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포(浦), 옛 기록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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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의 포(浦), 옛 기록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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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바다는 인간의 그리움을 자아내는 영원한 고향이다. 그 공간의 거대성(巨大性), 그 흐름의 유동성(流動性), 그 포용의 무한성(無限性), 종잡을 수 없는 그 난폭성(亂暴性), 모든 것을 수용하는 개방성(開放性)과 높은 생산력(生産力) 등으로 인류를 영원히 그 곁에 붙잡아 두고 있다.

21세기는 개방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 바다의 시대라 한다. 이러한 시대에 바다는 지구상의 모든 곳과 연결되어 있는 개방의 문호(門戶)이자 개방의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53㎞에 이르는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6개 읍·면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우리 영덕도 이런 시대에 발맞추어 지역의 바다와 관련있는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즉, 바다 주변의 역사(海洋史)와 바다 주변의 문화(海洋文化)에 대한 가치를 규명하여,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활성화를 꾀하는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나아가 해양관광자원을 개발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건이 주어진다면, 우리 지역 해안에 대한 자연과 역사 등의 모든 문화자원 즉, 모래·갯벌 등의 자연문화, 고분·지석묘 등의 선사문화, 항로·조운·등대를 포함한 해운, 성곽·봉화를 포함한 해안방어체제, 유교·불교·무속을 포함한 신앙 등,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하나하나 살펴보아 지역을 알리고 지역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자료로써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이번에는 단편적이나마 우리 지역의 해안과 관련된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 그리고 이곳에 얽힌 간단한 이야기를 보태어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단, 지면관계상 남정면에서 병곡면에 이르는 전 지역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고 남부지역, 즉 조선시대 영덕현에 속하였던 영덕읍·강구면·남정면 지역의 해안만을 살펴보고자 하며, 조선시대 영해도호부 지역이었던 축산면·영해면·병곡면 지역의 해안은 다음을 기약하고자 한다.

옛 기록을 따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지역의 지명 중에 바다와 관계되는 지명이 보이는 것은 세종 7년(1425)에 나온『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최초이다. 이 책 영해도호부의 사방계역(四方界域)조에 의하면 영해도호부 내에 “축산포·망곡” 등이 있다 하였으며, 영덕현의 사방계역조에는 “골곡·오포” 등이 있다 하였다.

또『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27년인 1445년 12월 5일의 최윤덕(崔閏德)장군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영해 반포(磻浦)에서 왜적을 쳐서 적을 쏘아 연이어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후 예종 1년(1469)에 편찬한『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의 염분(鹽盆)조에 “망곡리백석정(網谷里白石汀)·보곡리병곡정(保谷里柄谷汀)·아곡리경정(阿谷里鯨汀)·황죽리장정(黃竹里長汀)·읍내괴시리대진정(邑內槐市里大津汀)·부미차여정(府尾車余汀)”이 연이어 나오며, 이 책의 긴관(緊關)조에도 “동해대진포(東海大津浦)·관어대포(觀魚臺浦)·북해대포(北海大浦)·병곡포(柄谷浦)·망곡포(網谷浦)·경정포(景汀浦)”가 나오고 있으며, 또한 이 책 영덕현(盈德縣)의 염분조에 “오보포(烏保浦)·석면포(石面浦)·백탄포(白灘浦)·서사포(西賜浦)·하저포(下渚浦)·포항포(浦項浦)·남역포(南驛浦)·구어포(臼於浦)·심문곡포(深文谷浦)·사동포(沙冬浦)·골곡포(骨谷浦)”가 있으며, 이 책 긴관조에 “ 오보포(烏保浦)·하저포(下渚浦)·서사포(西賜浦)·대탄포(大灘浦)·삼사랑포(三士郞浦)·천미포(川尾浦)” 등이 있다 하였다.

대개 정(汀)이란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평지를 말하며, 포(浦)란 배가 드나드는 갯가의 어귀를 말하는데, 조선시대 해안의 정(汀)의 대부분은 소금을 굽던 염전의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으며, 포(浦)는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실어 나르던 조운(漕運)을 위한 창구이며, 중간 기착지였으며, 또한 해안을 방어하던 방어거점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한다.

