 파업, 시위, 뇌물증여, 폭동 및 혁명 사주, 협박 및 선전을 포함하여 어떤 수단으로든지 5월 10일 선거를 교란시키고 방해하며 UN 한국임시위원단을 한국에서 떠나게 하려는 강력하고 포괄적인 공작을 시작했다. 이 공세 전체가 평양에서 계획되고 보레시노프(동 시베리아 군사본부)와 모스크바로부터 지시받고 있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UN 한국임시위원회관계문서 I)

대검찰청 수사국의 “좌익사건실록”이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얼른 보기에는 쓸 데 없는 유혈인 듯한 제주 폭동은 ‘모스크바’의 눈으로 보면 크게 의미가 있고 이익이 있는 것이다. 제주 폭동의 목표는 결코 제주도를 점령한다거나 정말 그들의 소위 ‘단선, 단정’을 좌절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임을 모스크바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유혈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었는가? 첫째, 선전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보라! 조선인민은 죽음으로써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있지 아니 한가”하는 프라우다 지의 논평과 모스크바 방송의 하루 밤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공산주의에 현혹됐던 제주도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이해해 주다가 죽은 것이다. 둘째 남조선의 민심을 선동시켜 될 수 있으면 남조선 각지에도 제2, 제3의 인민봉기를 획책해 보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과거사위)와 김대중이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4·3은 공산당이 일으킨 모반 폭동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

“194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이른바 4·3 폭동사건은 해방 후의 사회혼란기를 이용하여 소수의 공산분자들이 순박하고 가난한 섬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제주도를 공산화하려고 획책한 무장폭동 사건이다”(비정규전사 1948. 5~1950. 6까지의 제주 4·3 폭동 공비소탕작전)

결 론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모든 공식 기록이 4·3 사건을 반미-반국가-친북-반단선단정-적화통일을 위한 폭동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한 좌익들은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좌경화된 사회분위기를 이용하여 이 모든 기록들을 뒤집고 있다. 저들은 4·3 사건을 순수하고 정당한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한다. 북한과도 연계되지 않았고, 남로당 상위조직들로부터도 아무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고, 낙후되고 고립된 제주도의 도민을 미군정이 학대하는데 반발하여 일어선 의로운 저항이라고 포장한다. 그리고 무장유격대와 무장유격대 편에 선 항쟁세력은 절대로 일반 민간인을 사살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살해된 모든 여성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장 공비들이 전투 훈련장소로 이용했던 제주시 동부 봉개동의 12만평을 떼어내 ‘제주 4·3 평화공원’을 건립하고, 그 안에 592억원을 들여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건립하여 온갖 왜곡된 내용들을 가지고 친북-반미-반대한민국 사상을 확산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화북리에서 마을의 유지들을 살해한 빨갱이 형제들의 위패도 “토벌대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불쌍한 사람”으로 둔갑하여 봉안돼 있다. 형인 김주탁은 제주 동북지역 유격대장을 하다가 김달삼과 함께 북으로 간 극렬한 좌익이고, 동생 김주영은 악질행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사살된 자다. 이 기념관에서는 제주 유격대는 절대로 양민을 학살하지 않은 반면 군경이 양민을 마구 살해했다고 선전한다.

1948년 9월 15일 제2대 유격대 사령관이 된 이덕구는 10월 24일에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어서 1948년 11월 2일 폭동주동자들이 한림에 주둔하고 있는 9연대 2대대 6중대를 공격하여 중대장 이하 14명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제주 4·3 사건이 급속히 확대됐고, 정부는 이를 내란으로 규정하여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에 제주인민군과 협조자들이 많이 죽었다. 그런데 정부보고서는 폭도들의 6중대 공격 사실은 빼버리고 계엄령이 선포된 것만 부각시켜 이 계엄이 불법한 계엄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이 계엄령 선포가 적법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결론적으로 기념관은 이승만과 군인과 경찰을 학살자로 표현하여 평화 기념관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반미 친북사상을 갖게 하고 국군과 경찰을 증오하게 만드는 학습장이 돼있다.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1946년 9월, 전국파업 그리고 이어서 대구로부터 시작한 10월폭동은 소련이 박헌영을 통해 일으킨 사건이었고, 소련은 이 두 사건을 지령하면서 일화 500만엔 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있다. 제주 4·3 사건 역시 남로당 중앙당이 내려 보낸 “3·1 기념 투쟁에 관한 지령”에 명백히 나타나 있듯이 “9월 철도파업과 10월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반동분자를 척결하기 위한 투쟁” 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1개 대대를 제주도 공비토벌대로 파견하는 순간 2개 대대가 총을 거꾸로 들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은 4·3 사건 당시의 사회적 성격을 웅변적으로 대변한 것이다.

