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직후부터 10여 년간 구공산권을 돌아본 감상(感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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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직후부터 10여 년간 구공산권을 돌아본 감상(感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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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1992년 베트남 호치민시 렉스(Rex)호텔에서 당시 필자가 맡고 있던 대학 부설 산업경영연구소 주관으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베트남의 국장급 이상 고급 관리들에게 전수시키는 9일간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호텔 회의실 사정으로 350여 명의 신청자가 있었는데도 겨우 120명만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리고 강의는 원래 영어로 하기로 했었지만, 하루 해보니 의사소통이 안 되어 당시 베트남 외무부의 북한 과장으로 있는 사람을 서둘러 수배하여 통역으로 썼다. 그 과장의 월급은 당시 30달러였는데, 우리가 9일간 통역에 1000달러를 주기로 하자 그는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에게 그 금액은 참으로 횡재에 해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 팀원은 모두 13명이었는데 우리도 각각 1000달러씩을 체재비로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만큼은 주자고 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각자가 맡은 주제만 전달해 주면 되었으므로 일의 양에 있어서는 그와는 물론 비교도 안 되었다. 아무튼, 그는 하루 온종일 진행되는 격무(激務)에 거의 쓰러질 정도로 탈진상태였는데도 9일간의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마쳤다.

정산(精算)하는 날 그의 부인도 같이 있었는데 우리가 너무 수고했다며 그에게 500달러를 더 주자 그 부부가 서로 끌어 앉고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들의 그 우는 장면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필자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이 내가 접한 舊 공산권 사람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이었다.

1996년 몰디브라는 인도양상의 휴양지에서 몇 날을 지낸 적이 있었다. 바쁜 서울 생활을 떨치고 집사람과 단둘이 떠난 여행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했다. 인도양상의 고도(孤島)에서 현대적 문화시설을 접하며 태고(太古)적 고요와 한가로움을 동시에 즐긴다는 게 얼마나 행운이며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그곳에 마침 커다란 유람선 한 척을 빌려 여자친구들과 3개월여를 지낼 예정으로 와 있다는 약 30여 명의 러시아인 중의 한 사람과 잠시 얘길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유난히 눈동자가 이글거릴 뿐만 아니라 살기(殺氣)까지 느껴지던 그 친구에게서 그들이 범상한 친구들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선 방갈로 방들을 3개월씩이나 장기(長期)로 빌려서 사용하는데 드는 돈의 규모라든가 유람선까지 빌려 왔다는 사실부터 그러했다. 舊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는 곧 미국의 마피아들과 함께 무슨 비즈니스든지 다한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바로 그런 친구들이구나 하는 감이 들었었는데, 이것이 내가 두 번째로 경험한 舊공산권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었다.

2003년 겨울 태국 파타야 해변에 새로 지은 휴양호텔에서 한 달간 머물 예정으로 와 있던 20여 명의 러시아 중년층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해수욕을 하면서 자연스레 그네들에게 접근을 시도하여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스크바에서 온 휴양객들임을 알게 되었다. 1박에 100달러가 넘는 방을 단체로 사용하는 그네들의 씀씀이에서 그들이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의 기준으로도 대단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들도 마피아를 낀 비즈니스로 벼락치기 부자가 된 집안의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에서 빈부격차(貧富隔差)가 얼마나 심한가를 가름케 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돈의 여유는 있어 보이는 그들에게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무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오랫동안 공산주의 사회에서 감시(監視)와 주시(注視)를 당하며 살다 보니 저절로 무표정의 인간들이 되어버렸는가 보다. 그들 중에는 젊은 남녀도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약간의 감정과 표정을 담으려는 듯해 보였지만 그들도 대체로 그러했다. 아무튼,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마치 밀랍(密蠟)인형들 같았다. 저것이 바로 공산주의를 하던 나라의 모습이로구나 하는 인상을 짙게 갖고 태국의 휴양지를 떠나온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이것이 舊공산권 사람들에 대한 나의 세 번째 인상이었다.

2004년 여름 집사람이 겸임교수로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에 특강 차 갔다가 집사람의 눈에 이상이 생겨 연길의 한 안과병원엘 간 적이 있었다. 장사 일에서는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게 활력이 넘치고 있는 데 반해서 안과병원의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의사와 직원들은 친절이라든가 활력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뚝뚝함과 무기력뿐 이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을 그들에게 전하며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예산도 없고 또 열심히 그리고 친절히 할 이유가 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선 교수, 교사나 의사의 봉급이 거의 모두 똑같았기 때문에 어느 의사가 뭣 때문에 열심히 의술을 더 배우고 익히며 친절을 베풀겠느냐는 반문이었다. 이것이 舊공산권에 대한 나의 네 번째 인상이었다.

특강을 마치고 백두산과 두만강 하류 쪽으로 관광 아닌 관광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차 운전과 가이드를 겸한 중국 국적의 조선족 운전자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서로 만나는 지점까지 안내하면서 들려준 북한의 실상은 먹을 인육(人肉) 사체(死體)도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순간 귀가 멍하여 무슨 소릴 들었는지가 분명치 않았다. 충격적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진짜 못 알아들었던 건지 어안이 벙벙한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었다. 자기는 중국인으로 북한에 장사하러 자주 들어간다며 자기가 들려주는 얘기는 북한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생생한 얘기란다. 아무튼, 이 쇼킹한 얘기는 공산권 사람들에 대한 나의 다섯 번째 인상이었다.