특히 조선시대 초기 우리 지역의 포구들은 곡물과 물자의 운반 등을 위한 생산적 성격의 포구로써의 역할보다 왜구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 강한 그런 포구였으며, 포구의 대부분은 크거나 작거나 하는 소하천(小河川)을 끼고 형성하였다.

^^^ⓒ 문형식^^^
골곡포-포항시.영덕군 경계에 위치

이제 위의 세 가지 책자의 기록을 참고하여 지역의 맨 남쪽부터 살펴보면, 지역에서의 최남단에 있던 포구는 골곡포(骨谷浦)이다.

골곡포는 오늘날 지방하천 2급인 지경천의 입구를 말하며, 포항시 송라면 지경리와 영덕군 남정면 부경 2리를 사이에 있는 포구로 포항시와 영덕군과의 경계를 짓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골곡포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아마 동대산 등지에서 발원하는 냇물이 깊은 골을 파면서 흐른다 하여 붙은 이름일 것이다.

재 포구 주위에는 해변횟집·목선횟집 등이 즐비하게 있으며, 영덕군을 알리는 각종 홍보 입간판이 서있으며, 포항시도 포항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워 관문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찾아 주고 있다.

^^^ⓒ 문형식^^^
사동포-대규모 군대 상륙에 적합

골곡포 다음은 사동포(沙冬浦)인데, 이곳은 남정면 장사리를 말한다. 지금은 해안의 전체가 모래사장이 되어 포구의 역할을 할 수 없지만 아군이나 적군이 대규모로 상륙하는데는 적합한 곳이다. 그 일례로 1950년 6.25한국전쟁 당시 아군에 의한 ‘장사상륙작전’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특히 사동포, 즉 장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사도성(沙道城)이 있던 곳으로 추정이 되는데,『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왕 9년(162)에 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는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조분왕 3년(232) 7월에 이찬 우로가 사도성에서 싸울 때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배를 태우니, 왜병들이 물에 뛰어 들어 모두 죽었다.”, “유례왕 9년(292) 6월에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함락 당하자 왕이 일길찬 대곡을 시켜 성을 수복시켰고, 다음해에 성을 개척하여 상주에 사는 80여 호를 옮겨와서 살게 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나오는데, 성을 쌓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오거나, 상주의 사람들을 이사시킬 정도로 가까운 영덕의 해안은 남정면 소재지가 있는 장사리 일대일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로는 장사리를 사도성의 사도와 비슷한 사동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도 장사리에서 시집오거나 이사 온 사람을 ‘사도이 댁’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도와 사동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현재 장사리가 위치한 곳은 초기 신라시대 당시에는 남정면 양성리에 이르기까지 바다였을 가능성이 높아 왜적이 정박하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며, 이곳에 정박한 왜적의 배를 장사리에 있는 남산과 부흥리 뒤산에서 협공하였다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고, 또한 남정면 양성리 산 21번지 일대에는 축조연대가 알려지지 않는 성터가 남아 있다는 것으로 보아 사도성이 장사리 부근이었음을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다 하겠다.

어떻든 사동포 장사는 오늘날 영덕군이 자랑하는 장사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여름이면 형형색색의 물결이 넘쳐나는 낭만의 장소가 되었으며, 장사해수욕장 종합개발계획이 완성되면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관광휴양지가 될 것이다.

^^^ⓒ 문형식^^^
심문곡포-일명 지푸실, 깊은실

다음은 심문곡포(深文谷浦)인데, 이곳은 오늘날 남정면 원척리와 구계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곳을 ‘지푸실골’ 혹은 ‘깊은실’이라 부르는데 심문곡(深文谷)의 심(深)은 ‘깊다’라는 뜻이고 곡(谷)은 ‘실’, 혹은 ‘골’을 나타내는 우리말로 이로 보아 이곳이 심문곡포가 틀림없다고 하겠다.

