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강력한 권력과 하고 싶은 정책의 한계
스크롤 이동 상태바
시진핑, 강력한 권력과 하고 싶은 정책의 한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중국의 분열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 중국의 최악의 의도를 가정하는 것은 원치 않는 위험한 긴장 고조로 이어질 수 있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사망 이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축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진핑이 마오쩌둥과 비슷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마오쩌둥 이후, 어떠한 중국의 지도자보다도 보다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이 펼치고 싶은 정책을 완전히 이행할 수는 없다.”

외교전문 매체인 ‘더 디플로매트’는 18일(현지시간) 기사에서 이 같이 주장하고, 시진핑은 마오쩌둥 이후 중국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됐다고 못 박았다.

2016년 타임지 표지에는 시진핑 사진 뒤에 마오쩌둥의 이미지가 등장해 시진핑이 마오쩌둥의 재림임을 암시했다. 뉴욕타임스(NYT)부터 중동의 알자지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사는 시진핑의 권력 집중화와 개인숭배(personality cult)를 분석하면서, 시진핑이 새로운 마오쩌둥이라고 선언했다.

시진핑은 마오주의 개인주의 지도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고안된 포스트 마오 시대의 당 규범과 제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됐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과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중국은 정치제도화(political institutionalization)시대에 돌입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CCP) 지도자 중 누구도 과도한 권력 집중이라는 마오이스트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나아가 덩샤오핑은 천윈(陳雲), 양상쿤(楊商坑), 리 셴녠(李先念) 등 당 원로들의 제약에도 직면했다. 따라서 덩샤오핑은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연합을 구축해야만 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수잔 쉬크(Susan Shirk)가 중국 경제 개혁에 관한 연구에서 보여주었듯이, 덩샤오핑은 친(親)마오주의 중공업 경영자 및 군산복합체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성장(省長)과 경공업 경영자들로 구성된 친개혁 연합을 설립했다. 개혁을 유지하기 위해 덩샤오핑은 친(親)마오주의자들이 새로운 경제 성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의 승리 연합을 내륙 지방과 중공업으로 성공적으로 확장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의 엘리트 정치는 퇴임, 승계, 전환이라는 일련의 제도화를 경험했다. 덩샤오핑은 먼저 은퇴의 모범을 보여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평생 임기를 종료했다.

장쩌민은 차오스(喬石, Qiao Shi)와 리루이환(李瑞環, Li Ruihuan)같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년을 1997년 70세, 2002년 68세로 낮췄다. 덩샤오핑은 1992년 후진타오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임명해 후계체제를 확립했다.

이 움직임은 세대 간 임명의 규칙을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후임자가 최종 승계되기 전에 적어도 한 임기 동안 정치국에 앉아야 한다는 규범도 확립했다. 또 후임자는 중앙군사위 부주석, 부위원장직을 자주 맡아 중요한 영도 소그룹에 참여해 귀중한 경험을 쌓고, 다른 영향력 있는 군·민 지도자들 사이에서 신임을 얻었다.

이러한 제도화 시도의 결과로 중국은 집단적 리더십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후진타오 시대 엘리트 정치는 “1당 2파(one party, two factions)”체제로 발전했다. 후진타오(Hu Jintao)가 이끄는 청년동맹(团派, Tuanpai) 파벌에는 청년동맹 시스템을 통해 승진하고 가난한 내륙 지방에서 경력을 시작한 비천한 배경의 간부들이 포함되었다.

또 다른 세력은 장쩌민 휘하의 태자당(太子党, princelings) 또는 상하이방(上海幇, Shanghai Gang)이었다. 그들은 혁명 영웅과 전 지도자들의 자녀이자 친척이었다. 쩡칭훙(曾慶紅, Zeng Qinghong)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상하이에서 장쩌민(江泽民, Jiāng Zémín)과 인연을 맺었다.

청년동맹과 상하이방은 서로 다른 정책을 선호했다. 장쩌민의 정책은 친경제적 성장, 친(親)해안, 친(親)도시 정책이었고, 여기에는 높은 실업률과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초래한 국영기업 개혁이 포함됐다. 장쩌민과 태자들은 또 협의 정치를 향한 움직임과 같은 제한적인 정치 개혁을 지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본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고 농촌세(農村稅, rural tax)를 철폐하는 등 후진타오의 정책은 사회적 평등을 개선하고 극빈층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

시진핑이 정권을 잡자 그는 권력을 중앙 집중화할 권한을 가졌다. 많은 중국 공산당 고위층은 후진타오 시대를 혼란스럽고 부패한 것으로 여겼고, 보시라이(薄熙來, Bo Xilai) 스캔들은 그들의 견해를 더욱 확고히 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약한 지도자가 문제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그들은 불평등과 부패와 같은 중국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가진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이전에 확립된 규칙을 방해하고, 어떤 규범, 제도, 고위층의 제약도 받지 않기까지 했다. 그는 임기 제한을 없애고 종신 재직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는 또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측근들로 꽉 채워 당초 ‘1당 2파’체제에서 2파 체제(two-faction system)를 종식시켰다. 특히 장쩌민이 생존해 있던 3차 결의안에서 그가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핵심 지도자(core leader)’직함을 모두 빼앗았다는 사실은 그의 독보적인 권력을 더욱 과시했다.

