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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한나라당 유력대선주자 '대선출마'선언 ⓒ 이화자^^^ | ||
국가관과 애국심으로 선진국 도약 기적 이루겠다.
박 전 대표는 “현 정권이 무너뜨린 대한민국을 바로 세워서, 5년 안에 선진국에 진입하는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면서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확실한 국가관과 애국심으로 위기의 나라를 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기적을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며 출마의 변을 밝혔다.
그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그 정신을 이어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대통령의 자제가 대통령에 도전한 것도, 또한 여성이 대통령에 출마를 하는 것도 처음이다.박 전 대표는“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럽기를 소망한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는 나라, 아이 키우는 것이 걱정 없고, 나이 드는 것이 불안하지 않은 나라, 열심히 일한만큼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세계가 투자하고 싶고, 일하고 싶고, 살고 싶은 나라, 그런 대한민국을 목표를 새기면서 이 자리에 섰다.”며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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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극기는 박근혜님만 지킬수 있습니다. ⓒ 이화자^^^ | ||
‘줄푸세운동’으로 경제를 확실히 살려 놓겠다.
또 자신의 공약인 "‘줄푸세운동’으로 세금과 정부의 규모는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와 사회 제도를 바로 세워서,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확실히 살려 놓겠다."며 "작지만 유능한 미래형 정부를 만들어 21세기에 맞는 국가 비전과 전략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21세기 국가경쟁력은 사람’이라며 사람에 투자하고 사람을 아끼는 정책, 교육혁명과 과학기술 혁신으로 다가오는 21세를 준비해서 먹고 사는 문제와 교육문제를 해결, 가난의 대물림을 막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또한 대북정책으로는“남북이 공동 발전할 수 있는 통일의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논의하고 치열한 경제 전쟁, 국가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면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새로운 선진한국을 건설에 동참, 이념화합, 세대화합, 지역화합으로 국민 대화합으로 번영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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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대선출정식장' 입장 ⓒ 이화자^^^ | ||
박근혜 전 대표는 최고 권력자의 딸로, 그리고 퍼스트레이디로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했던 18년의 청와대 생활은 그에게 '원칙과 신념', '애국과 애족'을 핏속의 DNA처럼 체화되게 만들었다.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감당하기 힘들었던 인고의 18년을 보내면서는 강인함을 배웠다. 위기의 순간에 발휘해온 놀라운 정신력과 근성의 원천이 된 셈이다. 박 전 대표가 문과였지만 대학(서강대) 입학 시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자공학과(70학번)를 선택하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박 전 대표는 당시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인 김완희 박사가 청와대에서 부친을 만나 '우리나라가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공계를 지원했다고 술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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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의 고통을 모르면 하늘이 버리신다. ⓒ 이화자^^^ | ||
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 전 대표는 그해 8월15일 어머니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전해듣고 급거 귀국했다.육 여사가 8.15 경축식장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절명한 것.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큰 충격을 받은 박 전 대표 였지만,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을 틈도 없이 22살의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 대행을 시작했다.이후 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그는 5년여간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대행했고, 이 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조국,민족,국가라는 단어들이 깊이 각인됐다고 한다.79년 10월26일 박 전 대표는 또 다른 슬픔을 겪는다. 바로 부친인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고가 일어난 지 몇 시간 뒤인 27일 새벽 1시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관저로 올라와 잠자리에 들어있던 박근혜 영애를 급히 깨운 뒤 박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전했다. 이 때 그의 첫 마디는 "지금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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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당원과 풍선 ⓒ 이화자^^^ | ||
한나라 이회창 대선 유세지원 벌이며 정치 입문
박 전 대표는 97년 11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대선 유세 지원활동을 벌이면서 사실상 정치 활동에 입문했다.하지만 그의 공식 정치활동은 지난 98년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97년 IMF 경제위기로 위기에 빠진 국가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정계입문의 변이었다.박 전 대표는 2000년에는 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등을 차지하며 부총재로 당선됐지만 2001년에는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 상향식 공천, 당권.대권 분리 등 '7대 당 개혁안'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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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화합의 적임자는 박근혜뿐이다. ⓒ 이화자^^^ | ||
4.15 총선 열린당 싹쓸이 예상 뒤엎고 121석 확보
이른바 '천막당사' 시절 그는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한나라당을 구한 '잔다르크'로 불리면서 '위기에 강한 여자 박근혜'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그는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5차례의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40대 0의 완승을 거뒀다. 그의 재임기간 여당 대표는 8명이 바뀌었다. 박 전 대표가 처음 대표로 취임할 당시 당 지지율 7%에서 작년 6월 퇴임시에는 지지율이 50%에 육박하는 당으로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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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꽃다발과 풍선 ⓒ 이화자^^^ | ||
5.31 지방선거 지원 유세 테러, 입원중 '대전은요'
2006년 5.31 지방선거 지원 유세 당시 테러를 당했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선거 판도를 바꿨는가 하면, 금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 개헌 제안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로 한나라당과 지지세력의 정서를 정리해 내기도 했다.특히 최근 이 전 시장과의 경선룰 논란 과정에서는 '천표 줄테니 원칙대로 하자'거나, 경선 불참을 시사하면서까지 경선규칙 변경 불가를 고수해 결국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양보를 얻어낸 것도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다.박 전 대표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자신의 선친을 꼽는다. 어느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고, 원칙을 지키는 리더십을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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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를 연호나는 지지자들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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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전대표 입장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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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선의원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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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춘의원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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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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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갑의원 입장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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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원의원 입장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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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전대표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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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충환의원 입장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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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성문의원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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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계진의원 카메라맨과 인사중 ⓒ 이화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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