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리카싱의 균열속의 특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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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리카싱의 균열속의 특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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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카싱의 인생을 좌우한 역사의 격량.
- 전설적인 성공인
- 리카싱, 중국 본토와 홍콩 투자 축소. 중국 언론 리카싱 때리기
- 부의 집중
끊임 없이 사이에 금이 가고 있다는 설이 난무한 오랜 세월의 특수관게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홍콩의 대부호 리카싱(사진 오른쪽) / 이미지 : 유튜브
끊임 없이 사이에 금이 가고 있다는 설이 난무한 오랜 세월의 특수관게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홍콩의 대부호 리카싱(사진 오른쪽) / 이미지 : 유튜브

<아래는 지난 1127일 로이터 통신이 홍콩발로 특별 리포트라는 이름으로 홍콩의 대부호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오래 동안 이뤄진 특수 관계에 관한 글이다. 시진핑과 리카싱의 과거의 돈독한 관계는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베이징과 홍콩 관계를 극적으로 일변시켰다>

지난 19931월 다소 통통한 뺨과 숱이 많은 흑발(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야심에 찬 39세의 중국 공산당 간부가 홍콩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2급도시인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푸저우(福州 : 복주)에 대한 투자자를 모집할 목적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고층 빌딩에서 홍콩 부유층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다.

그해 8월 시진핑은 현지에서 한 손님을 맞이한다. 홍콩에서 가장 저명한 거물로 뛰어난 비즈니스 수완으로는 홍콩에서는 초인으로 일컬어지는 리카싱(李嘉誠, 이가성, 1928년생)이 푸저우를 찾은 것. 당시의 사진을 보면 시진핑은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든 리카싱의 옆을 걷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소개했다. 그 배경에는 리카싱을 환영하는 메시지가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보였다.

그 당시 1989년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 : 천안문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부진에 빠진 경제 부양에 급급한 상태였다. 중국 국가 지도부도, 각 성의 유력자들도 중국 본토에서의 개발 프로젝트에 홍콩의 리카싱의 자금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보려는 경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시진핑은 지금 부상하고 있는 부유대국, 부유 강국으로 홍콩을 지배하에 두고 있는 중국의 독보적인 독재적 지도자이다. 시진핑은 지금 91살이 된 리카싱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반항적인 홍콩에서 리카싱이 자신의 책임을 다 이행하지 않는다는 논란이 일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베이징의 중국공산당은 리카싱이 2019년 여름에 시작된 홍콩의 항의 시위 행동에 현지 유권자들과 일치해 맞서기를 기대했으나, 리카싱은 공평하게 쌍방에 자제를 요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리카싱은 오히려 시위에 참가한 젊은이들을 인도적으로 대응하라고 온라인 동영상을 내보냈다.

이 같은 리카싱의 태도에 대한 반응은 격렬했다. 중국공산당 중앙법무위원회(党中央法務委員会)는 범죄행위를 은닉하며 홍콩이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며 리카싱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있다.

친정부적인 자세를 취하는 홍콩의 한 노동조합은 페이스북에 리카싱을 바퀴벌레의 왕이라고 야유를 퍼붓는 기사를 올리고 뚱뚱한 곤충에 리카싱의 얼굴 사진을 합성한 사진을 첨부했다. (‘바퀴벌레란 홍콩 경찰이나 홍콩의 캐리 람 정부가 시위에 참여한 시위대를 비야냥거리며 부른 말이다)

중국 정부를 등에 업고 있는 홍콩 정부가 거리로 나온 항의 시위자들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한편 거의 표면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또 다른 통제 강화도 진행되고 있다. 홍콩의 유력 인사들의 영향력을 잠재우려는 중국 정부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는 것이다.

리카싱을 비롯한 홍콩의 거물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제조업, 부동산, 금융 등을 통한 홍콩의 경제 발전의 흐름을 꿰뚫어 오랫동안 실권을 잡아왔다. 그러나 201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시진핑의 대두는 그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비즈니스 관계자나 애널리스트(분석가)들은 홍콩의 저명한 자본가가 비판을 받는 등 새로운 역학관계의 형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리카싱을 비롯한 홍콩의 유력 인사들은 정부의 뜻을 헤아려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 지배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는 항의 시위활동을 이구동성으로 비난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최근의 혼란의 도화선이 된 이미 공식 철회된 범죄인 인도법(이른바 중국 송환법)’은 홍콩에서 중국 본토로의 범죄 용의자의 인도를 가능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홍콩 변호사협회에 따르면, 중국송환법은 자산 압류 수단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성립되면, 홍콩의 유력자도,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 속에서 자산을 몰수당해온 중국 본토의 부유층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 송환법에 대한 항의 시위 활동이 활발해지고, 곧 홍콩의 부유층의 일부는 자금을 홍콩 이외의 지역으로 옮기거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계좌를 개설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수천 억 달러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는 프라이빗 뱅크 관계자 6명이 밝히고 있다.

