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4·3 역사의 왜곡 행로
제27장 4·3 역사의 왜곡 행로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1.2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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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좌익세력과 노무현정부의 역사왜곡

이상에 기술된 것은 증거있는 사실들이며, 위 대부분에 대해서는 좌파들도 인정하는 부분이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의 지휘 하에 북한과 연계된 인물들이 저지른 반란사건이다. 그런데 지금은 4·3 사건이 불의에 항거 한 민중항쟁이요, 통일운동이요, 민족해방운동이요, 민주화운동으로 둔갑해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에 골수좌파들이 이렇게 뒤집어 놓은 것이다. 제주시 동부 봉개동에는 ‘4·3 평화공원’이 있고, 그 안에 ‘4·3 평화기념관’이 있다. 공원에도, 기념관에도 ‘4·3 사건’에 대한 정식 명칭이 없다. ‘사건’이라는 단어 대신에‘평화’라는 단어가 어정쩡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제주 4·3 사건에는 이제까지 많은 명칭이 붙어왔다.

‘제주 4·3 사건’(남한책)
‘제주 4·3 폭동사건’(남한책)
‘제주 4·3 반란사건’(남한책)
‘제주 4·3 무장봉기사건’(남한책)
‘제주 4·3 인민항쟁’(남한책)
‘4·3 인민봉기’(북한책)
‘4·3 인민항쟁’(북한책)
‘4·3 반미구국투쟁’(북한책) 등이다.

2010년 11월, 대통령 직속기구인 과거사위 즉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이영조)는 4·3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정의 했다. 이것이 정답이다. 김대중 역시 위 과거사위의 평가와 같은 평가를 했다. 김대중은 1998년 11월 23일, CNN과의 인터뷰를 했다.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 좌파들에는 거짓의 DNA가 있다. 그래서 좌파들은 김대중의 위 발언을 인터넷에 이렇게 소개 했다.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 CNN과의 인터뷰 내용에서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 이라는 부분을 떼어낸 것이다.

김대중의 위 발언이 있는 후 4·3 사건의 왜곡작전이 급물살을 탔다.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4·3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2000년 1월 12일 법률 제6117호로 제정 공포되면서 이른바 4·3 특위(제주 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에서의 진상조사가 가동됐다. 4·3 위원회 구성은 다음과 같다.

당연직 : 국무총리(위원장), 국방, 법무, 행자, 복지, 예산, 법제, 제주지사(8명)
위촉직 : 강만길, 김삼웅, 김점곤, 김정기, 박재승, 박창욱, 서중석, 신용하, 이돈명, 이황우, 임문철, 한광덕(12명)
소위원회 : 총리, 국방, 법무, 김삼웅, 김점곤, 신용하, 간사 박원순(7명)

위 4·3 위원회(제주 4·3 사건진상조사 및 명예회복위원회)는 2000년 8월 28일에 구성됐다. 위 구성을 보면 국무총리를 비롯한 당연직들은 모두 노무현이 임명한 정부요원들이라 모두 거수기에 불과했다. 오직 위촉직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광덕, 김점곤, 이황우 세 사람을 빼면 모두 다 4·3 사건을 뒤집는 쪽으로 적극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진상조사는 진상위가 구성된 2000년 8월 28일부터 시작됐어야 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조사위 구성일자보다 3개월 이전인 2000년 6월 1일부터 나서서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 보이지 않는 세력은 6월 1일부터 6개월 동안을 접수기간으로 정하고 ‘모든 희생자는 신고하라’는 식의 마구잡이식 접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후 신고기간을 3개월(2001.3.1~5.31) 연장하여 총 9개월에 걸쳐 모두 14,028명의 희생자를 접수했다.

신고가 완료(2001.5.31)될 때까지도 누가 억울한 희생자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심의규정이 없었으며, 언급 자체가 없었다. 이로 인해 14,028명 중에는 참으로 희한한 사람들이 다 포함돼 있다. 응당 죽어야 할 수천의 폭도들이 희생자로 둔갑하여 이 14,028명에 포함돼 있고, 살아 있는 사람도 희생자, 최근까지 수명을 이어오다가 자연사 한 사람들도 희생자, 일본과 북으로 도망가 천수를 다 누리다 자연사 한 폭동주동자들도 희생자, 폭동의 지역대장으로 마을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북으로 간 사람과 그와 동조한 가족들도 희생자로 등록돼 있다.

