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세워 얼굴을 묻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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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세워 얼굴을 묻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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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97>천양희 "비오는 날"

 
   
  ^^^▲ 갈퀴나물
ⓒ 우리꽃 자생화^^^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Ⅲ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 같은 비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물동이로 내리 퍼붓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누군가의 슬픈 사연이 쌓이고 쌓이다가 마침내 한이 되어, 그 한이 드디어 하늘에 닿아, 비가 되어 그렇게 쏟아지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내립니다. 올 봄부터 시작된 비는 장마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창 밖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슬픈 기억 하나가 슬며시 다가와 그렇찮아도 우울한 마음을 툭, 툭, 건드릴 것만 같습니다.

시인은 비가 내리는 날,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문득 괴테를" 떠올리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번 문득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백화점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슬픔에 잠깁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견디기 위해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삽니다.

베르테르가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으로 변해 있는 그 자리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몰고온 승용차의 뒷꽁무니에도 "소나타Ⅲ"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시인은 그 승용차에 올라타면서 베토벤을 떠올리며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득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자동차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슬픔에 잠깁니다.

그러나 시인의 그러한 슬픔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베토벤의 소나타는 자동차가 되어 비가 내리는 강변도로을 세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때 문득 흔적도 없이 "무릎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가 떠오릅니다. 그 슬픈 표정의 여자는 고흐가 그린 '슬픔'이라는 그림 속에 나오는 그 여자입니다.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은 롯데백화점에 갔다가 뛰어난 예술작품조차 가격이 붙은 상품으로 둔갑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인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 여자, "무릎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의 그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또 하루가 깊은 슬픔에 잠겨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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