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뭔지도 모르는 김정은이 7·27을 ‘전승70주년’이라고 떠벌리면서 심야 열병식 준비와 함께 중국·러시아·북한 3자 결속에 나서고 있다.
6·25 전쟁의 성격을 다시 짚어 보면, 6·25 기습남침 76일 전인 1950년 4월 10일 스탈린이 남침 전쟁을 승인하고 전쟁 발발 41일 전인 1950년 5월 15일 모택동에게 참전을 종용한 데 따라서 김일성에게 ‘미군 개입 시 중공군 파병’을 약속했다.
이로써 6·25는 단순한 김일성 남침전쟁이라는 차원을 넘어 1945년 9월 20일 하달된 국제공산당 수괴 소련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 지령의 연장선에서 스탈린 승인 아래 중공 모택동과 북한 김일성 3자가 모의하여 일으킨 ‘한반도적화’ 전쟁임이 명확해졌다.
개전 이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아군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대적인 추격 및 소탕 작전을 펼치면서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 본격적인 북진에 나서자 겁에 질린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택동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게 됐다.
김일성의 긴급구조요청을 받은 모택동은 군사지원요청을 수락하고 1950년 10월 19일 1차 지원군 26만 명이 압록강을 도강, 한반도 침략전쟁에 직접 개입했다.
아군의 추격전에 겁을 먹은 김일성이 1950년 10월 14일 평양을 떠나 한·중 국경지대로 승용차까지 버리고 도주하던 중, 1950년 10월 20일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만나 ‘작전권을 양도’함으로써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까지 전쟁은 김일성의 전쟁이 아니라 모택동의 전쟁이었다.
소련의 제의로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이 열렸으나 상방의 이해상충으로 지지부진하던 차에 1953년 3월 5일 국제공산당 수괴 스탈린이 사망하자 204만 명을 투입, 123만 명의 인적손실을 입고 군수 및 보급 등 전쟁지원능력의 한계에 봉착한 모택동이 패전을 시인하고 전쟁에서 진작에 물러나려 했다고 본다.
모택동의 경우는 힘에 겨운 국공 대결 끝에 1949년 10월 1일에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지 겨우 1년 만에 한반도적화 침략전쟁에 가세함으로 인해서 인적·물적 피해와 손실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유소기·등소평 등 주자파(走資派)의 득세에 위협을 수습하기 위해서 패배를 인정하고 휴전에 응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김일성의 경우는 중공지원군을 등에 업은 연안파 무정(武亭)과 남노당 박헌영에게 패전책임을 전가하느라 바쁜 나머지 권력 유지를 위해 반대파 제거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스탈린 사망으로 기댈 곳조차 없이 되자 일찍이 투항하고 만 것 이라고 본다
7·27은 승전기념일이 아니라 모택동의 패전·김일성의 투항 기념일이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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