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개관한 조엄기념관은 그리많이 알려져있지 않아 찾는 관광객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진으로 조엄기념관을 소개한다.
위치 :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웃말길46
지정현황 : 강원도 기념물 제76호
이용료 : 무료
조엄기념관
2014년 11월 개관한 조엄기념관은 조선에 고구마를 들여와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셨던 문익공(文翼公) 조엄(趙曮) 선생의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문익공(文翼公), 조엄(趙曮)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구마를 들여오다.1763년(영조39년)에 조엄 선생이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로 배명(拜命) 받고 서울을 떠나 10월 6일 대마도의 좌수나포에 머물다가 고구마를 발견하여 종자를 부산진(釜山鎭)에 보냈다.1764년(영조 40년) 돌아오는 길에 2차로 고구마의 종자를 반입하여 조선에 재배토록 했다. 1차로 보낸 고구마는 재배에 실패하였지만, 2차로 보낸 고구마는 성공에 이르러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데 초석이 되었다.조엄 선생의 호는 영호(永胡)로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풍양(豊壞)이며 1719년생으로 아버지 조상경 역시 이조판서를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민생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지평, 수찬 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창을 설치해 조세 부담을 줄이는 등 공을 세웠다. 통신정사로 파견되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의 보관법과 재배법을 익혀 최초로 우리나라에 고구마 종자를 전파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구황작물로 활용하도록 했다.
기근(饑饉)으로 물든 당시 조선의 상황
기(饑) 곡물이 익지 않는 것,근(饉) 채소가 익지 않는 것.16~17세기의 조선은 전쟁으로 농토의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소빙기의 영향으로 저온, 우박, 서리, 폭설, 홍수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경신대기근(1670~71)에는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100만이 넘었으며, 경상도에서만 도민의 4분의 1이 기근으로 한 달 동안이나 굶주렸다. (현종개수실록/헌종12년) 영조 말기에 권농의 장려에도 불구하고 흉년은 계속되었으며 농민은 점점 빈곤해졌다. 조엄이 통신정사로 파견될 1763년에는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에서도 기근민이 크게 발생하여 영조는 기근민을 불러 참상을 듣고 자신의 반찬을 줄일 것을 명하고 전국의 조세 탕감을 시도하고, 쌀을 풀어 기근민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통신사의 정사(正使)가 되어 선진 문명을 전달하다
조선통신사는 국왕의 명으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 사절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일본은 동을 가져오고 우리는 쌀과 콩, 목면과 조선의 대장경, 범종 등의 문명을 전하는 경제적 이유로 조엄 선생이 파견된 1763~4년에는 일본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통신정사에 조엄 선생이 부사에 이인배, 종사관에 김상익이 임명되었으며 이를 따르는 인원이 480명 내외에 이를 정도였다. 통신사 일행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동래부를 거쳐 대마도에 파견된 뒤, 오사카를 지나 막부의 장군이 있는 에도에 도착하여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서화, 시문, 글씨 등을 남겼으며, 이는 병풍, 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다. 일행은 국내로 돌아와 현지에서 겪은 일을 모아 책을 완성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해사일기』이다.
내용출처 : 원주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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