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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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에 의미가 있다

퀀텀 점프, 이 네 글자는 어느 고급승용차가 출시되면서 폼 잡고 내세운 광고문구다. 물리학에서 '양자(量子) 도약'이란 뜻을 가진 퀀텀 점프(quantum jump)는 근래에 와서 비약적 실적을 가리키는 경제용어로 자리 잡았다. 가령 어떤 혁신적 경영수법을 통하여 전년도 대비 30% 이상의 실적을 올렸다면, 이때 퀀텀 점프는 프로파일 도표의 문턱을 겨냥하는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퀀텀 점프를 만들어보자"라고 관련부처에서 강조했다면, 이는 장대높이뛰기 하듯 훞쩍 목표를 뛰어넘는 경제 성장을 마음에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경제는 욕심쟁이처럼 도약만 강조하나, 반면 그 역과정의 붕괴도 중요한 점프가 된다.

점프가 일상용어지만, 트랜지션(transition)은 물리학 전문용어이다. 원자 내부는 구조적으로 나눠진 '에너지 공간'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상태가 입체적으로 양자화 되어있다. 아무튼, 이 공간에 갇힌 하나의 전자는 어느 한 상태를 점유하게 되고, 이때 주어진 상태와 이웃한 더 높은 상태의 수준 사이에서 상태의 전이(transition)가 오르락내리락 널뛰듯 이루어진다. 이때 푸시(push) 과정은 자기 주변에 주어진 에너지를 흡수하여 그 간격(gap) 이상을 축적시킨 상태이고, 풀(pull) 과정은 그 간격만큼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인데, 그 형태는 전자기파로 즉 빛으로 나타난다. 요사이 주목 받고 있는 LED 램프가 이런 방출방식의 공학적 응용이다.

저속 상황에 놓인 사람의 능력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한계로 받아드려 그 정도에서 사유하게 되는데, 이때의 시공은 “속도 공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속도는 공간을 시간으로 나눈 값으로써, 그 크기의 단계에 따라 운반체의 상태가 뜀박질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제아무리 초음속을 자랑하는 전투기라도 한번 이륙한 비행기는 중력에 의해 반드시 착륙해야 한다.

그러나 인공위성이 대기권 밖의 궤도에 올라간 다음, 수평방향으로 초속 7.9km 이상의 속도를 내게 되면, 인력과 원심력이 평행되어 즉 무중력 상태로 지구 둘레를 공전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초속 11.3km 이상 넘어서면 지구조차 떠나는 탈출속도가 이루어져서 우주탐사선이 된다. 거가에 더구나 광속까지 다다른다면 시간조차 사라지게 되고, 그 결과, 우주선의 탑승객은 현재만 존재하는 상태로서 영원불변을 마주할 수 있다.

성리학은 세상의 갈등을 '끼리(氣理) 공간'에서 바라본다. 끼란 기(氣)의 깡이다. 무기(巫氣)는 무끼로 발음해야 제 맛이 나오는 것과 같다. 16세기 말 열정적 자세를 가진 율곡은 사특한 군주를 만나 골병들어 제명대로 다 못살았지만, 성리학의 도통으로는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듯 절정에 이르렀다. 율곡에 따르면, 끼리(氣理)의 사이는 서로 나눌 수 없고(相離不得), 서로 섞일 수 없고(不相挾雜), 공간적으로 빈틈없이 하나요(渾淪無間), 시간적으로 앞뒤가 없다(無先無後). 더구나, 수동과 능동으로 끼 자끼(氣自氣), 리 자리(理自理)의 4재(四裁)가 자락을 펼치고, 끼리(氣理)의 자축(自軸) 위에다 회전시켜보면, 마치 자이로스코프 같은 “끼리(氣理) 공간”이 드러난다. 율곡의 독창적 입체형태이다.