* 리카싱의 인생을 좌우한 역사의 격량.

최근 몇 달 동안 리카싱에 대해 매우 혹독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러한 불화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항의 시위 활동이 홍콩을 뒤흔들기 전부터 리카싱은 이미 중국과의 경제적 유대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21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리카싱의 아성인 허치슨 왕포아(和記黄埔有限公司, Hutchison Whampoa Limited)이익의 상당 부분이 홍콩 중국 본토에서 얻어지고 있었다. 이자 지급, 세전 이익 전체의 56%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이 비율이 14%에 그쳤다. 2015년 이후 리카싱이 지배하고 있는 기업그룹은 세계 각지에서 합계 700억 달러(833,700억 원)이상의 기업 인수에 관여하고 있다.

리카싱 관련 5억 달러(5,955억 원) 이상 규모의 투자 안건을 로이터 통신이 분석한 결과 홍콩 중국 본토 투자액은 1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리카싱의 홍보 담당자는 이러한 수치에 관한 질문에 허치슨 왕포아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해외의 대형 인수를 추진하고 있어서 이러한 다각화에 따른 지리적인 비율이 변화했다면서 그렇다고 해도 중국 본토와 홍콩에서도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카싱은 이미 앞일 내다보고 중국 본토나 홍콩에서 비즈니스 규모를 축소해 온 것이다.

또 홍보 담당자는 2015년 그룹의 재편에 따른 현재의 허치슨 왕포아의 지역에서의 수익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리카싱의 거대 기업그룹의 전 메니징 디렉터(managing director)대부호인 리카싱을 수십 년에 걸쳐 알고 있는 사이먼 머레이(Simon Murry, 1940년생, 영국의 비즈니스맨)는 거액의 사업 이익을 중국의 직접적인 세력권 밖으로 옮기면서, 중국 본토의 당국자를 화나게 할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원래 홍콩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국 본토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머레이는 말했다. 그는 “(중국 본토의) 상대방과 인맥을 쌓아두지 않으면, 자산을 몰수당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역에서 은퇴한 리카싱에게 중국 정부와의 갈등은 극적인 변화이다. 197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중국을 지도한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장쩌민(江沢民, 강택민) 두 사람 아래에서 리카싱은 수십 년 동안 좋은 평판을 얻었다. 영국으로부터의 (홍콩) 반환(199771) , 홍콩 통치의 준헌법인 홍콩기본법을 기초하는 위원회에도 참가해, 최초의 행정부를 선택하는 기관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리카싱의 생애를 좌우해온 것은 홍콩이며, 그 경계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중국 역사의 격량이다. 그는 1928년 하천 도시인 차오저우시(潮州市, 조주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국 남부의 이 거리는 일본군에 의한 공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12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피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은 1941년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 점령 중에는 식량부족, 영양실조, 질병에 시달렸다. 홍콩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카싱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다. 15살도 되지 전에 리카싱의 어깨에는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덮쳤다. 그는 플라스틱 무역회사에서 하루 16시간이라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 전설적인 성공인

1993년 시진핑이 홍콩을 방문 한 뒤 리카싱은 당시 시진핑이 수장이었던 푸저우시를 방문해, 시진핑의 환대를 받았다. 대부호였던 리카싱은 푸저우시의 재개발 프로젝트에 관여했고, 시진핑과 함께 기공식에 참석해 초석(礎石,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리카싱은 중국에서 남다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홍콩 반환한 지 약 2개월 후인 19979월 중국은 과거 최대의 주식공개를 앞두고 있었다. 홍콩과 뉴욕에서의 상장을 준비하고 있던 국영 전기통신기업, 중국전신(中国電信, 차이나 텔레콤-China telecom)이었다.

