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해방 공간의 제주도 프로필
제8장 해방 공간의 제주도 프로필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0.0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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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주도 공산화의 뿌리와 인민군 야산대의 태동

제주도는 동서 73㎞, 남북 41㎞, 둘레 298km, 면적이 1,840㎢이며 해안을 따라 촌락과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다. 섬의 중앙에는 해발 1,950m 높이의 한라산이 있고, 한라산은 동서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지만 남북으로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목포에서 141.6km, 부산에서는 286.5km 떨어져 있다. 해방 후의 인구는 276,000명, 이 중 80%가 좌경화되어 있었고, 이 중 남로당원은 6만여 명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통계다.

정부보고서인 ‘제주4·3사건진상조사 보고서’ 및 좌익들이 쓴책에는 해방직전까지의 제주도 인구는 22만으로 추정한다 했고, 정통 우파 쪽에서 쓴 책들에는 15만 정도였었다고 기록돼 있다. 좌익들은 제주도 인구가 해방 후 5만여 명밖에 늘지 않았다 주장하는 것이고, 정통적 역사를 쓴 사람들은 해방 직후 13만 정도가 늘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해방 이전에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 남한내륙, 중국, 중앙아시아 등에 나가 있다가 해방을 맞자 그리던 고국으로 대거 물밀듯 돌아온 것이다. 제주도는 해방직전까지 일본인 “오노”도사(島司)가 다스리고 있었고 일본 패망 후에는 김문희가 미군정의 지휘를 받아 엉거주춤하게 다스리고 있다가 1946년 8월 1일부터 전남으로부터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오늘의 제주도로 승격됐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초 일본군은 이 섬을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할 목적으로 제17방면군 예하의 3개 사단과 1개 여단 등 6만여 명을 배치했고 이로 인해 제주도에는 미군 전투기에 의한 폭격과 함포 사격이 끊이지 않았다. 400여 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주민 500여 명이 피해를 입게 되자 마을마다 방공호를 만들게 되었으며, 곡물을 공출당하고 있는데다 생필품이 부족하여 주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다.

해방을 맞아 돌아온 인구들 중에는 일본군에 종군했던 수많은 군인, 군속, 징용노동자 등 일본 군대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 중국에서 유격전 경험을 쌓았던 사람들, 좌익 과격파인 팔로군 출신들이 대거 들어와 한라산 무장대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고, 아울러 해외에서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지식인들이 대거 몰려와 주민을 좌경화 시키는데 앞장섰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어, 사상적으로 백지상태에 놓여 있었던 제주도 주민들의 머리가 이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매우 쉽게 점령됐던 것이다.

제주와 오사카 사이에는 5천 톤급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었고, 이를 통해 제주도 주민들은 공산품의 40%와 거의 모든 생필품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을 맞는 바람에 뱃길이 갑자기 끊기게 되자 생필품 공급은 물론 오사카에 나간 가족들이 보내는 돈이 끊김으로서 제주도 주민들의 생활이 갑자기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바랐던 해방이 막상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자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궁핍해진 것이다. 선동과 선전과 모략에 능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구조적인 빈곤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며 주민들로 하여금 공산주의를 동경하게 만들면서 미국을 적대시하도록 선동했다.

제주도에는 해방된 지 44일 후인 9월 28일에야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긴 했지만 한동안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9월 10일,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의 제주지부(의장 오대진)를 조직하고, 9월 22일에는 이를 개편하여 제주도 인민위원회(인공)를 결성했고, 동년 12월 9일에는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했다. 발 빠른 좌경화였던 것이다. 1947년 2월 12일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했고, 동년 2월 17일에는 “3.1절기념 제주도 위원회”를 결성하여 투쟁체제로 전환했다. 동년 2월 23일에는 행동조직인 민민전(또는 민전,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 위원회를 결성한 후 산하조직을 확장하여 사실상 제주도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른바 ‘인공’의 시대가 제주도에서도 열린것이다. 특히 민전 제주도위원회는 2월 23일 결성시 명예의장에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허헌, 김원봉, 유영준을 추대함으로써 제주도 민전이 소련-북한-남로당의 지휘선상에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선량하고 순박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섬사람들을 인권이니 토지무상 분배니 하는 달콤한 말들로 선동했다. 동네마다 친척들과 사돈으로 이리저리 얽혀진 제주도 주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다단계식으로 넘어가 순식간에 공산주의로 물들어 갔다. 이에 비해 일제시의 경찰병력은 101명으로 매우 적었고, 여기에 더해 미군정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며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치했다. 이러한 관계로 제주도 도민의 80%가 좌경화되었고 좌익분자들의 본성인 폭력과 파괴 책동으로 인해 행정기능이 마비됐다.

이에 더해 무장세력이 판을 쳤다.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봉의 사위인 김달삼(1924년생)이 제주도 인민유격대(인민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500명 정도의 유격대가 형성되어 무장을 갖추고 훈련을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한라산에 매립한 무기와 탄약을 찾아내어 무장을 갖추는 한편, 민병대보다 못한 제9연대를 병기창고로 활용하면서 팔로군 출신들로 하여금 그들이 중국에서 사용했던 유격전술을 가르치게 했다.

