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단체 파업은 국가 암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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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단체 파업은 국가 암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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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총 구조와 행동방침은, 그 악랄했던 전평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해방 이전의 노동자들은 일제 경찰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남한 땅에 공산주의 집단을 처음 만든 인간은 안동 출신 김재봉이며, 이 자가 1924년에 처음 만든 공산당 조직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이 자에게 노무현은 2005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1946년 9월 총파업

▲ 철도노조파업 자료사진
1946년 9월 총파업은 소련의 배후조종과 당시 일화 200만엔의 지원을 받은 남한 빨갱이 집단이 9월 24일부터 미군정을 몰아내기 위해 한국경제를 인질로 하여 일으킨 전국규모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이 진압되자 소련은 연이어 일화 300만엔을 투입하여 10월 1일부터 대구로부터 시작해 전국폭동을 주도했다. 이 철도파업은 서울의 용산철도국 기관구 내에 본거지를 둔 공산분자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연이어 2개월에 걸쳐 전국을 공포의 살육현장으로 만든 대구 폭동 역시 노동단체들이 주도했다. “미군정의 철폐와 인민정권수립이라는 정권투쟁”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총파업에 대한 통일적 지휘를 위해 16개 산업별 파업투쟁위원회들이 결성되었고,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삼척, 마산, 군산 등 산업 중심지역에 지역별 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7,000여명의 부산지구철도로동자들이 열차운행을 중지시키고, 부산에서 사상역에 이르는 30리 구간에는 운행을 중지한 열차가 쌍줄로 꽉 들어찼다. 서울에서는 경성철도공장 3,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오전 9시를 기해 직장별로 종업원회의를 열고 파업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울역 노동자들과 함께 용산기관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용산기관구 농성자 수는 1만 3,000명이 넘었다. 서울, 부산, 광주, 목포, 대구, 안동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등 모든 철도가 마비되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뒤를 이어 체신, 전기, 금속, 광산, 해운, 교통, 운수, 화학, 식료, 섬유, 토건, 출판, 일반봉급자들이 모두 동참했다. 서울의 중앙전신국, 중앙전화국, 중앙우편국을 비롯한 25개 체신기관 4,000여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지방의 체신노동자들도 동참했다. 이로써 남조선의 우편, 전신 전화망이 일체 마비되었다. 경성전기회사 노동자 3,000여명도 파업에 돌입했다. 각 항구의 해운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전국적으로 26만 3,974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9월 30일 이른 새벽, 미제침략군의 지휘 밑에 탱크를 앞세운 무장경찰 4,000여명과 테러단이 용산기관구로 들이닥쳤다. 육박전이 4-5시간 동안 계속됐다. 미제는 40여명의 노동자들을 살상하고, 1,700여명의 노동자들을 대량 검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구에서는 좌익단체 대구노동평의회가 주동이 되어 철도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을 일으키려고,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내걸고 각 직장의 파업을 조종·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찰은 그 단체가 불법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동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파업조종자의 색출과 파업의 금지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졌으며, 이 사태가 대구의 10·1폭동사건을 유발한 직접적 원인과 동기가 되었다.

10월 1일 오후에 수천 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 금정로에 있는 노동평의회 본부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이 불법시위자들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며 제지했다. 이날의 데모는 밤늦게 진압되었지만, 군중은 2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은 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고, 경찰관이나 고급관리 및 사회 주요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완전히 폭도화 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당국은 2일 오후 늦게 대구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근 각지의 경찰병력을 집결시키는 한편, 미군부대의 응원을 받아 데모 진압과 치안 회복을 서둘렀다. 이 폭동의 완전 진압은 다음날 3일 충청남북도의 경찰병력 700여 명이 증파됨으로써 가능하였다. 당국은 이 폭동사건으로 희생된 자가 사망자 20명, 중상자 50명, 행방불명자 30명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구폭동사건을 계기로 삼남지방(三南地方)은 거의 무법천지로 변하였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그리고 제주도에서까지 연쇄적으로 크고 작은 소요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한 여파는 서울·경기 지방에까지 파급되어 산발적인 소요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개성·연백·홍성 등지에서도 소요사건이 벌어졌으며, 1946년 10월 22일에는 미군정청·서울역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 등을 습격할 계획이 있었음이 21일 밤 좌익단체 요원인 민청원(民靑員) 18명을 검거함으로써 밝혀졌다. 이 소요사건들은 모두 공산당의 지령과 공작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단순한 시위나 파업 등의 온건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대남공작역사책에는 대구폭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11월 중순까지 약 2개월 간이나 계속된 10월 민중항쟁은 73개 시군을 휩쓸었다. 10월 항쟁은 8.15이후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진행한 가장 대규모적인 남조선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이었다. 10월 민중항쟁에 참여한 남조선 인민 수는 2,273,438명이었다.(도별 인원수가 이 책 81쪽에 도표로 작성되어 있으나 생략함)... 항쟁대오가 가는 곳에는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 울려 퍼졌고 김일성장군 만세의 위대한 구호가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미제는 1만여 명의 노동자와 1만2천여 명의 농민을 위시하여 10월 항쟁에서 무려 25,000여명의 애국적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15,000여명을 검거 투옥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애국적 인민들을 산채로 손발을 잘라 죽이기도 하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항쟁기간 적통치기관이 파괴되고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어 행정권이 일시적이나마 인민들의 손에 장악 되었고, 미제의 앞잡이인 악질경찰과 반동분자들이 인민들의 손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이는 남조선인민 투쟁의 역사적인 쾌거였다.”

모두가 당시 소련이 키웠던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이 주도한 것들이었다. 오늘의 민노총 구조와 행동방침은 바로 그 악랄했던 전평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는 국가적 암덩이다. 이번 19일로 예정된 철도노조 및 민노총이 주도하는 파업은 이래서 반국가적이고 위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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