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3·1절 기념행사를 빙자한 남로당의 파괴 선동 공작
제9장 3·1절 기념행사를 빙자한 남로당의 파괴 선동 공작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10.1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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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주도 공산화의 뿌리와 인민군 야산대의 태동

1946년 12월 12일자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남조선에 애국자라는 명칭의 비합법적 비밀조직을 조직하여 파괴활동을 하고, 삐라를 통한 선동작업을 전개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46년 11월 23일, 모든 공산당 조직들이 남로당으로 단일화 되면서 남로당은 소련의 이 파괴-선동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앙당 위원은 여운형, 박헌영, 백남운, 허헌이었으며, 중앙당 상위의 391명 중 제주도를 대표하는 위원은 3명, 이 중에 강문석이 들어있었다. 강문석은 김달삼의 장인이자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이었으며 북으로 가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노동당중앙위원회 사회부장, 전원회의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지만 6·25 직후 박헌영과 함께 숙청되었다.

곧 해가 바뀌자 남로당 중앙당은 1947년 초부터 전국에 걸쳐 계획적이고도 본격적인 파괴-선동 투쟁을 전개해 나갔고, 이는 제주도에도 여지 없이 이어졌다. 2월 초 남로당 중앙당은 스티코프의 지령을 받아 전국에 “3·1 절 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을 하달했고, 제주도당이 이 지령문을 받은 날은 2월 16일이었다. 지령문에는 3·1 사건의 성격이 규정돼 있다. 3·1 투쟁은 9월 철도파업과 10월 항쟁(대구폭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반동분자를 척결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투쟁에 활용할 표어가 3·1투쟁의 성격을 웅변한다.

1) 학원을 민주화 하라
2) 진보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3) 정권을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4) 박헌영 선생의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5) 민주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6) 남녀평등법령 즉시 실시하라
7) 근로인민은 남로당 깃발 아래!

이 지령을 받은 다음 날인 2월 17일, 제주도에서는 안세훈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로당의 전위대인 ‘제주도 민민전’이 결성되어 중앙당을 통해 지령된 스티코프의 대남공작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3·1 절 기념행사를 투쟁과 선동의 수단으로 삼았다. 1947년2월26일(수), 제주신보에는 “각종사회단체 참가하고, ‘민전’ 성대히 결성-의장단에 안세훈씨 외 2씨 추대-”라는 제하의 기사가 있다. 안세훈이 등단하여 ‘3천만 동포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소련을 지지한 것이다.

이 결성회에서 제주도 민민전은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 우영준을 추대하고. 이어서 광주시 남로당 결성대회에 격려메시지를 보낼 것, 박헌영의 체포령 취소와 투옥된 열사들을 즉시 석방할 것, 일체의 배급권을 인민의 손에 넘길것. 요구조건을 불승인하면 지방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서한을 하지 중장에게 보낼 것을 결의했다. 한마디로 제주도 민민전은 소련-김일성-박헌영을 연결하는 지휘계통 선상에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강인수 경찰청장은 2월 23일, 안세훈 등 투쟁위원 5명을 경찰청으로 초치하여

“3·1절 기념행사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방침이 있다. 행사는 각 직장, 읍면, 리 단위로 하되 반드시 허가를 맡아서 하고 시위는 못하게 되어 있으니 질서 있고 평온하게 해주기 바란다.”

이런 요지의 당부를 했다. 그런데도 안세훈은 대규모 시위 준비를 계속했다.

이에 미군정 장관 스타우드는 2월 28일 자신의 사무실로 안세훈 등을 초치하는 한편, 경찰청장 강인수, 경찰고문 비드린치, 제주경찰서장 강동호 등을 부른 자리에서 안세훈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내일 3·1절 기념행사에 조천, 애월, 한림 등지의 군중들을 제주읍내로 집결시켜 과격한 시위를 감행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회 질서가 혼란케 될 우려가 있으니 읍내 시위는 절대 안 되며 대중을 동원하여 행사를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면 제주읍내를 벗어나 다호부락 북쪽인 서비행장에서 치러주기를 바란다.”