이 회사의 상장을 지원하고 있던 홍콩의 유력자 그룹이 역내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던 금융위기 때문에 겁을 먹고 말았다. 그들은 1년간의 주식 보유를 의무화한 협정을 재협상하자고 요구했고, 아니면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주장했다. 주식 공개까지 불과 몇 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리카싱은 중국의 관료, 은행관계자들을 홍콩의 자신의 사무실로 초청했다. 배석한 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계약서에 이미 서명을 했고, 그것을 준수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리카싱은 더 필요하게 되면 더 많은 주식을 사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리카싱은 그 후 방대한 수의 중국 국유기업 상장에 의해 수십 억 달러를 조달하는 선례가 된 차이나텔레콤의 주식공개를 하게 됐다. 차이나텔레콤의 홍콩과 뉴욕 주식 공개는 트레이드마크인 커다란 검은 테 안경과 함께 리카싱이 전설적인 홍콩의 비즈니스맨이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 리카싱, 중국 본토와 홍콩 투자 축소

시진핑이 실권을 쥔 이후 중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강경한 방침을 채택했다. 중국 정부는 2014년 백서에서 홍콩이 현재 누리고 있는 자치는 지명한 것이 아니라 중앙지도부의 허가에 의한 조건부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 국영 미디어들은 리카싱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다.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까지 리카싱은 홍콩에서 등기했던 허치스 왕포아 기업을 카리브 해에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인 케이맨 제도(Cayman Islands)에 설립한 기업에 통합했다. 리카싱을 중심으로 한 경영진은 이 개혁은 합리화와 사업 계승 계획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20159월 이러한 움직임이 보도된데 이어 리카싱은 중국 본토 언론으로부터 애국심이 떨어지고 있다고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중국 공산당의 주력 기관지인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는 리카싱에 대해 일이 순조로울 때는 가까이 하면서 그 혜택을 다 누리면서, 어려운 시기에는 미덥지 못하다고 비판적 평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리카싱이 지배하는 기업들은 해외기업의 주식에 수십억 달러나 쏟아 붓는 한편 홍콩과 중국 본토에서는 계속 사업을 줄여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속도가 느려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2015년 이후 리카싱의 기업은 캐나다, 이탈리아, 호주와 같은 나라로 총 700억 달러 이상의 기업 인수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중국 본토와 홍콩에서 5억 달러 이상 규모의 기업 인수를 한 것은 단 1건으로, 홍콩에 기반을 둔 운수기업을 다른 2명의 투자자와 공동으로 84800만 달러에 인수한 것뿐이다.

또 동일한 시기 리카싱은 홍콩과 중국 본토의 4개 기업으로부터 110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회수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홍콩의 유력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투자만이 아니다. 홍콩에 있는 대기업 중국국유기업의 고위 간부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홍콩 엘리트 사이에 2017년에 열린 회동에서 시 주석이 말한 지시는 애매모호함이 없는 단도직입적인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 리카싱도 그 자리에 참석했었다는 것.

이 고위 간부는 시진핑의 메시지는 매우 명확했다고 전했다. “홍콩 재계와 유력 인사들은 사회적인 책임을 맡을 필요가 없으며, (베이징의) 중앙정부가 홍콩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것이 시진핑의 발언 골자였다고 한다.

* 부의 집중

홍콩에서의 항의 시위 활동이 홍콩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베이징 중국 공산당 정부의의 기대는 점점 더 급박해지고 있다.

저명한 재계 인사로는 캐리 람 (林鄭月娥, 임정월아. Carrie Lam, 1957년생) 홍콩 행정장관의 경제고문인 알렌 지만에 따르면, 중국 당국자들은 홍콩에서 부()가 일부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불만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영국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토지 경매제도에 의해 소수의 사람들이 시장을 독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있어, 다른 어느 누구도 입찰에 참가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가격이 상승해 버렸다고 말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홍콩의 집값은 너무나 비싸져 있으며, 가족은 협소한 주택에 살 수밖에 없는 처지로, 쾌적한 주거지로의 이사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토지 역시 일부 부호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것.

1997년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할 때 영국-중국 양국은 홍콩이 50년에 걸쳐 자체의 헌장에 입각하고,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기로 합의했다. 홍콩의 비즈니스맨들은 최근까지 중국이 완전한 통치권을 얻게 되는 2047년은 아직 먼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베이징 당국은 무리한 방침, 즉 빠른 시일 내 홍콩의 중국화를 이루려는 성급함이 사태를 변화시켰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홍콩 젊은이들은 홍콩인이지 중국인이 아니며, ‘홍콩의 중국화가 아니라 중국의 홍콩화가 되어야 한다면 국제적인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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