국가나 민족끼리의 갈등은 끝내 참혹한 전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해마다 지구촌에서 전쟁 없는 날은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더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쟁은 평화적으로 결코 풀리지 않던 문제가 상태의 전이를 일으키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역발상으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베었다는 전설이 떠오르는 그림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 선/후발 자본주의 제국끼리 식민지팽창에 대한 갈등이 폭발하면서 유럽 전역은 전쟁터로 바뀌며 난리쳤다. 소위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란 명칭이 붙었는데, 역사상 전대미문의 총력전(total war)이었다. 이 때문에 전사자의 수도 이전까지의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고, 그 후유증으로 독일, 카카니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는 정부형태조차 뒤바뀌었다.

“논리 공간”도 따로 있다. 애칭 루키(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가 20대 청년시절에 저술한 “논고”에서 이 용어가 나온다. 19세기말 루키의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오스트리아의 갑부였다. 당시 카카니아는 친교황 성향 유럽국가들의 정치적 연방체로서 장수했던 신성로마제국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끝물이었다. 프락타투스(라틴어, 논고)는 카카니아의 용병으로 참전한 루키가 생사의 백척간두에서 틈틈이 독일어로 기록했던 노트가 그 바탕이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에서 지도교수였던 러셀의 서론을 받아, 전후에 영독 합본으로 발행했다. 트리니티는 일진 같은 서클 "사도들(the Apostles)"이 그 핵심을 이룬다. 화이트헤드에 따라 러셀이, 러셀의 권유로 루키가 여기에 가입하는데, 그들의 사승관계는 마치 탁란된 뻐꾸기처럼 냉혹한 생존이 서려있다.

프락타투스는 여러 명제들에 대한 해설서인데, 개미가 입구 1에서 출구 7로 더듬어 찾아가는 미로 같은 행렬로 구성되어 있다. 1부터 7까지 일곱 개의 큰 명제 사이에 소수점 아래 최대 다섯 자리까지 내려가는 수열로 나열되어 있으며, 각각 작은 명제나 그에 따른 주석이 펼쳐진다. 다만 독자에 대한 배려는 문장의 간결함뿐이다. "1. 세계는 사례인 것의 전체다" 이렇게 루키는 말을 시작한다. 이 뜻은 "어떤 사건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더하면 확률 100%이다"로 비유된다. 이어서 사례는 사실들로, 사실은 사태(원자 사실)들로, 사태는 사물들로 개념이 내려간다. 여기에 대응하는 언어는 사물의 이름에서 요소 명제로, 요소 명제에서 복합 명제로, 이런 방식으로 논리 공간이 조성되며 올라간다. 여기서 '원자 사실'과 '요소 명제'의 사이는 “그림”으로 전달되고, 따라서 언어로 표현된다. 이것이 청년 루키가 주장했던 '언어의 그림이론' 요체이다.

루키가 전쟁의 일선에서 사투할 때, 고독한 영혼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정교회에서 파문당했던 톨스토이가 쓴 '요약 복음서'였다. 좀 전에 '아무도 모르는 예수'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서적이다. 그러나 루키는 어려서 가톨릭 세례까지 받았지만 평생 제도권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아마 그의 내면은 무교회주의 수도승 같은 모습이리라.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락타투스는 이렇게 마감하는데, 신(神) 같은 초월적 명제를 협잡한 논리 공간에 포함시켜버리면 난센스(nonsense)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의 물꼬를 휘어잡았던 비엔나 학파는 이것을 무의미(meaningless)로 해석하고, 그 토대 위에 실증논리주의라는 돛대를 달았었다.

'6.54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뒤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지금 이 설명을 뒤집어보면, 그림이 없는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 사다리타고 오르는 곳 그리고 사다리를 차버리는 곳, 그런 초월 공간에서 비로소 세계가 똑바로 보이기 때문에 생명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라는 것이다.

루키의 논리 공간은 '나-사회-자연'의 삼극 단체(simplex)에 불과하다. 여기에 '초월'의 극을 추가하여 사면체가 되면, 드디어 예술과 윤리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신비한 여지를 남기면서 프락타투스는 마지막 조명을 꺼버린다. 결국 루키의 진정한 고통은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어떻게 결정하고, 어떤 행동을 나타내야 하는가, 그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잘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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