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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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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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아보세 2006-05-22 11:26:36
정작 자신들의 恨은 간호할 틈이 없었네…
독일서 간호사 파견 40주년 행사… 1500명 참석
“한강에 다리 1개 있을때 왔는데…” 눈시울
“장관들 한국 돌아가면 무소식” 섭섭함 토로

‘파독(派獨) 간호 40주년 기념 행사’가 20일 밤(현지 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빛 바랜 사진으로 봐도 꽃다운 나이. 그러나 이제는 곱게 단장을 해도 그 젊음을 되돌릴 수 없는 40년의 세월이다.

행사장은 우천(雨天)인데도 만원이었다. 1500명은 될 듯 했다. 독일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파독 간호사들은 아침 일찍 전세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나이는 50대 후반부터 최고 78세까지. 틈틈이 2세 자녀나 늙어가는 아내의 손을 잡은 독일인 남편들도 앉아 있었다.

2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파독(派獨) 간호 40주년 기념 행사’도중 참석자들이 독일 정착 초창기의 고통을 회상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점심 무렵 기자는 비바람치는 고속도로 야외 휴게소에서 간이 도시락을 먹고 있던 함부르크의 간호사들과 마주쳤다. 새벽 5시쯤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행사장까지 차로 6시간 거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은 늦봄 추위에 몸을 떨며 “우리 함부르크 간호사회가 15분간 춘향전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어 일찍 가서 의상 준비와 최종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독 간호 40주년’은 1966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1차 파독은 128명. 그전에도 독일의 개인 병원에서 한국 간호사를 고용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3년 의무 기간’으로 정식 파독이 이뤄진 것은 이때였다. 그 뒤로 1976년까지 이어졌다. 한 참석자는 “한강 다리가 하나 있을 때 왔는데 이제 24개가 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파독 간호사의 숫자는 약 1만1000명쯤으로 추산된다. 현재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간호사 수는 절반 남짓. 여전히 독일 병원에서 현역으로 일하는 간호사들도 적지 않다.

베를린 간호사회 회장인 백덕심씨는 “한때는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를 위해 봉급을 모두 부쳤던 간호사들은 이제 대부분 적은 연금에 어렵게 살고 있다”며 “정치인·장관 등이 올 때마다 이들을 위해 뭔가 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가고 나면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 옥색 한복을 차려 입은 한 간호사는 “내 봉급으로 공부한 동생들이 이제는 한국에서 제 잘났다고 한다”고 섭섭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행사장에는 그 동안 서로 소식이 끊겼던 이들끼리 “너 백정숙 맞지? 얼마나 찾으려고 애썼는데…”, “혹시 김순자 연락처 알고 있니?” “언니가 몇 년도 왔지요?”라는 말들이 오갔다. 양희순 재독간호협회 회장은 “처음 3년(의무복무기간)은 고향 생각도 외로움도 아픔도 참고, 혼자서 3~4인역의 힘든 일을 하면서 민간 외교 사절 역할까지 감당해야 하는 인고의 시절이었다”며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훌쩍거리자 참석자들도 덩달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또 다른 인사가 “당신은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 하고…어언 마흔 해가 흘렀습니다”고 말을 했을 때도 장내 참석자들은 흐느꼈다.

이번 행사의 모든 경비는 삼성에서 협찬했다. 한 참석자는 “우리나라가 파독 간호사들에 대해 진 빚을 생각하면 기업이 아닌 정부가 나서야 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행사에는 안영국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 김조자 대한간호협회회장,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 이수혁 주 독일대사 등이 참석했고, 연예인으로는 강석, 김혜영, 송대관, 김흥국, 현숙씨 등이 왔다. 앙겔라 메르겔 독일 총리,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행사는 밤 11시가 훨씬 넘어 끝났다. 이들은 또다시 흩어져 6시간씩 밤 버스로 되돌아갈 것이다.