그 결과, 시진핑은 마오쩌둥 사망 이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축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진핑이 마오쩌둥과 비슷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거버넌스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페리(Elizabeth Perry)는 마오쩌둥의 통치 스타일을 대중동원(mass mobilization)으로 논의했다. 마오쩌둥은 모델을 선택했고 전국이 이를 따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 주석은 또 농촌 빈곤 퇴치, 코로나19 억제 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캠페인은 지방 관료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실행 시 더 많은 지역적 변형을 허용한 포스트 마오시대(post-Mao era)의 ‘관리된 캠페인(managed campaigns’이라고 페리가 설명한 것과 더 일치했다. 즉, 마오쩌둥이 관료제를 우회하기 위해 대규모 캠페인을 벌인 반면, 시진핑은 관료제에 의존하여 캠페인을 실행했다.

마오는 관료주의를 싫어했다. 그는 중국 체제의 지나친 관료화가 소련식 수정주의(Soviet-style revisionism)로 이어질까 봐 끊임없이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관료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관료제의 정점에 앉은 류샤오치(劉少奇, Liu Shaoqi), 덩샤오핑(鄧小平, Deng Xiaoping) 같은 ‘중국 흐루시초프(Chinese Khrushchevs)’를 숙청했다.

시진핑은 관료주의의 문제를 인식했다. 그는 반부패 캠페인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달리 시진핑은 정책 시행을 여전히 관료제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시진핑은 캠페인에서 대중에 의존하기보다는 캠페인을 통해 간부들의 정책 선호도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관심은 환경규제캠페인에서 결정적인 조치로 이어졌다. 이 캠페인은 간부 평가에서 환경 목표를 매우 중요하게 만들어 하위 수준의 준수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여전히 ​​관료화와 형식주의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공무원들은 환경 규제와 같이 센터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노력과 좋은 의도를 보여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진핑이 정책 집행을 관료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가 중국 정치의 분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정치적 분열(political fragmentation)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 정치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 즉 중국이 단일 국가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진다. 중국 외교 정책을 논의할 때 많은 중국 관찰자들은 중국 정책이 지도자의 개인적 선호를 반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러시 도시(Rush Doshi)의 “롱게임(The Long Game), 부제는 미국을 대체하려는 중국의 대전략“은 중앙 정부 업무 문서를 사용하여 중국의 대외 야망을 보여준다. 저자인 러시 도시는 ”시진핑 치하의 중국 외교 정책이 미국을 대신해 새로운 지역 및 글로벌 리더로 자리잡기 위한 수십 년간의 전략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이코노미(Elizabeth Economy)의 ”중국에 따른 세계(The World According China)“는 시진핑의 개인 연설과 글을 연구하여, 중국의 과거 영광을 되찾고 지정학적 지형을 재편하려는 중국의 야심찬 새로운 전략을 설명한다.

이 작품들은 학자들이 중국 공산당을 연구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 중 하나인 문서 분석을 통해 중국 정치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책 결정에 대한 지도자의 의견과 최종 정책 결과를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은 파편화된 권위주의(fragmented authoritarianism) 문제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정책 집행에 많은 행위자가 참여하기 때문에 정책 결과가 리더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앤드류 메르타(Andrew Mertha)의 “전우들(Brothers in Arms)”은 마오쩌둥 시대 이후 중국의 외교 정책이 파편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분열은 중국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영향력이 없었던 크메르 루즈(Khmer Rouge)가 중국의 기관 간 분열을 이용하여 중국 정책에 저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시진핑의 대표적인 외교정책인 일대일로(BRI)도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예민(Ye Min)은 BRI가 동원 캠페인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중국 기업이 외국에 투자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케이 리(CK Lee)는 BRI를 기업이 따라갈 수 있는 “빨간 깃발(red banner)”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 국영기업과 같은 BRI 시행자는 국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아 프로젝트 실행이 엉망이 되고 부패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 국영기업은 그들만의 동기와 계획을 갖고 있는데, 이는 BRI의 결과가 시진핑의 비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많은 중국 국내 기업들이 중국의 외교 정책 결정에 로비스트 역할을 하고 있다. 지역 지도자들은 각자의 뚜렷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앙 지도자들의 수사를 인용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국내 행위자들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입장을 취하도록 설득하고 오도한다.

예를 들어 윈난성 지도자들은 미국이 말라카 해협을 봉쇄하면 중국 경제가 마비될 것이라는 “말라카 딜레마(Malacca Dilemma)”개념을 전파했다. 윈난의 목표는 실현 불가능한 중국-미얀마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윈난에 경제 성장, 중앙 투자 및 부패 기회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윈난성 정부는 현지 대학 교수들과 인민해방군 지도자들을 동원해 이 아이디어를 중앙 정부 관리들과 지도자들에게 전달했다. 나아가 윈난성은 파이프라인 프로젝트 로비를 하기 위해 주요 프로젝트 실행자가 될 중국석유공사(CNPC, China National Petroleum Corporation)와 강력한 연합을 형성했다.

10년 동안의 집중적인 로비 활동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후진타오는 당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상대적으로 강력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2003년에 처음으로 말라카 딜레마 서술을 채택했다. 중국-미얀마 파이프라인도 시진핑 치하의 주요 BRI 프로젝트가 됐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이후 가장 강력한 지도자이지만 통치 방식은 다르다. 시진핑은 관료제를 전복시킬 수 없다. 그는 정책 결과를 제공하기 위해 그것에 의존해야 한다. 권력을 중앙 집중화하고 더 많은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시진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파편화된 권위주의( fragmented authoritarianism)로 인해 정책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디플러매트는 “중국을 단일 국가로 상상하는 것은 이러한 분열(fragmentation을 놓치게 되며, 모든 정책이 시 주석에게서 나온다고 믿으면서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중국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위험한 경향을 키우고 있다”면서 “정찰풍선(spy balloon)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분열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중국의 최악의 의도를 가정하는 것은 원치 않는 위험한 긴장 고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