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시대 ‘적자생존’은 불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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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시대 ‘적자생존’은 불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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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해결’은 빠르고 공정해야 한다

<최근 우리사회는 너무 극심한 경쟁논리에 매몰되고 있다.    
 
   
  ▲ 데이비드 슬로안 윌슨 빙햄튼 대학(뉴욕 주립대) 생물과학 및 인류학 교수 ⓒ 뉴스타운  
 
빠른 사회에서 느린 생각과 행동은 불필요한 것인가? 개인적인 추구만이 나를 살리고 내 가족을 살린다는 생각만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소집단이나 공동체 삶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적자생존을 위해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강조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어 온지 오래다. 최근 ‘미래포럼(forum for the future)'에서 17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주립대 빙햄튼대학의 데이비드 슬로안 윌슨(David Sloan Wilson) 교수와의 대담이 실렸다. 여기에 미래포럼 편집장인 안나 심슨과의 대담을 소개한다>
 
 
경제는 경쟁을 먹고 산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협력자들이다. 혁신적이자 개혁적 과학자인 ‘데이비드 슬로안 윌슨(David Sloan Wilson)’이 말한다. 
 
[질문] 비즈니스 리더들은 종종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을 말하면서 경쟁을 부추기려 한다. 여기에 대한 생각은?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진화(evolution)는 항상 경쟁을 수반한다. 그러나 사회가 비정상적인 경쟁을 기반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는 오류다. 
 
통상적으로 사리사욕(self-interest)이 자동적으로 좋다고 하는 그러한 견해에 대한 이론적 기반은 무엇인가? 그건 아담 스미스의 개념인 ‘보이지 않는 손’이며, 신고전주의경제학(新古典主義經濟學)에 의해 구체화한 생각이며, 그것을 지지하는 커다란 체계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리들의 종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은 지난 몇 십 년을 거치는 동안 ‘협력의 과학(science of cooperation)'이라 불러왔으며, 우리는 지금 공동으로 일을 잘 해보자는 것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고무적인 일로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 협력적으로 일을 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기초 단위(natural human unit)‘이다. 지금부터 약 15,000년 전 소집단(small group)이 유일한 사회적 환경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America)를 저술한 토크빌(Toqueville)은 “어떤 한 마을이나 행정구역단위인 군, 구(카운티, county)가 자연적 유일한 사회적 공동체였으며, 그것이 어떤 공동체적 단위를 구성한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우리 인간은 도덕 심리학을 생각하는 본능, 그리고 어떤 상황이 잘 맞아 떨어질 때 소그룹이 일을 아주 잘할 수 있다는 그러한 인간의 본능이 발달돼 왔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제 2차 계몽주의를 이야기 한다. 우리는 1차 계몽주의시대 이래 많은 것을 배워왔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적 이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 이러한 상황 조건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협력을 위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그건 지난 2009년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노어 오스트롬(Eleanor Ostrem)으로부터 출발된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은 미국의 정치학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사회 공유재산에 대한 경제적 지배구조’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오스트롬은 공유재산을 정부나 민간기업보다 더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피플파워(people power)'를 중시했고, 이를 기반으로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자체 제도의 협력 체계를 통하여 공유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환경파괴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게임이론이나 실험을 근거로 제시했다-역주) 
 
우선 그 집단들은 강력한 정체성과 공통의 목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용과 이익은 반드시 비례적이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이익을 챙기는 경우를 보라. 세 번째로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의견일치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보인다. “당신의 비용으로 내가 성공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성공하는가?”이다. 따라서 일의 과정은 투명하게 모니터링이 돼야 하고, 갈등해결(conflict resolution)이 빠르게 공정하게 돼야 한다. 마지막 지적할 것은 보다 폭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집단의 위치를 매기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집단과 자치적으로 관계가 형성돼야 하고 동일한 조건이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청사진이다. 
 
[질문] 협력적 모델을 향해 오늘날 경제를 지배하는 사업과 시장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떠한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완벽하게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가 많은 것들을 보고 그 많은 것들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진보나 진화의 또 다른 메시지는 우리가 대단히 문화적 인간(종, 種)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우리 유전자가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과 우리의 이데올로기이며,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어떠한 생각들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들에 의해 당신은 행동하게 될 것이다. 
 
유전자 특성이 당신을 행동하게 하지는 않는다. 현재 우린 인간 세계는 사리사욕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시야를 가지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세계에는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 가능한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적 진화(cultural evolution) 과정에 대해 보다 더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의 질은 실질적으로 향상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실제 이행하고 있는가, 나아가 그것을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질문] 그럼, 오늘날 문화의 많은 부분이 개인의 업적, 개인의 소유, 자기표현 등에 두루 기반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인적인 예술적, 정치적, 음악적 성향 혹은 의식(컬트)’으로부터 멀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이견을 내세울 것인가? 
 
물론 이견이 있다. 이런 문구를 한 번 보자. “개인적 컬트(Cult)."  컬트란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예찬이나 열광적인 숭배, 나아가서 그런 열광자의 집단, 또는 주교적인 종교단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몇 년 전에  출간된 ‘시장은 신(神)인가?(The Market as God)’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월스트리트저널(WSJ)이라는 신문을 읽기 시작했던 종교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가 저술한 책이다. 
 
그는 '경제와 시장(市場)'은 사람들이 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이 컬트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방식과 일치하는가, 보다 더 건설적인가’ 하는 또 다른 컬트를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질문] 그럼,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길이나 방식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가? 
 
어떤 공동체 집단을 창출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성공을 위한 모든 요소들을 자동적으로 취할 수 없다. 세계는 그러한 요소들이 부족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전형적인 고등학교를 한 번 보라. 강한 집단 정체성도, 의사결정의 일치도 없다는 사실을.
 
[질문] 그러한 질적 향상을 함양하기 위해서 공동체 집단을 도와야 하는데 리더십의 역할은 있는가? 
 
리더십에 관한 진화적 관점을 보여주는 좋은 책이 있다. 공동체 집단과 조직심리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진화심리학자인 마크 반 부트(Mark van Vugt)가 쓴 ‘자연의 선택(Naturally Selected)’이 있다. 그는 리더십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영장류 우성’의 리더가 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겁을 주고 위협하면서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가는 골목대장과 같은 리더가 있다. 사회가 자신들이 기능을 잘 하지 못하는 상황의 지배력을 가질 때에는 그에 따른 리더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리더십은 협력적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마치 여객기 승무원과 같은 리더가 있다. 
 
최상의 리더십은 리더가 궁극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고, 상향식(bottom-up)의사 결정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리더이다. 그러나 만일 공동체 집단이 극단적으로 규모가 작다면 리더가 될 필요는 없다. 이는 인류학자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탐험시대에는 당신이 가서 보고 말한다 “당신의 리더를 나오라고 하라!” 그러나 리더는 없었다. 왜냐면 평등사회(egalitarian society)이었기 때문이다. 
 
[질문] 여성에게 있어 리더십은 얼마나 중요한가? 
 
평등과 평등한 기회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 세계에는 항상 요점적으로 차이점을 말하는 실질적 경향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사람의 적성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인식을 하는가? 
 
특히 여성에 대해서 차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 문화적 유연성과 적응성으로 가장 많이 감명을 받는다. 나는 여성이 필요한 리더십 접근성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협력을 더욱 강조하려면 하찮다고 생각하는 존재들 모두를 포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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