이에 안세훈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3월 1일이 되었다. 제주 민전은 서쪽으로부터 동쪽에 이르기까지 3만 여명의 군중을 제주읍 북국민학교로 동원했다. 장소에 비해 군중이 너무 많아 넘쳐난 군중은 이조 관헌이었던 관덕정 앞 광장 즉 제주경찰서 앞 광장에까지 가득 메웠다. 관덕정은 제주경찰서와 이웃해 있고, 북국민학교와의 거리는 불과 직선으로 50~60m에 불과했다. 9시가 좀 넘자 제주도당위원장 안세훈이 참모 및 당원들을 인솔하고 제주 북국민학교에 나타났다.

군중들은 이곳으로 집결하기 전에 각 지역에 미리 모여 지역별 행사를 개최했다. 오현중학교에서도 행사가 있었고, 다른 지역들에서도 사전 행사들이 있었다. 제주도민 김하영의 수기에 의하면 화북초등학교에서도 사전 행사가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양지명 이라는 초등학교 ‘자원봉사교사’의 인솔 하에 옛 음조의 애국가, 적기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고, 조선독립만세, 김일성장군 만세, 신탁통치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열기를 고조시킨 다음에 관덕정으로 집결했다.

제주도 남로당은 북국민학교에 설치된 무대에서 중앙당으로부터 지시된 표어의 내용들이 담긴 삐라를 뿌리고 군중을 선동하여 흥분시켰다. 군중 속에서도 옳소 옳소 하는 소리가 나게 하여 군중무드를 더욱 고조시켰다. ‘인민공화국수립만세’라는 만세삼창이 끝나자 누군가가 단상으로 올라가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하자” “경찰이 불응하면 강력한 실력으로 대응하자” 이렇게 외치자 대중들은 “옳소, 옳소”를 연발한 후 4~5명씩 한 손으로는 어깨동무를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앞 사람의 허리띠를 붙잡고 ‘왔샤 왔샤’구령소리를 내면서 뱀처럼 S자를 그리며 경찰서를 향해 위협적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은 숫적으로 상대가 안되는 소수의 경찰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주었다.

대나무로 말의 항문을 찔러 아파하는 말이 날뛰어 어린아이 건드려

교문을 나서서 대오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행렬은 경찰서를 향해, 다른 행렬은 감찰청(경찰청)을 향해 노도와 같이 진격했다. 경찰서가 유린되고 제주 경찰청의 전신인 감찰청이 위험에 빠졌다고 판단한 경찰은 이를 해산하기 위해 기마경찰대를 다급하게 내보냈다. 이들이 군중들 사이에 길을 뚫자 남로당의 기발한 공작이 나타 났다. 깃대로 사용하던 대나무 막대기를 임영관 순경이 탄 말의 항문을 찌른 후 말을 마구 때렸다. 갑자기 상처를 입고 매타작을 당한 말은 통제할 수 없이 날뛰었다. 성인들은 피할 수 있었지만 어린아이는 미처 피하지 못해 상처를 입고 비명을 질렀다. 바로 이 장면이 전문가의 공작이 이끌어낸 장면이 아닐까 한다.

이에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기마경찰이 사람을 죽였다” “저놈 죽여라”함성을 지르며 임영관 순경 외 1명의 경찰관들을 끌어내려 집단폭행을 가한 후 경찰서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경찰서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경찰들은 경찰관 2명이 집단폭행을 당하는 모습에 먼저 겁을 먹었고 이어서 경찰서를 향해 몰려드는 군중들의 위세에 위협을 느껴 자위수단으로 총을 발사 했다. 전쟁공포증의 발로였다. 특히 총을 쏜 경찰들은 대구에서 10.1 폭동을 경험했던 경찰관들이라 이들 시위대들은 믿지 못할 집단이며 순식간에 폭도로 변할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이로 인해 시위군중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제주 도립병원에는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지원)경찰이 교통사고로 입원하고 있었는데 응원경찰 2명이 그를 경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서 근방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가 된 6명을 군중들이 들것에 들거나 부축하여 도립병원으로 들이닥쳤다. 대구사건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비참하게 죽은 것을 목격한 응원경찰 이문규 순경은 군중들이 도립병원을 습격하는 줄로 알고 공포감에 총을 쏘아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래서 부상은 8명으로 늘어났다. 상호불신과 적대감이 불상사를 부른 것이다. 공산당의 전문 수법은 시체장사인데 갑자기 6명의 시체가 생겼으니 제주도 남로당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그야말로 큰 횡재가 된 것이다. 파괴 및 선동작전을 펴라는 스티코프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한 매우 귀한 소재가 생긴 것이다.