심지어는 명예회복이 필요 없는 4·3 관련 국가유공자(대한민국 훈장 수상자)들과 당시의 군인 및 경찰출신이 신고를 했는가 하면 유죄확정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던 수형인들까지도 억울한 희생자로 등록돼 있다. 경찰출신으로 고급훈장까지 받은 사람도 억울한 희생자가 돼 있었다. 이 신고자에게 직접 확인해 본 즉 참으로 어이없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나서서 “4·3 명예회복 대상자에 일단 포함되어야만 차후에 5.18의 경우처럼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며 선동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등록된 14,028명이라는 숫자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이런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저지른 사기 행위요, 좌파들이 저지른 사기 행위인 것이다. 이 14,028이라는 숫자는 모두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던 2001년 5월 31일에 결정됐고, 2003년 4월 29일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일명 정부보고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10월 15일이 보고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민간위촉 9명의 위원 중 보고서 내용의 편파성을 제기한 3명이 탈퇴했다. 한광덕, 유재갑(먼저 사퇴한 김점곤 후임), 이황우 였다.

노무현은 후보시절, 대통령에 당선되면 4·3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직접 사과할 것을 공약했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정권이고, 이승만 정부는 정의를 짓밟은 기회주의가 득세한 정부’라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 공약은 그가 대통령이 되면 4·3 역사를 뒤집어 놓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이 집권하자마자 2003년 4월 29일에 발행된 580쪽의 ‘4·3 사건진상조사보고서’ 안은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 변호사)이 작성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박원순은 골수 좌익이다. 바로 박원순-강만길-김삼웅 등 골수좌파들이 작성한 ‘정부보고서 안’이 2003년 3월 21일, 심의를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4·3 위원회에 회부됐다. 이때 경찰 측 위촉위원인 이황우 위원과 국방부 측 위촉위원인 한광덕(예비역 소장)은 보고서 안이 1) 무장폭동을 정당화 했고, 2) 신고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과정 없이 그대로 ‘희생자’로 등록했고, 3) 집필진 4명의 구성이 좌편향 인사들이라 매우 부당하다는 이유를 내걸어 심의를 유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감사원의 감사가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진상조사를 최일선에서 담당하는 팀을 보면 그림이 더 명확해 진다. 수석전문위원에 양조훈(제주사람, 유족측), 전문위원에 나종삼(육사 21기, 전북) 장준갑(전북 유족측) 김종민(제주 유족측) 박찬식(제주 유족측), 그리고 전문위원을 보좌하는 조사위원에 김애자, 장윤식, 김은희, 조경희, 배성식, 박수환, 현삭이, 민은숙, 부미선, 김정희, 정태희 등 11명인데 이 중 대부분이 제주도 출신이다. 이 중 나종삼 위원은 보고서가 채택된 다음날인 2003년 10월 16일 사퇴했다.

4·3 보고서 초안 집필진 4명 중 팀장 포함 3명이 유족 측이고, 양조훈은 좌익이며, 초안을 검토하는 기획단 위촉직 10명 중 유족 측이 7명이었으며, 수정안을 검토하는 보고서 심사 소위원회의 위촉직 5명 중 유족 측이 4명이었고, 보고서를 통과시키는 위원회의 위촉직 12명 중 유족 측이 9명이었다(조사전문위원인 나종삼 위원 증언).

위와 같이 집필은 4명이 담당했는데 그 중 3명이 제주출신이고, 1명은 군 출신(육사21기 나종삼)으로 구성돼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군 출신의 집필범위를 극히 제한한 것이다. 군 출신은 4·3 사건 중에서 오직 6·25 이후 상황에 대해서만 집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채용조건에까지 명시돼 있으며 군출신은 4·3 사건의 핵심을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노골적이고도 계획적인 책략이었다. 이에 두 사람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그래서 보고서 안에 대해서는 1주간의 검토 후에 재심하기로 했다.