또한 이 지푸실에서 구계리 쪽으로는 지금도 괴나리, 혹 괴날기․괴늘로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 초기에 이곳에 있던 큰나루가 와전되어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동민들은 예전에 불러왔던 그대로 부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일부 축양장이 들어서고, 일부는 7번 국도가 지나가며 해안 모래사장의 대부분을 없애버려 흔적이 없다, 아쉬운 것은 옛날 이곳에는 해당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6 ·7월이면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면 참으로 장관이었는데, 지금은 추억 저편에서 가물거리고만 있다.

^^^ⓒ 문형식^^^
구어포-국가항 지정... 횟집 즐비

다음은 구어포(臼於浦)로 현 남정면 구계리이다. 일제시대인 1914년 3월 1일에 마을 이름을 구계(龜溪)로 고치기전에는 이곳을 구배(臼背)라고 불렀다.

아마 구배라는 지명은 하부라는 동명을 한자로 옮긴 말인 것 같다.
구(臼)는 곧 확, 즉 절구를 의미하는데, 동네가 하부골을 중심으로 절구같이 움푹 들어 갔다하여 확배, 혹은 하부 등으로 불리던 것이 한자식 지명으로 기록하면서 구배로 된 것 같다.

어떻든 옛날 조그마한 포구였던 구계 포구는 현재 국가항으로 지정되어 수십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입·출입하고 있으며, 마을 내에는 대소의 생선횟집이 즐비하여 항상 활력이 넘치는 곳이 되고 있다.

^^^ⓒ 문형식^^^
남역포-사철 많이 나 공물로 바쳐

구계리 구어포에 이어 남호리는 조선시대 초기에 남역포(南驛浦)라고 불렀다.
곧 조선시대 남역(南驛)과 연결된 포구라 하여 그렇게 불린 것으로 조선시대의 남역은 현 남정면 남정리에 있었다.

남역포에는 조선시대 초기에 강구 오포와 함께 사철(沙鐵)이 많이 나서 나라에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도 남정 약수탕을 중심으로 철광석 성분으로 인한 뻘건 녹물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남호천을 중심으로 사철의 채취가 많았던 것 같다.

몇 년 전 만하여도 남호천에는 은어와 뱀장어가 지천으로 있어 보기가 좋았는데, 7번 국도가 확포장 되면서 남호리 주민 일부가 남호천 상류로 이주하면서 점차 없어졌으며, 앞으로도 삼사골프장이 완성되면 은어 구경하기는 힘들어 질 것으로 보인다.

^^^ⓒ 문형식^^^
삼사랑포-신라 화랑 수련하던 곳

남호리의 남역포에 이어 강구면 삼사리인데, 삼사리는 조선시대 초기에 삼사랑(三士郞)포라고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부르기는 삼시랑으로 부른다.

삼사리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신라, 혹은 고려시대에 시랑(侍郞)벼슬을 한 세 사람이 태어났다하여 붙은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이름있는 선비 세 사람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삼사리의 지명은 신라의 화랑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해상공원이 들어선 자리는 지금도 좋은 곳이지만 예전에는 더 좋은 곳이었다.

맑은 날 남쪽으로는 호미곳이 눈앞에 보이고, 동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낙동정맥의 높고 낮은 산이 물결이 되어 끝없이 밀려오고, 북으로는 지품과 달산에서 내려오는 오십천이 포내천(浦內川)이 되어 물안개를 만들며 이곳을 뒤덮을 때면 참으로 신비롭게 신성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명승절경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하던 신라의 화랑들 중에 유명한 삼선랑(三仙郞)들이 강원도 고성 의 삼일포에서 수련한 후 남으로 내려오다 이곳의 경치를 보고 여기서 머물며 수련하였기 때문에 이때의 ‘삼선랑’이 수련하던 곳이라는 의미가 세월이 지나면서 삼시랑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한다.

지금은 마을 위쪽에 해상공원이 들어서 있고, 7번 국도를 따라 현대식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 있다. 또한 삼사골프장이 마을 서남쪽에 들어서고 있어 신라의 화랑들이 말 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수련을 하였지만, 조금 있으면 말 대신에 차를 타고 와서 활 대신에 골프채로 파란 잔디 구멍에 하얀 공을 넣는 장면을 볼 것이니, 어떻게 보면 예나 지금이나 노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세상은 점점 좋아져 간다…

^^^ⓒ 문형식^^^
오포포-조선시대 수군 주둔한 군사 기지

오포(烏浦)는 현재에도 오포라고 부른다. 오포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수군만호진과 만호성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에 많이 나온다.

