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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광역시 문화제 제 7호 충렬사^^^ | ||
1592년 4월 14일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대는 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도도히 흐르는 물결처럼 동래 앞 바다에 대마도의 장수 종의지(宗義智)를 앞세운 왜병들에 의해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장군은 결사적으로 분전하였으나 부산진성은 단 하루 만에 함락 당했다.
이에 다음날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병마사 이각(李珏)은 일찌감치 도망쳤고, 문관인 송상현공이 동래성 성루에 올라 다음날 다가올 전투상황을 孤城月暈 列鎭高枕(고성월훈 열진고침: 외로운 성루에 달빛은 흐릿한데, 펼쳐진 진성은 단잠에 들었도다.) 이라고 달레고 나서, 다시 지니고 있던 부채에 쓰기를 君臣義重 父子恩輕(군신의중 부자은경: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중하고, 부모 자식 간의 은혜는 가볍나이다.) 이라고 적어 하인을 통하여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하직인사를 대신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날 왜병들은 동래성을 에워싸고 있을 때 그는 관복을 갈아입고 북쪽의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다음 성루에 올라 앉아 적을 맞이했다.
이때 왜 적장은 동래성루 앞에다가 커다란 글씨로 戰則戰 不戰 假我道(전칙전 불전 가아도: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라는 글씨를 깃발에 써 올려 위협을 했으나 동래부사 송상현공은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은 열기는 어렵다) 하고 항전을 다짐 하였으나 밀려드는 왜적에 끝내 성은 함락되었다.
이에 송상현공은 의연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각오한 모습을 보고 감동한 왜장 평조익(平調益)은 그의 옷소매를 이끌고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그는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왜병의 칼에 죽으니, 그의 나이 41세였다고 한다.
송공의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된 두가지설
1551년 여산 송씨의 문중에서 태어난 송상현공은 일찍이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고 25세 되던 157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주로 중앙에 있으면서 호조ㆍ예조ㆍ공조의 정랑(正郞)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 동래부사로 전임된 것에 대하여 문관으로 이토록 전략적으로 중요하고도 위험한 곳에 내려오게 된 것은 그에게 중책이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좌천의 의미가 있었던 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송공은 10세에 경서에 통하고 26세에 문과에 합격하고 승문원 정자(정 9품)에서 158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정 5품)을 역임하고 재물관리의 책임자인 군자감을 맡는 직책에서 1591년에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동래의 도호부사(종 3품)로 부임하였다는 설이다.
어쨌든 그는 부임하자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성을 수리하고 성 외곽에는 커다란 나무를 심어 방어시설을 보강하고 군사를 훈련해 방어력을 한층 강화했다고 전한다.
이때로부터 역사상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그 참혹했던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고통의 수많은 사연들이야 어찌 다 말로써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은 적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죽어간 한 우국 충신(憂國忠臣)의 이야기로 말미암아 조선에 충효사상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의병 봉기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진성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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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진성순절도^^^ | ||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문루에 흑색 갑옷을 입은 전투를 독려하는 정발장군의 모습, 관사에 있는 애향의 모습,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의 모습 등 임진왜란 당시의 긴박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동래부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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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래부순절도^^^ | ||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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