3일 후인 3월 24일, 잠정적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 참석했던 김점곤 위원(국방부가 위촉한 합참 전 대간첩작전본부장, 경희대 교수)은 진상조사보고서가 피해 중심으로 집필된 사실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좌파 중심으로 구성된 소위는 김점곤 교수의 이의신청을 묵살했고, 결국 김점곤 위원은 사의를 표명한 후 소위원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1주 후인 3월 29일, 4·3 위원회가 속개됐다. 진상조사보고서 기획단장인 박원순은 국방부의 수정요구가 대부분 반영됐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경찰측 대표 이황우와 국방부측 대표 한광덕 위원이 수긍하지 않았다. 이황우 의원은 무장대의 “폭동”을 “봉기”로 표현했고, 군경의 작전에 대해서는 ‘초토화’ ‘궤멸’등의 과장된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한광덕 위원은 2001년 9월 27일에 발표된 헌법재판소의 4·3 특별법 위헌소원 결과를 가지고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관 9명 중 2명은 4·3을 ‘반란’으로 규정했고, 7명은 ‘폭동’으로 표현했는데도 불구하고 박원순이 주도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안)에는 4·3사건의 성격을 “반란”이나 “폭동”이라 하지 않고, “무장봉기”로 탈바꿈해 있으며, 이는 역사의 왜곡이자 헌법재판소가 규정한 ‘4·3 사건’의 성격까지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심사는 또 다시 지연됐다. 벌써 3번째 였다. 신용하 위원이 나쁜 중간자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의 수정안을 일단 승인하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6개월 내에 수정·보완 하자’는 매우 이상하고 의혹스러운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국방장관을 대신하여 참석한 국방차관은 추가수정을 완료할 때까지 보고서 채택을 보류하자는 역제안을 했다. 하지만 국무총리 고건은 신용하 위원의 제안을 수용하고 말았다. 독도 문제라면 앞장 서왔던 신용하 교수, 4·3에 대해서만은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였다. 제주 4·3 위원회 전문위원인 나종삼과 신용하 사이에도 분쟁이 있었다. 나종삼의 조선일보 기고(2003. 10. 15)에 대해 신용하가 거짓이라고 반발한 것이다. 신용하 교수가 분명 좌익편을 들었다는 것이 사퇴한 위원들의 한결 같은 말이다. 이황우는 사퇴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20여 개 기관 및 단체에서 정부의 진상보고서(안)에 대해 376 곳에 걸쳐 수정의견을 제출했지만, 위원장은 어떤 내용이 제기 되었는지 조차 전체회의에 제시하지도 않았고, 이황우 위원이 전체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 했지만 바위에 달걀치기로 묵살됐다. 결국 4·3 사건은 남로당에 의하여 일어난 무장폭동이 아니라 경찰의 발포로 일어난 무장봉기로 왜곡됐다(이황우의 사퇴서에서).

보도에는 보고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4·3 위원회가 언론에 거짓말을 제공했고, 언론은 무책임하게 이를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54개군 관련단체와 20개 경찰 관련단체가 376건의 수정의견을 내 잘못됐거나 왜곡된 부분을 지적했지만 모두가 묵살됐다. 그래서 이황우와 한광덕 두 위원은 ‘합의 의결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만장일치였다는 말인가? 결국 2003년 8월 15일, 박원순이 주도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안)은 ‘만장일치’가 아니라 ‘강압적인 일사천리’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노무현은 2003년 8월 31일 직접 제주도로 날아가 과거의 정부를부정하는 역사반란을 일으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는 ‘역사쿠데타’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4·3 사건이 ‘정당한 민중항쟁’이었다면 항쟁에 앞장 선 김달삼과 이덕구는 ‘가장 명예로운 희생자’로 부각-칭송되어 희생자 명단의 가장 앞자리에 기록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14,028명의 희생자 명단에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없다. 이 두 사람은 북한에서 각기 국기훈장 2급과 3급을 추서받고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1.5m 높이의 흰 대리석 묘비를 안고 가매장되어 있다.

제주 4·3 사건이 ‘정당한 민중항쟁’이었다면 그들을 토벌한 군과 경찰은 ‘국가폭력배’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당시의 군·경을 ‘국가폭력배’로 규정한다는 말만 쏟아냈지 인민군 유격대를 토벌한 군·경을 격하 또는 처벌하지 못했다. 진압과정에서 전사한 군인 180명, 경찰 153명은 지금도 제주 ‘충혼묘지’에 유공자 자격으로 안치돼 있고 해마다 6월 6일 현충일에는 도지사-제주시장 등 정부 대표자들이 모여 형식적이었지만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조용했던 제주도를 뒤집어 놓은 인민군 유격대도 유공자가 되고, 국가 안녕을 위해 이들 반역자들을 토벌한 군·경도 유공자가 된 것이다. 지금도 대학 입시에서나 취업 일선에서 제주도 반란군측 자손들은 유공자로서의 모든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며 이에 더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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