멋져요 2006-05-20 23:23:39
참 많은 계획들이 있었네요.
요즘처럼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는 정치인들보단 훨씬 멋져부러.

지만원 2006-05-20 11:58:17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픔니다!

[독일을 찾은 두 얼굴!]

우리의 경제가 이만큼이나 성장되고 올림픽 개최국으로써 세계에 그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해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남다른 애국심과 지도력에 의함이다. 돌이켜보면 경제성장과 인권이 고르게 발전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잘 살고 보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가 인권에 그 만큼 충실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국의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의 모든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인권) 문제로 부관참시하려는 자들이 있으며 특히 이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시절 간첩 혐의를 받았던 친북 좌파(또는 주사파)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정되고 있다는 것이 심히 염려스럽다. 이들의 국가 보안법 철폐 주장과 숭북주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이들이 이구 동성으로 말하는 것들이 6.15 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이라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미군의 한반도 완전 철수라는 그림자와 남북 평화선언이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1964년12월10일 독일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2005년 4월 독일을 찾은 노무현의 모습이 너무나도 현저하게 다른 모습이어서 국민들과 재독 교민들의 가슴을 아프게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조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모든것을 팽게치고 차관을 얻으려는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모습이었으나 노무현의 독일 방문은 초호화판 그 자체였으며 그 호화의 도가 지나쳐 독일 사람들은 물론 교민들로부터도 이해할 수 없는 자로 비웃음의 잔치판을 열어 주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에 간 비밀 이야기!]
1963년 11월! 당시 조국의 형편은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는 사람이 1년에 한 두명이 있을까 말까한 것이 현실이었다. 가난하디 가난한 조국에서 수십대 1의 경쟁력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들 6,000 여명이 서독에 도착한 날은 1963년11월이다. 이들의 서로운 타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국 근대화란 기치를 내 걸고 경제개발 5개년이란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힌 것은 외자의 부족이었다.

미국에 사정도 해 보았지만 구테타 세력이란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달려 간 곳이 독일이다. 독일은 당시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고 라인강의 기적이란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가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사절단을 파견하여 차관을 제공하여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독일은 아시아 수출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가 용케도 맞아 떨어져서 독일은 한국에 1억 5000마르크의 상업 차관 제공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차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문제는 누가 지급 보증을 서느냐였다. 한국에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는 전 세계 아무곳에도 없었다.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결정은 보았지만 지급보증 문제로 차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몰린 박정희 대통령이 궁여지책으로 마지막 방안을 독일에 내 놓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독일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3년간의 급여를 독일의 유수 은행인 코메르츠 뱅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 형식으로 지급보증 문제의 해결을 보았다.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픔니다!]
그런 기막힌 사연으로 독일에 첫 발을 디딘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타국 생활을 한지 일년여가 지난 1964년12월10일 오전에 독일 루르 지방 함보론이란 탄광의 한 공회당에서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범벅인 한국인 광부 500명과 한복 차림의 간호사들이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내자 실내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이들의 울먹임이 하도 심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며 이어지는 애국가의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가 없어 사랑하는 국민을 탄광과 간호사로 독일에 보낸 박정희 대통령은 잠시 진정을 취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의 연설은 끝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공회당은 눈물 바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울었고 육영수 여사도 울었다. 우리의

송보배 2006-05-20 11:22:47
“장기전략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 한국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다.

리콴유(李光耀·현 고문장관)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한국이 세계 일류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갈등의 에너지’를 ‘화합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리 전 총리는 19일 동아일보와 고려대가 공동 주최한 제20회 인촌기념 강좌에 참석해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에게는 ‘갈등의 국가’로 비친다”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 간에 합의를 이뤄 내는 일에 국가의 에너지를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노사, 정당 간 갈등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에너지를 세계를 공략하는 데 쓴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말한다 2006-05-20 07:59:11
박정희는 이순신, 세종대왕 이상의 우리나라 역사의 기적을 만든 사람이다.

