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지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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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지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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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1965년 서울상대 졸업과 공군중위 제대 후 KIST를 비롯한 정부출연연구소에서 15여 년간의 연구 경험을 가지고 한양대에서 시작한 교수생활 30여 년을 마치고 정년이 된지도 어느새 15년이 훌쩍 넘었다.

정년 이전에는 물론 정년 후 명예교수로 가끔 특강할 때에도 일단 강의가 시작되면 학부 학생이건 대학원 석·박사과정 학생이건 옳고·그름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 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필자가 가르치는 경영학에서 기업은 항상 우수한 성과를 일궈 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 성과를 옳은 방법을 통해서 일궈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옳고·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은 비단 기업의 경우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개인 레벨이든 조직 및 국가레벨 어디서든 시시각각 부닥치는 문제이지만, 오늘날처럼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는 기업성과를 옳은 방법으로 일궈져야 한다는 것은 그 어느 것에 앞서서 강조되어야 할 기본 명제로 인식해 왔던 것이다.

창조론에서는 창조주께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에게만 지력(intellect)과 자유의지(free will)를 은총의 선물로 주셨다고 전한다.

그런데 자유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으면 사람들은 속으로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자유의지란 각자가 맘먹은 대로 무엇이든 다할 수 있는 자유일 뿐만아니라 자기가 맘먹은 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온 우주는 창조 때 정해진 자연질서/자연법칙대로만 작동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로는 자연질서/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를 것이냐 말 것인가의 선택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한정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는 각자가 맘먹은 대로 무엇이든 다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우선 하나의 사실(fact)에 대한 가치판단(value judgment)은 다음과 같이 나눠볼 수 있다 (Matthew 5:37).

i) 사실이 사실이므로 이를 진실로 판단하는 경우

ii) 사실이 아니므로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경우 이들은 옳은(right) 가치판단임을 알 수 있다. 한편

iii) 사실인데도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경우는 알파(α)/Type I 오류이며

iv)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는 베타(β)/Type II 오류이다.

 

이제 가치판단의 문제를 다음의 사례를 통해 좀더 확대하여 보자.

 

1억 원 빚진 사람과 5억 원 빚진 사람이 빚 탕감을 받았을 경우 누가 더 감사할까요?

1)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감사해 할 것이다.

2) 더 적게 탕감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

3) 탕감받은 금액의 다과(多寡)와 무관하게 다 똑같이 감사할 것이다.

4) 탕감받을 때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5) 각자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6) 잘, 모르겠다.

7) 감사할 이유가 뭐 있느냐, 언제 탕감해 달라고 했느냐?

8) 위의 모든 주장이 다 받아들여져야 한다. 등의 8 가지 주장들이 나온다.

 

여기서 위의 빚 탕감에 대해 개진된 주의·주장들을 나타내는 용어를 찾아보자.

1)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감사해 할 것이다 (공리 axiom)

2) 더 적게 탕감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 (회의론 skepticism, 컽꾸미는자)

3) 금액의 다과와 무관하게 다 똑같이 감사할 것이다 (평등주의 egalitarianism)

4) 탕감받을 때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상대주의 relativism)

5) 각자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개인주의 individualism)

6) 잘, 모르겠다 (불가지론 agnosticism)

7) 감사할 이유가 뭐 있느냐, 누가 언제 탕감해 달라고 그랬냐 (공산주의 communism)

8) 위의 모든 주장이 다 받아들여져야 한다 (다원주의 pluralism)

 

이들 주장들을 놓고 논리적으로 접근해 볼 때

i) 위의 의견 중 옳은 의견이 아예 없을 수도 있겠지요? 물으면 모두가 동의한다.

ii) 그런데 만약 이들 중에 옳은 것이 있다면, 나머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물음에는 그른 것들이라고 답한다.

iii) 그리고 빚을 탕감 받은 하나의 사실(fact)에 대하여 개진된 다양한 견해들 중에 참으로 옳은 진실(truth)된 것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어느 것이 참으로 진실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간 모두는 지력(intellect)을 통해 옳고·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또한 판단결과를 따를 수도 안 따를 수도 있는 자유의지(free will)의 주체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지력을 사용하여 앞의 개진한 주장들 중에 과연 참으로 옳은 것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를 추적해 보자.