1949년 6월 7일, 제2대 유격대 사령관인 이덕구가 경찰에 의해 사살될 때 경찰에 입수된 극비 상황일지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초기의 유격대 총 인력은 100명, 자위대 인력은 200명, 사령관 김달삼 직속부대로 편성된 특경대(필자 주:정보수집, 유격대의 출동안내, 특수임무 수행)는 20명으로 전체 320명이었고, 이들이 보유한 병기는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유격대는 김달삼이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여 직접 지휘하는 기동부대이고, 자위대는 마을에 은신하여 유격대와 군중을 연결하면서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는 반동들”을 극비에 처단하고, 정보수집, 식량보급, 유격대 결원시 인력을 보충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유격대와 자위대는 공히 소대-중대-대대로 편제되었고, 각 소대는 10명, 각 중대는 2개 소대로, 각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성했다. 유격대는 제주읍, 조천, 애월, 한림. 대정, 중문, 남원, 표선 등 8개 면에 조직됐고 무장대는 이 편성으로부터 점점 확장되어 갔다.

가장 왕성할 때의 무장병력은 500명 정도였다 하지만 169개 마을에 10명씩 배치된 마을 자위대 1,700명 정도를 포함하면 총병력은 2,200명 규모에 이르렀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남한이 곧 공산화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제주도를 장악하려 했다. 경찰력과 행정력을 공격하고 그들에 반대하는 우익인사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그들은 경찰은 ‘검은개’, 경비대는 ‘노랑개’로 호칭하고 그들의 노선에 반대하는 우익인사들을 ‘반동분자’로 호칭했다.

일제시대 때 제주도에는 경찰이 101명 있었다. 일본인이 50명, 한국인이 51명이었다. 일본사람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제주도 경찰은 1947년 2월 당시 330명으로 충원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경찰은 물론 전국 경찰조직을 일제가 운영하던 그대로 두고 운영했다. 경찰 임무는 아무나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 되어 있고, 노하우가 있고, 보고서를 쓸 줄 알고, 그 지역을 파악하고 있는 경험자여야 수행할 수 있었다. 해방 후의 문맹률은 90%를 넘었다. 그러니 누가 당시의 치안을 책임진다 해도 무정부 상태인데다가 좌익들이 날뛰는 험악한 상황 아래서는 치안을 일본경찰에서 경험을 쌓은 경찰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20년대부터 일본 경찰은 일본 본토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공산주자의자들을 사냥했다. 공산주의자를 무자비하게 사냥하기로는 미국도 매 한가지였다. 따라서 경찰은 제주도에서 확산되는 공산주의 파괴활동을 천성적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3.1 사건이 발생하자 타 지역으로부터 100명의 응원경찰이 도착했고 4월에는 550여 명으로 증원됐다. 뒤를 이어, 해방 후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월남한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 500여명을 제주도에 보내 좌익계열을 제압하도록 하여 좌익계에 대한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폈다. 그리고 1948년 4·3 폭동 직후에는 육지로부터 약 1,600명 정도가 증원되어 제주도 경찰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의 75% 정도가 타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경찰이라는 존재는 당시 제주도 주민들에게 낯선 이방인들로 비쳤다.

미군정청은 1945년 11월 13일,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국방군 창설을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5개월 과정을 졸업한 110명의 졸업생 중 87명이 일본군 출신이고, 만주군 출신이 21,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군을 창설하려고 했던 미군정청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국군 창설 계획을 보류하고 그 대신 하지 중장의 재량으로 치안유지 차원에서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언어 공세에 밀리기만 한 것이다.

1월부터 서울(1연대), 대전(2연대), 이리(3), 광주(4), 부산(5), 대구(6), 청주(7), 춘천(8)에 총 8개 연대가 창설됐고, 같은 해 8월 1일 제주섬이 전라남도로부터 분리 승격함에 따라 11월 16일, 제주도 모슬포에서도 제9연대가 창설되었고, 초대 연대장에 장창국 소령이 임명됐다.

각 연대는 그 지역 출신들을 모병하여 병력을 채우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9연대는 1947년 3월부터 적극적인 모병활동을 개시 했다. 그해 10개월 동안 8회에 걸쳐 많게는 80명, 적게는 40명씩 1기생으로부터 8기생까지 모병한 결과 1948년 1월 당시의 9연대 병력은 겨우 400명 정도 되었다. 그 후 제주도 청년들만 가지고는 연대 병력을 채울 수 없어 경상도와 전라도 청년들을 모집함으로써 4·3당시의 9연대 병력을 800명 선으로 늘어났다. 창설은 했지만 먹거리를 비롯해 보급이 경찰에 비해 열악하여 수제비를 먹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모병된 청년들 중에는 내무생활이 싫다며 도망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좌파가 득세하던 제주에서는 “국방경비대(국경)는 미국의 용병” 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경찰은 9연대를 오합지졸이라며 멸시했다.

미군정이 이념중립을 선포함에 따라 국경은 신원조사 없이 모병을 했기 때문에 국경에는 좌익들이 대거 입대했다. 남로당은 국경에 프락치들을 잠입시켜 군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국경과 경찰 사이를 이간질 했다. 이로 인해 9연대는 초기 한동안 토벌에 적극적인 경찰과 마찰을 일으켰다. 1947년 4월 22일, 제주신보에는 9연대 모병광고가 게재돼 있었는데 모병의 핵심 문구에는 “국경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 “나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립이다”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이며 좌익들도 환영한다는 광고 메시지였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듯 어지러운 데도 해방 직후의 우익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으로 분열돼 있어 이러한 혼란과 갈등을 바로 잡을 세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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