시체장사! 1970~80년대에 위장취업자들은 전태일을 효시로 17명의 인간 불화살을 만들어내 폭동의 불쏘시개로 이용했다. 누구라도 경찰에 고문을 당하다가 죽으면 이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최상의 시체장사꺼리가 됐다. 5·18 때도 시체장사를 톡톡히 했다. 광주시위대는 5월 21일 새벽에 광주역에서 총에 맞고 난자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시체놀음을 했다. 김재화(25)와 김만두(44)의 시체였다. 이 두 시체는 무기고에서 나온 카빈총, 즉 시위대가 탈취한 소총에 의해 사살된 시체였지만 시위 현장에서는 계엄군이 쏜 것으로 뒤집어 씌웠다. 광주시민들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두 시체는 시위대에 끼어든 불순분자들이 작전상 쏜 것이었다. 필자는 “솔로몬 앞에선 5·18”에서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분명이 왔을 것이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결론을 냈다. 광주에 북한이 전문특수전 집단을 보내지 않았다면 광주 일원 전체에서는 물론 전라남도 17개 시군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작전들이 그토록 조직적으로 진행될 수는 없었다. 제주4·3폭동에서는 제주에서 자라난 빨갱이 영웅들이 있어서 이들이 작전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5·18에서는 지휘자가 전혀 없다. 이 세상에 지휘자 없는 봉기는 없다. 5·18 지휘자는 바로 북한특수군이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18일에도 250여 명의 학생들이 전남대 교문 앞에서 줄을 지어 서있는 공수대원들에게 먼저 일제히 돌을 던져 공수대원 7명에,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흐를 정도의 큰 부상을 입혔고, 전우들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본 다른 공수대원들이 보복에 나서 몇몇 학생들을 구타했다. 이를 놓고 역사를 왜곡하는 좌파들이, “공수부대가 한 손에는 대검, 다른 한 손에는 ‘철봉이 들어 있는 살인용 곤봉’을 가지고 시민들을 호박처럼 찌르고 피를 튀길 정도로 때려 죽였다”는 식으로 침소봉대하여 시민들을 선동했다. 5월 19일, 불과 2명의 광주시민이 죽었는데도 유언비어는 40명이 죽었다고 선동했다. 1980년 5월 19일, 광주폭도들은 휘발유가 떨어져 고립돼 있던 장갑차 뚜껑에 불타는 짚단을 계속 올려 놓았다. 그 안에 있던 승조원들은 열을 이기지 못했고 드디어 소위가 뚜껑을 열고 일어서서 반사적으로 발포를 했다. 이게 광주에서의 첫 발포였다. 이렇게 하지 않는 군대는 죽어야 하는 군대가 아니겠는가? 4·3 당시의 경찰들도 이런 자위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3월 1일에 발생된 6구의 시체들은 남로당이 조직을 확장하고 군중을 더욱 선동하는데 가장 좋은 자양분이 됐고, 이를 구실로 한 선동은 3·10 총파업과 4·3 사건으로 비화됐다.

3·1절에 대한 평가가 평가주체마다 다르다.

3·1 절의 성격에 대해 정부보고서, 강준만의 책, 제민일보의 책, 북한 책들은 같은 화음을 낸다. 북한책은 1882년에 나온 “주체의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과 1991년 북한의 박설영이 쓴 “제주도인민의 4·3 봉기와 반미애국 투쟁의 강화”(과학백과종합출판사가 발행한 ‘력사과학론문집’)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제민일보가 쓴 책은 1994년의 “4·3은 말한다”이고 강준만의 책은 2002년 11월 16일에 발간된 “한국현대사산책”(인물과사상사) 그리고 정부가 낸 보고서는 2003년 12월 15일에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와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그리고 고건-박원순-김삼웅-강만길 등이 주도한 ‘정부보고서’는 북한이 발간한 두 개의 책을 그대로 수용하여 반영한 것들이다.