'500 데나리(denarii: 로마제국 통치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용했던 화폐단위)를 탕감 받은 사람과 50 데나리를 탕감 받은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감사해 할 것인가'라는 예수의 질문에 그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며,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라는 답변에 ‘옳은 판단이다(You have judged rightly)’(Luke 7:41-43) 라는 명쾌한 판단기준을 제시해 준다.

만약 이 명쾌한 판단기준이 없었다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라는 의견만이 참으로 옳은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들이 더 감사할 것이다’ 라는 옳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어떤 세상일까? 그곳에서는 이견이나 다툼이나 전쟁이 일어날 수 없겠지요. 그런 세상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곳이겠지요

(2)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들이 더 감사할 것이다’ 라는 생각과 다른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요? 각자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므로 그 세상은 뒤죽박죽 뒤엉켜 돌아가는 대혼란과 혼돈의 세상이겠지요.

(3) '누가 탕감해 달라고 했느냐, 내가 왜 감사해야 하느냐'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감사하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산주의 집단이겠지요.

(1)번에 속한 사회는 올바른 절대적으로 옳은 하나의 판단기준을 갖고 있으므로 항상 평화로울 것이다.

한편 (2)번과 (3번)에 속한 사회에서는 상대적인 많은 가치판단기준들로 인해 줄곧 갈등과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겠지요.

이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가 그간 보여 온 바와 같으며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물론 이때 각자에게 왜 그런 의견을 갖느냐고 물으면 모두가 다 나름대로 명쾌한 주의 주장의 배경과 근거를 갖고 자기의 의견만이 옳다고 강변한다. 탕감받은 엄연한 하나의 사실을 보는 견해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각자는 자기 의 견만이 절대로 옳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각자가 옳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도덕 다원주의(moral pluralism)와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그르다는 것이 없다는 도덕 상대주의(moral relativism)가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현실상황에서 누구든 자기의 주장을 결코 굽히려 들지 않는다.

만약 한 사안에 대하여 옳고·그름을 상대적 기준을 기초로 판단하는 경우 동일한 사안을 놓고서도 어떤 때는 옳고 다른 때는 그르고, 또 여기서는 옳았었는데 저기서는 그른 것이 되고 (이런 현상을 ‘내로남불’ 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하는데, 그 연유는 이를 자꾸만 읊어주면 이를 당연시하는 그릇된 풍토가 되어 버릴까 봐서), 또 이 사람에게는 옳고 저 사람에게는 그른 것이라는 판단이 무수히 생길 것이고 그래서 사회는 결국 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사회는 끝없는 대 혼란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서 송사(訟事)가 급증할 것이고, 그래서 많은 판검사와 변호사도 급증해야 하고 또 송사건의 반(半)은 죄인으로 판결될 것이므로, 감옥의 수와 교도관들의 수도 또한 급증해야 할 것이며, 이 와중에서 로스쿨(law school)만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직과 순수와 진실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혼란 앞에서 불안에 떨 것이며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이 불안 공포 해소를 위해 계속 뭔가를 절제 없이 먹다 보니 대부분이 비만(肥滿)형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이 1965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미국에서 벌어져 왔다. 미국은 1776년 독립과 더불어 줄곧 그리스도의 청교도 정신(puritanism)에 입각한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을 그들의 헌법에 담고 있었는데, 1960년대 초중반에 수정헌법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 대신에 종교다원주의와 도덕상대주의라는 가치판단 기준을 수용했다.

