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중경상자가 나왔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대구 폭동을 계기로 하여 영남 일대는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피의 함정이 된 듯 하였다. 당국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대구에서만 사망자20명, 평생 동안 반병신이 된 중상자 50여 명, 그리고 생사를 알길 없는 행방불명자가 30명이 넘었다.
(이상은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 발표) 이 가공할 폭동사건을 전후로 하여 경상남북도 전역은 물론 전라도, 충청도, 심지어는 제주도에까지 발악적인 민란이 구석구석 파급되어 갔다. 미리부터 조직적인 지령과 폭동계획으로 많은 군중을 동원하는데 성공한 좌익계는 시종 파괴행위로써 각지 경찰서를 습격할 뿐만 아니라 방화와 살상을 일삼고 주요 전신 전화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마비시키도록 책동 하였다.
계엄령은 대구시뿐만 아니라 경주, 달성, 영일 등지에 까지 확대 선포되었다. 미군부대의 지원 아래 경찰이 겨우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전례 없는 대폭동은 사건 직후 여러 모로 수사가 진행된 결과 그 이면에 숨은 조종자들을 캐낼 수 있었다. 폭동직후 사건 현장을 재빨리 탈출하는데 성공한 주모자들은 38선을 넘어 월북하려는 계획에서인지 서울 부근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기미를 알아차린 수도 경무 총감 장택상은 10월 중순에 이르러 어느 날 밤 경찰관 3천여 명을 총동원시켜 시내 성동구, 용산구, 서대문구를 중심으로 검문 검색하도록 지휘하면서 “남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전부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샅샅히 검색한 결과 대구 의대생 한증선 등을 포함한 30여 명의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그런데 대구폭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일대 소요사건에서 폭동협의를 받고 경찰에 검거된 자는 무려 3천 7백 82명이라는 숫자를 돌파하였고, 엄중 취조를 받은 결과 3백 22명이 군정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미군정에서는 일반 군정재판의 체형이 최고 5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사건 피의자들을 모두 특별 군재에 회부하는 등 법석을 떨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특별 군재에서는 사형까지 구형할 권한이 있었던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계엄령이 해제된 다음에도 계엄사령관이 관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몸서리쳐지는 이 대구 폭동은 일종의 민란의로써 잔학무도한 행위가 그대로 폭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아 좌익계의 계획적인 음모가 작용한 것이지만 굶주림이 대중을 폭동으로 몰아 넣었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튼 최대의 원인은 민생고가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행정상으로 보리 농사에 대한 지나친 과세가 가져온 폐해로 지적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절망과 정치적인 착오에 기인한 관에의 불신풍조가 더욱 무르익게 된 것은, 해방직후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친일파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된 것 같다. 일부 경찰에까지 일제의 잔재가 뿌리 뽑히지 않은 채 있었다는 것은 민중의 격분을 사기에 알맞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38선이 작용한 비극적 소산이었다는 점이다. 대구 폭동 도중에 한때 “김일성 장군이 진격해 온다”는 따위의 낭설이 떠돌았는데 그것은 피를 본 군중을 더욱 노기충전 시키는 구호이기도 했다. 굶주림 때문에 각처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방으로 갈수록 무지막지한 폭동의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면장이니 군수니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습 당하여 중태에 빠졌는가 하면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 영천 같은 지방에서는 군청과 경찰서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이 대구 폭동으로 영남 일대 뿐만 아니라 남부 각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좌익계의 준동은 가는 곳 마다 중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데 맹위를 떨친 것이다.
폭도들은 탈취한 경찰관의 무기를 트럭에 감추어 비밀리에 다른 장소로 운반하면서 대규모의 폭동을 획책하기에 바빴다. 그것이 나중에 당국에 발각됨으로써 사건은 그럭저럭 일단락을 맺기에 이르렀다. 뒤에 대구 폭동의 주모자로 한일청, 조병욱, 박윤호, 구본룡, 구자익, 장현사, 황춘만, 나윤출 등이 단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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