고건과 박원순 등이 주도한 정부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4·3 사건의 시작과 원인을 3.1 사건인 것으로 설정했다. 3·1 절 기념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제주경찰서 인근 광장에 운집한 3만여 명의 도민에 경찰이 발포를 하여 6명이 사망하게 된 데에서 분노를 느낀 도민들이 무장대를 만들어 스스로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항쟁이 4·3 사건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쟁점이 들어 있다. 하나는 과연 6명의 사망자와 8명의 부상자를 발생케 한 원인제공자가 경찰이냐 아니면 안세훈을 위원장으로 하는 “3·1 절 기념 제주도 위원회” 이냐에 대한 쟁점이고, 다른 하나는 과연 4·3 사건으로 불리는 제주도 무장폭동이 1947년의 3.1 사건에서부터 촉발되었는가에 대한 쟁점이다.

1) 3.1 사건 사상자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3.1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시위자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좌파들은 이 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시위대가 아니라 구경꾼이었다고 주장한다. 시위대를 쏜 것은 정당한 공권력 행사이지만 구경꾼을 쏜 것은 공권력의 남용이라는 논리인 것이다. 당시의 시위대는 각지에서 조직적으로 모여든 3만명이고, 구경꾼은 불과 수십-수백 명에 불과 했을 동네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 보고서를 쓴 좌익들은 경찰들이 시위대는 무서워 쏘지 못하고 시위대가 사라진 후에 엉뚱한 구경꾼들만 쏘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5년이 지난 지금 좌파들은 이들 사상자 14명이 시위자들이었는지 순전한 구경꾼이었는지 무슨 수로 규명했다는 말인가? 경찰들은 가장 위협적이라 판단되는 무리들을 향해 발포를 했을 것이고, 위협적인 존재에 대한 발포는 형법에 규정된 정당방위이며, 지금도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경찰관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시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발포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피해자들은 선량하고 무고한 시민들’ 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앞으로의 모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못하게 하려는 장기적인 심리전 전략인 것이다. 지금이나 그 때나 경찰 및 군의 발포는 본능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향하여 발포하게 돼 있다. 총알을 맞은 14명은 구경꾼이 아니라 시위자들이었고, 시위자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돼 있던 핵심 시위그룹에 끼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데 대해 좌익들 말고는 이의를 달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47년 3월 1일 당시 제주도 전체의 경찰력은 330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00명의 응원 경찰이 추가로 와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으로 경찰 병력이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찰이 100명 더 있었다 없었다 하는 문제는 문제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좌익들은 초점을 흐리기 위해 이런 가지치기 수법을 많이 사용한다. 3·1 기념 행사를 빙자한 시위는 제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지방도 제주도에 응원 경찰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주도 전체에는 24개 파출소(지서)가 있었다. 그리고 특히 제주읍에는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곳곳에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관덕정 앞에 있는 제주경찰서와 감찰청(제주경찰청)에는 잘해야 각각 20명 정도의 경찰들이 배치돼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설사 수십 명의 경찰이 당시 제주경찰서에 대기하고 있었다 해도 30,000명 정도의 시위대가 경찰서를 향해 적기가를 부르고 김일성 만세를 부르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뱀처럼 S자의 행진을 해오면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경찰이라 해도 자위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80년 당시 광주에서도 공수부대는 숫적으로 밀려 이리 뛰고저리 피하며 매타작을 당했다. 불과 4-5명 단위로 서 있던 공수부대원들에 대해 수백명의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낮과 도끼로 위협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불타는 드럼통을 굴리고 대형차를 공수부대를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시켰다. 자위적 발포가 있고 난 다음부터 비로소 소수의 공수대원들은 중과부적의 시위대로부터 당할 수밖에 없었던 ‘집단살인’을 면할 수 있었다.