도덕 상대주의가 수용된 지 50여년 이상 지나는 사이에 미국은 송사(訟事)대국, 변호사대국, 로(law)스쿨 호황기를 거치며 비만(肥滿)대국으로 전환(crossover)되면서 급격하게 국가경쟁력을 잃어 왔다. 그리고 많은 이들 특히 국가지도급에 있는 이들이 사랑(love)대신에 동성애, 아동성애자 등 별별 회귀한 작태를 통해 육욕(lust)만을 탐닉하는 괴물들로 바뀌었고, 미국 전역은 만물의 주인(Master) 대신에 돈(money)을 섬기는 돈의 노예들로 넘쳐나며, 창조주(Creator)대신에 사탄(Satan)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사회 곳곳에 넘치는 참으로 기괴한 나라로 미국이 확 바뀌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시대에 미국은 종교 다원주의와 도덕 상대주의의 최대 희생(犧牲)국이 되었고, 모든 악을 전세계로 퍼뜨리는 종주국이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참으로 옳은 하나의 의견과 다수의 그른 견해들이 뒤범벅인 세상에 속하여 죄와 정의와 불의와 심판과 자비와 사랑이라는 낱말들을 무수히 되뇌며 온갖 이설과 괴설로 서로 잘났다고 큰소리치기도 하고 또 기고만장 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하여 참으로 옳은 것은 하나뿐이라는 절대적 가치판단기준을 따르지 않는 한, 아무리 그럴싸한 매력적인 말들로 풍성한 ‘말 많은 세상’은 될지언정 옳음과 그름이 뒤범벅인 세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가치판단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다음의 사례를 보기로 하자.

“어느 집 주인이 막일꾼을 구하려고 오전 7시에 나가 일당 $60로 품삯을 정하고 일을 하도록 하였다. 일꾼이 더 필요하여 9시에 나가보니 일거리 없이 서성이는 사람이 있기에 그에게도 ‘당신도 우리 집에 가서 일을 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당신에게는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도 일하러 갔다. 집주인은 일꾼이 더 필요하여 낮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도 나가 각자 일한 만큼 품삯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다.

오후 7시가 되자 집주인은 모두를 불러놓고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맨 처음 온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각자의 품삯을 주기 시작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60을 받았다. 그래서 오전 7시부터 일한 사람은 '자기는 더 받으려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3시에 온 사람도, 12시에 온 사람도, 오전 9시에 온 사람도 그리고 맨 처음 오전 7시에 온 사람도 모두 $60씩을 받았다. 그러자 오전 7시에 온 사람이 "막판에 와서 두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하루 종일 수고한 나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하고 따졌다.

그러자 그 집주인은 그에게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60로 정하지 않았소? 나와 정한 품삯을 이미 받았으니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사람들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하였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내 후한 처사(자비)가 왜 당신의 눈에는 불의로 보입니까"하고 말해 주었다.

이야기의 요지를 마치고 필자는 그들에게 ‘각 일꾼들의 노동의 질이 동일하다'는 전제 하에 다음 질문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였다.

1) 귀하가 오전 7시에 온 사람이라고 할 때, 주인이 모든 일꾼들에게 각각 60불을 지급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만을 느끼는가, 느낀다면 그 이유 는? 불만을 안 느낀다면, 그 이유는?

2) 귀하가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 또는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고 할 때, 오전 7시에 온 사람의 일당이 $60임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금액을 정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일한 만큼 품삯을 준다는 주인의 구두 약속에 따라 귀하가 요구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라고 생각하는가?

3) 일한 만큼 품삯을 받은 경우를 정의(justice)라고 부른다면, 만약 일한 만큼보다 덜 품삯을 받은 경우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의가 실현이 안 되었으므로 정의가 결여 된 불의(injustice)일까? 또 만약 일한 만큼보다 더 품삯을 받은 경우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더 받은 것만큼은 거저 받은 것이므로 자비(charity)일까?

4) 어떤 물건에 대한 임의 처분 권한이 자기에게 있을 때 이를 자기소유(自己所有)라고 한다면, 자기소유에 대한 임의 처분을 누구로부터 강요받을 수 있는 건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사유재산권이 인정되는 자본주의와 인정되지 않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5) 당초 약속보다 덜 받은 불의를 당한 경우라면 당연히 정의의 몫까지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자비를 못 입었다고 해서 자비를 강요할 수 있을까?