1960년 당시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바라보자. 국민소득은 전세계 최하위 수준이었으며 무역수지는 10 대 1로 적자였고 수출품은 일본에 헐값에 팔아먹던 돼지고기 김 어패류등이 고작이었고 수입의 90프로는 미군의 원조와 주둔미군이 한국에서 쓰는 달러로 채워지는 상황이었다.

더우기,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며, 공비를 내려 보내고, 땅굴을 파 내려오던 북한이 있어서 안보적으로도 매우 불안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손엔 총을 한손엔 삽을 잡아야하는 상황이었다 .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 팔아먹는다는 개념조차 세워져있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력들이 일할 곳을 찾지못하여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할일없이 뒷골목이나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세계 각지의 신독립국들은 이른바 종속이론에 입각하여 자립경제를 추진하고 있었고 북한 역시 소련의 경제종속을 염려하여 결국 주체를 앞세운 자립경제 체제로 가게되었다.

박정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수출이라는 걸 생각해낸 지도자였으며 그것을 추진한 사람이다. 또한 거의 모든 세계 경제전문가들의 회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중공업화를 추진해 결국 유신시대에 그 기틀을 닦아놓았던 사람이다.

1973년에 박정희가 중공업화 계획을 발표하며 대망의 80년대에는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자고 했을 때 그걸 곧이 곧대로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모든 차들을 세워봐야 경부고속도로도 못 채운다며 재벌들 골프치러가기 편하게 하려고 고속도로 만드냐며 많은 경제 인사들 야당지도자들이 반대했으며, 포화상태인 제철산업은 왜 무리하게 추진하느냐는 비판을 세계각국의 전문가들로부터 들어야 했으며, 정유 화학 단지 조성때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을 먹었으며, 이미 후발주자가 끼어들수 없도록 체제가 잡힌 전자 조선 산업등의 육성은 무리하다는 비판도 수없이 들어야 했다.

비록 박정희 평생의 꿈이었던 부국강병, 중공업 강국의 꿈을 박정희 자신은 보지 못한채 서거했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그가 추진했던 산업들이 결국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박정희가 그토록 내외의 수많은 비판을 무릎쓰고 추진한 산업구조안에서 결국 먹고 살고 있는 샘이다. 자립경제를 추구한 남미의 수많은 군사정권들 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북한은 결국 나락의 늪으로 떨어졌고 북한은 아직도 정신못차린채 결국 동네 부랑아 같은 국가가 되버렸다.

우리나라와 홍콩 대만 싱가폴등을 비교하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그게 얼마나 황당한 비유라는 걸 아는가. 싱가폴은 광대한 관광자원으로, 대만은 장개석이 들고온 무지막지한 금괴로 코에 손하나 대지 않고 코풀듯 경제개발을 시작한 나라이다.

우선, 아시아의 경제성장 국가들을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 졌던 말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비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세 국가는 한국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인구로만 보아도 대만이 한국의 절반 수준일 뿐 홍콩과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시국가를 급성장시키는 것은 한국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성장에는 아시아의 금융과 무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이 큰 기여를 했다.

대만의 경우,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피난오면서 이른바 부와 지식을 갖춘 엘리트집단이 주축을 이루었고, 따라서 상당한 물적·인적 자본을 대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홍콩, 싱가포르도 마찬가지로 자본을 겸비한 화교의 활동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외형적 조건이 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요소를 발견할 수 없는 한국이 성장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기술력도,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마저. 아무것도 없었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출신 독립국가중 우리나라와 같은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갖게 된 나라는 오직 한 나라 바로 대한민국 뿐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추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사람이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박정희는 앞으로 계속 신화화 될 것이다. 지금 박정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점차 죽어서 없어지면 없어 질 수록 박정희는 신화화 되어갈것이다.

우리 5천년 역사에 지금 처럼 잘 살아 본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 뿌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박정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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