3.1 사건에서의 경찰 역시 중과부적의 시위대로부터 극한적인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놓고 3·1 사건에 대해 좌파들은 발포 경찰의 일부가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어리어리해서 시위대가 다 흩어진 다음 불과 200명 정도의 구경꾼을 향해 발포를 했다고 주장한다. 경찰이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어리어리해서 3만명이 경찰청을 향해 위협적으로 몰려올 때는 사격을 하지 않고 있다가 그 3만 명이 다 흩어지고 200명의 구경꾼들만 있었는데 그 200명을 향해 발포를 해서 14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극히 비정상적인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정부보고서인 것이다.

2011년 8월 29일, 서울시 좌파 교육감 곽노현이 2010년 6월 2일 선거에서 좌파 경쟁자 박명기에게 7억원을 주기로 하고 후보를 단일화했던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좌파정치권까지도 일제히 나서서 교육감을 사퇴하라 압력을 가했지만 곽노현은 그만의 세상에 침잠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2억원 정도 준 것은 인정으로 준 것이다” “제가 배우고 가르친 법은 인정이 있는 법이자 도리에 맞는 법입니다. 합법성만 강조하고 인정을 상실하면 몰인정한 사회가 되고 그것은 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좌익들의 논리는 이렇게 생철 깡통을 우그리듯이 어지러운 궤변으로 일관돼 있다. 문제는 이런 궤변에 놀아나는 무식하고 정신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이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이들의 로봇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찰의 발포가 없었는데도 3만 시위대가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진 헤어졌다는 것은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이변일 것이다. 좌파들과 정부보고서는 3·1 집회가 불법집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보고서 자체가 불법집회임을 인정하고 있다. 정부 보고서 자체도 안세훈 등이 경찰청장 강인수와 미군정장관이 집회를 불허했는데도 집회를 강행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피해자를 유발한 측은 민민전 공산당원들이고, 경찰은 임무 수행중 당연한 권리인 자위권을 발동했을 뿐이다.

2) 4·3 사건의 시작은 어디인가?

4·3 사건의 시작은 3·1 사건이 아니라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북한에 먼저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세워놓고 남한까지 흡수하려고 적화통일 공작을 획책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1946년 12월 12일자 스티코프 비망록에 기록돼 있는 대남공작 지령문은 남한에 비밀조직들을 만들되 조직의 이름은 ‘애국자’ 라는 인식을 갖도록 지으라는 것이었고, 파괴활동과 삐라에 의한 선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9월 파업과 10월 폭동도 파괴와 삐라에 의한 선동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고,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공산당의 모든 책동들도 파괴와 삐라에 의한 선동을 내용으로 했다. 4·3 사건은 소련의 대남공작 시리즈의 한 부속사건이었던 것이다.

1947년 3·1절 이전에 이미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제주도 주민의 80%를 장악한 상태에서 소련과 남로당의 지령을 수행할 준비를 차곡차곡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만 해도 3·1 사건 이전에 좌익들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은 단순한 폭력사건들이 아니라 소련과 남로당 중앙당과 연결된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이며 주체가 있는 사건들이었다. 1921년부터 꾸준히 야체이카(세포) 조직들을 설치하여 제주도 주민의 80%를 좌경화시켜 놓은 행위들은 제주도에서 폭발할 화산의 잠재력을 충만하게 배양해 놓은 공산당의 전투준비들이었다. 3·1 사건은 단정, 단선을 저지하기 위한 소련의 전략과 소련의 지령에 의해 남로당 세력들이 수도 없이 방화했던 화재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남로당은 3·1 사건을 대중선동의 불쏘시개로 삼아 1947년 한해를 역량확대와 인민유격대 양성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전 제주도 경찰과 우익들을 일거에 숙청하기 위한 무장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좌파들과 정부보고서가 3·1 사건을 4·3 폭동의 시발점으로 보려는 이유는 위 14명의 사상자에 대한 책임을 경찰에게 돌림으로써 4·3폭동을 정당화하려는 데 있다. 3·1행사 참가자들은 평화적이고도 준법적인 시위를 끝내고 돌아갔는데도, 경찰이 시위와는 무관한 구경꾼들을 향해 발포를 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후부터 제주도 주민들이 자위책으로 무장을 갖추고 무력을 사용하게 된 것 이라는 궤변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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