오포수군 만호성터는 오포 1리374·385·386번지 일대이며, 당시의 규모로는 군함이 4척에서 8척, 200여명에서 400여명에 이르는 수군이 주둔하고 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군사기지였다.

지금은 오포수군 만호진이 있던 곳은 포내천 제방공사로 인하여 문전옥답이 되었으며, 최신 주택이 즐비하고 마을 안길이 포장이 되어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며, 군함이 드나들던 곳은 7번 국도가 가로질러 지나가며 그 건너에 강구면사무소 전망 좋게 보이고 있다.

^^^ⓒ 문형식^^^
서사포-강구면 금진리 뜻해

강구면 금진리(金津里)는 조선시대 초기에는 서사포(西賜浦)이다. 서사포는 곧 서(西)는 ‘쇠’ 혹은 ‘새’ 즉, 해 혹은 동쪽을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사(賜)는 뜻으로 ‘내리다’, ‘나리다’라는 해석되는데, 이를 합치면 새나리, 쇠내리가 된다. 이러한 것이 이두식으로 표현해서 서사포가 되었는데, 다시 한자식 지명으로 바꾸면서 ‘해’ 혹은 동쪽을 나타내는 ‘새’를 무쇠로 보아 금진(金津)으로 한 것이다.

^^^^^^ⓒ 문형식^^^^^^
하저포-조선시대 해안방어 요충지

하저(下渚)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역시 하저포라 하였다. 하저포 역시 적과 아군이 접근하기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가까운 예로 1950년 6.25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따라 퇴로가 막힌 북한군 낙오병과 무장공비들이 낙동정맥을 둘러싸고 살인과 납치 등의 만행을 저지르며 치안방해를 극렬히 하여, 아군의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에 유엔군은 미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한국 해병 제1연대를 투입시켜 이들을 소탕하도록 하였는데, 마침내 1951년 1월 26일에 한국 해병 제1연대는 진해를 출발하여 마침내 1월 29일에 하저리 해안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지품면 원전리, 남정면 쟁암리 등에 걸쳐 있는 동대산 등지의 적 패잔병과 공비들을 소탕하여 이 지역의 치안을 회복하기도 한 사실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해안방어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명백한 기록과 모든 사실들이 ‘골곡포(骨谷浦)’는 화진해수욕장 부근이 아니고, 우리 군(郡) 부경리와 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리 사이에 있는 지경천이라고 하는데도 아직까지 화진해수욕장 부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시점에서 해안선을 따른 고장의 옛 지명과 오늘의 지명을 살펴봄은 그래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늘 고민을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특정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삶과 문화의 영속성은 무엇이며, 이 영속성을 어떻게 연결하고, 모두가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군은 현재 삼사해상공원에 영덕어촌민속전시관을 짓고 있으며, 몇 군데 마을에는 문화마을 등의 이름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사업을 벌이는 등, 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업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될까봐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지역은 예로부터 중앙정권으로부터의 무관심과 왜구의 침탈에 시달리면서도 매우 활력 있는 문화를 가꾸어 온 고장으로 도처에 많은 문화자원과 역사적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도 먼먼 조상들과는 별개의 존재는 아니다. 모두가 과거․현재․미래를 관류하는 문화의 DNA로 연결된 그런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바다뿐만 아니라 지역 모든 부문에서의 역사자원․문화자원에 대하여 연구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로는 결국 이것을 통하여 우리 군의 역사와 문화의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이고, 또 우리 군민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원형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21세기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군민들이 가져야 할 참정신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정보제공: 문화원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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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들 2005-07-17 22:36:40
구계항#이고시오 강구항강구리#이고시오

삼사리 2005-07-17 22:37:20
삼사리#이고시오

해수욕장 2005-07-17 22:38:01
장사해수욕장#이고시오 오포해수욕장#이고시오 남호리해수욕장#이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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