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비밀 핵개발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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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비밀 핵개발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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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북한의 제7차 핵실험을 전후해 우리도 대응을 해야 하며, 그걸 위해 대한민국의 독자적 핵개발은 물론 한일 동시 핵무장 소리가 들려온다. 저들이 탄도미사일을 저렇게 여러발을 쏘고 또 쏘는 와중에 도발을 규탄한다는 말만해선 안된다.
이런 국면에서 1970년대 박정희가 핵개발에 나서서 9부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끝내 포기해야 했던 과정이 새삼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 독자 분들이 대강은 알고 있는 그 역사를 오늘 밝혀드릴 생각인데, 박정희의 표현대로 우린 당시 핵개발의 88%까지 올라갔었다. 9부 능선이란 게 맞다. 그게 1979년 2월인데, 당시 경제2수석 오원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핵개발이 88% 진척되었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럼 이게 무슨 얘기가 될까? 당시 우리는 핵무기는 갖지 않더라도 핵무장 기술력의 거의 전부를 확보해놓았던 상태였는데,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그게 유야무야됐다는 게 맞다.

지금도 1981년 10월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박정희가 핵보유국 천명과 함께 멋지게 퇴임하려 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는데 그래서 오늘은 정확한 얘기를 전해드릴 생각이다. 그리고 이건 비밀만은 아니다. 75년 6월에 박정희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건 엄포용이자 사실이기도 했다. “당장은 핵확산금지조약을 준수하고 있다지만, 미국의 핵우산이 철회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핵 개발을 시작했을까? 10월 유신 선포 전후였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이듬해 주한미군 2만명을 곧 철수하고 75년까지 완전 철수한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충격을 받은 박정희는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건 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대통령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건 10월 유신 선포과 관련이 있다. 핵개발은 한국경제가 중화학공업 시대로 전환한 1973년부터 본격화되서 당시 경제2수석 오원철에서 박정희는 "일본 정도의 핵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한다. 방식은 세 갈래였다. 프랑스에서는 재처리 시설을 들여오고, 캐나다에서 중수로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미국에서 발사체 기술을 확보해서 단박에 핵을 완성한다는 그림이었다. 정말 기민하게 움직였는데,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건 100%였다. 당시 갈등 관계에 있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끝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을 봐도 그렇다. 이 과정에서 역시 관건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우리의 핵 개발 노력을 안 것은 1973년 무렵이고 그들이 집요하게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그건 1970년대 당시 미 CIA 한국지부 책임자였고, 80년대 후반 주한 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가 국내 언론에서 확인해준 이야기다. 뭐라고 설득했을까? 여러분이 짐작하는 대로다. “우리가 북한으로부터 어떠한 공격에도 보호할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 "정 끝까지 가겠다면 결정적인 제재를 가할 수 밖에 없다”는 협박도 병행했다.
그럼 박정희의 핵 개발은 결국 실패한 것이냐? 그건 안 그렇다. 본래 목표가 핵개발 기술력 확보였고 때문에 사실상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한미 간 갈등을 불러들인 것도 사실인데, 문제는 그게 10.26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의 핵개발 기술력은 다 증발해버렸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국방과학연구소는 핵 개발의 산실이었는데 당시 보안사가 핵 개발 관련 자료를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한 뒤 그걸 폐기처분했는 것이 정설이다. 이건 뭘까? 미국은 핵개발 포기를 재확인 받고, 그 댓가로 신군부에 대한 승인을 해준 셈이다.
자 오늘 옛날 얘기를 반복하자는 게 아니다. 반세기 전 박정희의 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핵개발이었다면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마당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차원에서 우리도 핵개발을 언급하자는 게 내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10년 전 정몽준 전 의원의 발언에 주목해야 한다. “이웃집 깡패가 최신형 기관총을 구입했는데 돌멩이 달랑 들고서는 집을 지킨다고 할 수 없다”는 비유와 함께 핵무장론을 거론했던 거의 첫 정치인이었다.
그렇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든다고 한 게 30년 전이었다. 이 나라가 정상이라면 당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어야 옳았다. 동공 풀린 국민을 위해 핵 민방위훈련도 병행했어야 옳았다. 그렇게 분위기 만들고 공론장을 펼쳐 정치권이 결단하는 게 순서였다.

※ 이 글은 7일 저녁방송된 "박정희 비밀 핵개발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란 제목의 조우석 칼럼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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