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한강교의 운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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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한강교의 운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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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6월 28일, 새벽 2시 40분!

^^^▲ 운명의 6월 25일 새벽^^^
운명의 28일, 새벽 2시 40분!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기관총, 박격포 소리와 함께 대포의 요란한 폭음이 서울 거리를 뒤흔들고 있을 무렵, 노량진 폭파 지휘소와 한강교 위에는 공병감 최창식대령이 직접 지휘하는 1개 중대의 공병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또 1개소대의 공병대는 한강교 북방의 전초 진지에 배치되어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새벽 두시..새벽 두시 반.. 바로 이때 새벽 정적을 뚫고 갑자기 폭파 지휘소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괴뢰군 탱크가 출현하였습니다”라는 한강 북방 초소의 전초병의 숨가쁜 보고가 폭파 지휘소의 전 장병을 긴장시켰으며, 결정된 폭파 시간보다 2시간이나 먼저 적의 기갑 부대가 출현하였다는 보고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사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한강 북방 초소에서 극도의 긴장과 초조한 공포 속에 적의 내습을 지키고 있던 초병이 서울을 철수하는 기마 순경대의 말굽소리를 적의 탱크소리로 착각, 이를 확인할 사이도 없이 당황하게 보고한 것이니, 한 초병의 착각이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큰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폭파 지휘소에서는 지휘관인 최창식 대령에게 즉시 연락하고자 하였으나 폭파 시간이 아직 여유가 있는 탓으로 지휘와 작전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그는 마침 현장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휘소에 있던 장교들이 지휘관을 대리하여 폭파 단행의 임의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6월 28일 새벽 2시 40분!

드디어 다이나마이트에 연결된 스위치가 눌러지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국군의 작전은 약 1주일간의 여유를 얻었다고 하였으나, 잔인 무도한 적구의 손아귀에 무참히 죽어가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살벌한 암흑의 적 치하로 납치되어간 수십만의 원혼들이 울부짖는 원성은 하늘에 치솟고 땅 끝까지 스며 영원히 사라질 수 없었다.

그 후 3개월 동안을 적의 만행 속에서 갖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서울시민들이 하늘같 믿었던 정부와 국군의 비인도적이고 무모한 처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과 원성은 아무도 달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부는 높아만가는 국민의 원성과 비난의 여론에 못이겨 당시 폭파 책임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켜 공병감 최 대령을 부산 임시수도에서 군재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다. 1950년 9월 21일 최창식 대령은 부산 교외 어느 한적한 들판에서 총살을 당함으로써 한강 폭파의 책임을 혼자 지고 만 비극의 제물이 되었다.

그리고 최 대령에게 한강 폭파를 직접 명령한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이 보다 앞서 7월에 하동전선에서 전사하였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명령에 충실한 군 장교를 총살함으로써 한강교 폭파의 책임을 면한 듯 태연하였으나 역사는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그들의 비인도적 처사를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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