이때 북한은 6.25 남침을 위한 대남역량을 조성하기 위해 오대산에 10차에 걸쳐 인민유격대 2,300여 명을 투입했다.(고재우 145쪽, ‘6.25 전쟁 전 공비 및 인민유격대 소탕작전’) 4·3 사건 역시 북한의 대남역량강화의 일환이었으며 김달삼이 4·3 무장봉기를 결정했을 때 명백하게 밝혔듯이 제주도를 남침의 교두보로 만드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만일 제주 4·3이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6.25가 터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대한민국은 남과 북의 2개 전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했어야 했다. 이렇게 명백한 4·3 반란사건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고 그 유족들에게 우리의 세금을 많이 퍼주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정부는 592억 원짜리 4·3 기념관을 반국가-반미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한 선전-학습장으로 활발하게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4월 3일 이전까지 경찰에는 토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단지 유격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자위적 조건반사적 대응이 있었을 뿐이다. 이 세상에 가만히 착실하게 살아가는 주민을 시스템적으로 괴롭히고 탄압하는 경찰은 없다. 대한민국 전체에도 이런 경찰은 없었다. 그런데 좌파들은 유독 제주도에서만 경찰과 미군정이 ‘얌전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제주 주민들’을 이유 없이 탄압해 왔다고 주장한다. 거기에다 서북청년단까지 제주도로 건너와 제주도민을 못살게 굴었다고 주장한다. 경찰과 서청 및 군정의 탄압이 있었기에 제주도 주민이 항거했다는 것이다.

제주도를 학살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측은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다. 가만히 있는 제주도 내의 경찰을 모두 싹쓸이로 제거하려 했던 것이 4월 3일 새벽 2시에 일어난 기습테러였다. 제주도의 비극은 경찰이 유도한 것이 아니라 소련-김일성-박헌영과 연결된 제주도 빨치산들이 일으킨 것이며, 이들이 9년 동안의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 주민들에 동조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도의 비극은 김달삼(1948년 당시 24세)과 이덕구(당시 28세) 같은 물불 안 가리고 영웅심에서 날뛰던 근본 없는 인간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4·3 유족회를 포함한 ‘4·3 역사’를 지킨다는 사람들은 4·3을 반란이라 하지 않고 통일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이요 민중항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4·3 유족들은 4·3의 영웅 김달삼을 욕하지 않는다. 북한도 욕하지 않고 김일성과 김정일도 욕하지 않는다. 반면 이승만을 저주하고 미국을 증오하고 군과 경찰을 매도한다.

제주도 인민군은 오각별이 그려진 인공기를 흔들고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인항가, 적기가, 빨치산가(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를 불렀으며 김달삼은 1948년 8월 25일 “해주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연설을 했고 연설 끝에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탈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다. 한림읍 옹포리 통조림공장굴뚝에 인민공화국 국기가 꽂혔던 사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통한다.

1948년 2월 17일에 결정된 제주도 민민전은 명예의장에 스탈린,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 우영준을 추대했다. 제주도 남로당과 인민군은 분명한 스탈린-김일성-박헌영 추종자들이었던 것이다.

1948년 2월 8일 김일성은 소련무기로 무장한 15만 인민군에 대한 창군식을 하면서 남조선을 해방시키자는 연설을 했고, 그 연설 말미에 “조선민족의 해방자이며 은인인 쏘련군대와 쏘련 인민과 그의 위대한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다 북한이 스탈린의 위성국이 된 것이다. 지금도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서 영웅으로 추대 받고 있는 김달삼과 북한의 김일성이 다 같이 위대한 령도자 스탈린 만세를 불렀던 반면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을 향해 이런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김일성은 스티코프가 선택한 34세의 강아지에 불과했고, 김구는 그런 강아지 앞에 설설 기었지만, 71~74세의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어수룩했던 미군정과 충돌하면서 자주정신으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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