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1946년 9월 총파업
제6장 1946년 9월 총파업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0.0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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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소련의 대남공작과 남한 공산당의 뿌리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을 방문한 박헌영은 전평에 10월 총파업을 지시했다. 하지만 9월 6일에 남로당 핵심당원 이주하가 체포되고, 9월 7일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인민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좌익 신문들이 정간되자, 소련 지도부는 앉아서 당하기보다는 빨리 선수를 쳐야 되겠다는 생각에 10월로 계획 했던 총파업을 갑자기 9월로 앞당겼다.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이 9월 총파업은 소련의 명령과 지도 및 자금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9월 총파업은 소련이 일화 200만 엔을 내려 보내 일으킨 계획적인 폭동이었기에 북한은 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1982년에 발간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 나타난 자료만 보아도 우리 자료보다 더 상세하다.

당시 남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어려워 쌀값이 며칠 사이에 60배로 뛰어 오르는 등 국민 대부분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에 실시된 쌀 배급제라는 것은 미군정이 쌀을 모아 균등하게 배급하려는 정책이었지만, 예상보다 절대량이 부족했다. 이를 놓고 공산당은 백성들을 선동하기 위해 미군정의 탓으로 모함했다. 9월 총파업은 미군정을 모함하기 위해 날조된 유언비어와 거짓 선동으로 시작 된 것이다.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의 66~73쪽에는 “남조선로동운동자들의 9월 총파업”이라는 소제목으로 9월 총파업의 실상이 소개돼 있다. 여기에 소개된 파업실상을 아래에 요약 소개한다.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10월 인민 항쟁으로 이어지는 대중적 항쟁은 미군정의 철폐와 인민정권수립이라는 정권투쟁의 요구를 내세우고 진행된 전인민적투쟁이었다. 로동계급은 절박한 생활문제 해결은 ‘정치적인 해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강력한 정치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9월 초순에는 전평 및 16개 산별 노동조합 대표자 회의에서 ‘남조선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이어서 남조선 전역의 기업소, 공장들에서는 종업원회의를 열고 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파업투쟁위원회’는 정치 선동 및 선전 사업으로 사상적 준비를 진행했다.

총파업에 대한 통일적 지휘를 위해 16개 산업별 파업투쟁위원회들이 결성되었고,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삼척, 마산, 군산 등 산업 중심지역에 지역별 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는 9월 15일에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미군정청에 들이대고 9월 23일까지 화답할 것을 요구했다. 1)노동자, 사무원, 모든 시민들에게 하루 3홉 이상의 쌀을 배급하라 2) 물가 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3) 모든 실업자들에게 집과 일과 쌀을 달라 4) 공장폐쇄 및 해고 절대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일체 반동테러를 배격한다 5)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로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6)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7) 언론, 출판, 시위, 집회, 결사,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8)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대안’(필자주 :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즉시 철회하라 9) 해방일보, 조선인민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들을 석방하라 10)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라 11) 미군정을 즉시 철폐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12) 소미공동위원회를 속개하고 즉시 민주조선독립을 실현시켜라. 이런 요구가 미군정에 의해 거부되자 총파업투쟁이 철도노동자들을 선두로 시작됐다‘.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는 9월 24일 0시를 기해 ”전민족을 구출하고 생존과 자유의 길을 열고 자주독립을 위하여 4만 철도로동자들을 선두로 사생존망의 민족적 투쟁을 시작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7,000여명의 부산지구철도로동자들이 열차운행을 중지시키고, 부산에서 사상역에 이르는 30리 구간에는 운행을 중지한 열차가 쌍줄로 꽉 들어찼다. 서울에서는 경성철도공장 3,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오전 9시를 기해 직장별로 종업원회의를 열고 파업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울역 노동자들과 함께 용산기관구를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용산기관구 농성자 수는 1만 3,000명이 넘었다. 서울, 부산, 광주, 목포, 대구, 안동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등 모든 철도가 마비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의 뒤를 이어 체신, 전기, 금속, 광산, 해운, 교통, 운수, 화학, 식료, 섬유, 토건, 출판, 일반봉급자들이 모두 동참했다. 서울의 중앙전신국, 중앙전화국, 중앙우편국을 비롯한 25개 체신기관 4,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지방의 체신노동자들도 동참했다. 이로써 남조선의 우편, 전신전화망이 일체 마비되었다.

경성전기회사 노동자 3,000여명도 파업에 돌입했다. 각 항구의 해운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전국적으로 26만 3,974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9월 30일 이른 새벽, 미제침략군의 지휘 밑에 탱크를 앞세운 무장경찰 4,000여명과 테러단이 용산기관구로 들이닥쳤다. 육박전이 4-5시간 동안 계속됐다. 미제는 40여명의 노동자들을 살상하고, 1,700여명의 노동자들을 대량 검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상의 북한 자료는 네이버 백과가 정리한 내용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결국 9월 총파업은 파업을 주도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1945년 11월 5일 결성한 조선공산당 산하 노동운동단체)의 패배로 마감됐지만 대구에서는 그 파업의 불씨가 살아나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10월 1일부터 시작 된 폭동은 약 40여 일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 폭동 역시 소련이 일화 300만 엔을 퍼부어 기획-지휘한 폭동이었다. 참고로 9월 총파업을 분쇄하는 데에는 경찰은 물론 김두한이 이끄는 주먹들의 공헌이 컸다. 김두한은 남로당의 전위대였다가 마음을 돌려 공산당을 때려잡는데 앞장섰던 주먹계의 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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