위의 경우에서 남이 얼마를 받든 간에 제일 일찍 온 사람이 당초 약속대로 받 은 경우엔 정의(justice)의 몫을 받은 것이고, 정의의 몫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기 때문에 역시 당연하다고 느끼겠지요? 

만약 약속보다 덜 받은 경우 예컨대 $60을 받기로 한 사람이 $40 또는 $50 또는 $59을 받았다면 못 받은 만큼 불의를 당한 것이고 그 때에는 기분 나쁘고 억울하며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이며, 그래서 못 받은 몫을 꼭 받아내려고 하겠지요?

그리고 만약 약속보다 더 받은 경우, 예컨대 당연히 받을 $60보다 $10 또는 $20 을 더 받은 경우는 자비를 입은 것이고, 자비를 입은 것만큼 기분 좋고 감사하다고 느끼겠지요? 그러면 자비를 못 입은 경우에는 어떻게 느낄까요? 자비를 입으면 감사하고, 못 입으면 그만 일뿐, 왜 자비를 베풀지 않느냐며 불평하 거나 억울해 할 이유가 있을까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의(justice)의 몫을 받았을 땐 당연하다고 느끼고

불의(injustice)를 당했을 땐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며

자비(charity)를 입었을 땐 감사하다고 느낀다는 견해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명제이겠지요.

그러면 이 보편명제에 기초하여 일한 시간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60씩 받았을 경우 각자가 어떻게 느껴야 될까를 보기로 하지요.

우선 오전 7시에 온 사람이 $60을 받았다면 당초 약속대로 받았으므로 당연하다고 느낄 것이고,

오전 9시에 온 사람이 $60을 받았다면 (단위시간당 노동의 질이 동일하고 오전 7시 에 온 사람이 오후 7시까지 12시간 일하고 $60 받았으므로 시간당 품삯은 $5임), $50 의 정의의 몫과 $10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10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 하고

12시에 온 사람이 $60을 받았다면, $35의 정의의 몫과 $25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25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 하고

오후 3시에 온 사람이 $60을 받았다면, $20의 정의의 몫과 $40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40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 하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60을 받았다면, $10의 정의의 몫과 $50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50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 한다.

따라서 모두가 $60씩 받았을 때, 아무도 불평하거나 억울해 할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일찍 오전 7시에 온 사람일지라도 당초 약속대로 다 받았기 때문에 '그냥 당연하다'라고만 느끼면 그만이지, 불공평하다거나 억울하다고 느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불공평하며 억울하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렇게 느끼는 그만큼 그의 생각은 그른(wrong) 것이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을 존중하는 세상 편에 설 때라야만 자유의지의 고귀한 값을 치를 수 있음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그른 생각을 갖고 말하고 행동하면 결국 그른 결과가 올 것이며, 반대로 옳은 생각 을 갖고 말하고 행동하면 옳은 결과가 오겠지요. 왜냐하면 자연계 안에는 뿌린대로(Give) 거두는(Take) 정의의 질서가 엄존하고 있기에.

거짓과 거짓말과 가짜와 허위 그리고 조작과 뒤집어 씌우기로 나라 전체를 장악한 양아치 조폭 수준의 반국가무리들이 날뛰는 상황이, 총선을 앞두고 반전(反轉)의 기미가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가치판단의 문제를 다루는 필자의 논리에 대해 험악할 정도로 거칠게 항변하던 제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제자들이 정년 후에도 그때 교수님의 그 옳고·그름에 대한 가치판단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며 그간 자기 삶의 지표가 되었다는 반응을 보내올 때면 교직을 천직으로 주시고 옳고·그름,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 공정과 불공정, 빛과 어둠을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 지식과 깨달음을 주신 하느님/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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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we 2023-11-25 15:24:18
멋진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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