연변에서의 특강을 마치고 장춘(長春)으로 올라가 그곳의 주교좌성당을 들러 볼 수 있었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성당이었지만 공산화되던 1930년대에 문을 닫은 후 50여년이 지난 1980년대 덩샤오핑이 재등장한 이후에야 다시 성당 문을 열었다고 한다. 80세가 넘었지만 준수해 보이는 그곳 주교와 한족(漢族)이면서도 조선족(朝鮮族)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배웠다는 중국인 신부 그리고 말은 서로 안 통하지만, 홍조 띤 얼굴과 친절을 담은 미소를 내보이던 두 수녀(修女)에게서는 그래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과 감정을 내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舊공산권 치하에서의 생활이 어떠했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에이~’ 하며 두 손을 내젓던 신부의 몸짓에서 舊 공산사회의 면모가 어떠했는가를 느끼는 듯했는데 舊공산권 하에서도 신념을 지켜 온 사람의 모습은 그래도 다르구나, 하는 것이 舊공산권 사람들에 대한 나의 여섯 번째 인상이었다.

필자가 서유럽에는 비교적 자주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중유럽과 동유럽권에 갈 기회는 2005년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오스트리아에서 국경을 막 넘어 체코로 들어서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엄청 두 나라가 달랐다. 수도 비엔나나 시골 어디든 거의 평준화된 듯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오스트리아의 경우와는 엄청 달리 체코의 시골은 거의 방치된 폐허 상태였고 그래도 프라하는 고풍스러운 고도(古都)의 면모만은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와 시골의 차이는 비단 체코만이 아니라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등 모두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산이념과 계획경제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탓에 피폐해진 모습이었는데 자본주의 경제권에 편입되면서 잃었던 활력을 되찾고자 애를 쓰는 모습들이 당시 내가 접했던 舊공산권 사람들에 대한 일곱 번째 인상이었다.

2007년에 경영학 영어 학점강의를 요청하는 몽골국제대학의 요청에 따라 여름방학 때 3주간 울란바토르에서 강의해줄 기회가 있었다. 우리 일행을 위해 그곳에서 마련해준 숙소는 러시아인들이 사용하다 舊소련연방 해체 후 1990년대 중반에 버리고 간 아파트란다. 그곳 설명으로는 울란바토르 시내의 주택 중에서 가장 고급에 해당한다며 방을 안내해 주었는데 밤에 도착하여 세수부터 하려고 수도꼭지를 튼 순간 잿빛 물이 계속 쏟아지는 것이었다. 수도관을 손가락으로 누르니 쑥 들어가는 것이, 배관 후 한 번도 교체가 안 돼 쇠 수도관이 다 썩었단다. 쇠가 썩을 대로 썩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얘길 필자는 전에 누구로부터든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식수만 정수기를 달아서 마시고 세수는 하지 말란다. 손만 씻었는데 아침에 보니 손 피부가 갈라져 있었다. 이것이 내가 접한 舊공산권에 대한 여덟 번째 인상이었다.

필자 일행은 하는 수없이 숙소를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제일 좋다는 진기스칸 호텔로 옮겼는데 다행히 그곳의 수도관은 4성급 호텔이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길게 호텔에 체류하는 바람에 커다란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그때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 한 명이 서울로 유학 와서 석사를 마치고 현재 국내 벤처회사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는 게 조그마한 결실이라면 결실이라고 여기고 있다.

2011년 7월 중국 난까이(Nankai)대학과 북경대학에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에 대한 특강과 세미나를 마치고 하얼빈에 있는 어느 사목자를 방문하려고 북경에서 하얼빈까지 철도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만주 벌판이 얼마나 넓은지도 확인할 겸 그리고 고구려의 진원지에도 발을 밟아보고 싶은 생각에서 선택한 철도여행이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인구가 살다 보니 중국의 철도가 엄청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연유인즉슨 열차 특 1호실이었는데도 화장실을 이용하려니 3~40년 전 우리의 모습이 다가왔기에 말이다.

비가 내리는 밤 하얼빈에 도착해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만나기로 한 분을 늦은 시간에 방문하게 되었다. 5층짜리 아파트 4층에 우리나라 돈 몇억에 해당하는 금액을 주고 구입했다는 그의 집을 올라가는 계단은 너무 어두워서 필자는 여러 번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니 복도의 분위기와는 180도 다르게 방안은 그래도 잘 정리되어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수돗물을 틀자 몽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잿물만이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접한 舊공산권 사람들에 대한 아홉 번째 인상이었다.

지난 1992년부터 약 10여 년간 여러 형태로 구공산권 사람들을 접하면서 필자는 유물론/무신론의 공산이념(共産理念) 기치 아래 계획/통제된 사회체제에서 1/N(결과의 균등: equality of consequence)이 강조될 때 결국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실감 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기회균등(equality of opportunity)과 경쟁과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주는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생생하게 체감(體感)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공산당 치하에서도 장춘 주교좌성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처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도 영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네들을 보면서 '진리(眞理)가 너희를 자유(自由)케 하리라(The Truth will set you free)'라는 말이 필자에게 새삼 새롭게 다가왔던 일이 바로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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