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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장간에 기술개방의 문이 열렸다. 서로 공장을 견학하게 되니 배울 점이 많았다. 최신 기계도 도입하게 되었고 새 공법도 쓰게 되었다. 보는 것이 배우는 길이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수출 7개년계획 작성과 집행
다음은 품목별 수출진흥책이다. 필자는 수출특화 품목에 대해 품목별로 담당관을 지명한 후 이들로 하여금 수출 7개년계획을 작성케 했다.
1964년부터 71년까지의 기간이다. 1971년이 제2차 5개년계획의 마지막 연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성해서 갖고 온 7개년계획을 보니 안전위주의 계획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안전위주의 목표설정은 공무원으로서는 당연한 습성이었다. 괜히 높이 책정했다가 목표달성을 못하면 책임이 떨어지게 마련이니 화를 자초하게 되는 꼴이 된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특공대원들이오. 수출을 늘리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파산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오. 우선 일본이나 대만이 수출하고 있는 품목의 연도별 수출액을 참고로해서 작성하시오. 이들 나라가 수출하는데 우리나라라고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소. 그리고 애로사항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서 각 공업분야를 국제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우리공업국 직원이 해야될 책임이 아니오"라며 격려를 했다. 다시 작성해서 갖고 온 7개년계획은 의욕적이었다. 중요한 수출상품 중 몇 가지 예를 든다.
면방제품 수출
1963년 당시 제조업 전체의 취업자는 40만1,981명. 이중 섬유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수는 10만9,456명으로 전체 제조업종사자의 27.2%이다.
제조업 종사자 4명중 한명꼴로 섬유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생산액은 22.6%, 부가가치는 20.0%를 점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섬유공업은 수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시설이 문제였다.
면방직공장은 우리나라 공업의 대표적 공장인데, 이미 감가상각 연도를 초과한 시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40년 이상 된 고철더미 같은 노후시설도 적지 않은 수에 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방 후 미국정부는 무상 또는 장기유상으로 원면을 원조했다. 매해 3천만 달러 이상의 원면이 도입되었다. 그런데 이 원면 배정 과정에서 업자간에 이해관계가 생긴다. 원면 배정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이권이 되던 시절이다. 많이 받아야 이익이 많다.
그러니 업자간에 싸움이 나고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체면도 예의도 없이 관계당국에 애원하고 미국 원조기관에 굽실거렸다. 몇 년을 이렇게 싸우고 난 후 결론이 나왔다. 시설용량 비례로 원면을 할당한다는 궁여지책이었다.
이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무슨 수를 쓰든 자기 공장의 시설 용량을 키우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기계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기계 목록에만 들어가면 시설용량이 증가하고 그만큼 원면 배정을 더 받게 된다. 그래서 40년 이상 된 고철도 한몫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제품이 모자라는 판이니 최신기계를 도입할 필요도 없고, 사람은 싼 임금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생산성 향상에 대한 의욕이 있을 리 없다.
그때 자료를 보면 면사(綿絲)를 한 고리(면사의 양을 재는 단위, 梱) 만드는 데, 우리나라는 13.7인 필요한데, 일본에서는 6.32인이면 족하다. 같은 양을 만드는 데 꼭 두배의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다(註: 제품은 모자라는 판이니 비싼 값으로 날개돋치듯 팔렸다. 이것이 원면, 설탕, 말가루의 三白폭리사건의 메커니즘이다).
면방업계는 한국의 면방직공업 기술이 낙후된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각 회사에서는 서로 비밀로 했다. 각 공장에는 못쓰는 노후기계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면 원면확보 때 말썽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간의 공장견학은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공부에서는 서로의 공장을 견학시킴으로서 기술의 개방과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서 수출을 증대시키고자 전국 면방공장의 공장장회의를 상공부 회의실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각 공장장이 모여 꽤나 많은 숫자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공부 회의실은 윗손님을 모시는 곳이었다. 그런데 작업복을 입은 '쟁이'들이 우르르 모인 것이다. 박충훈 장관은 총무과장을 불러 무슨 회의인데, 작업복 입은 사람이 우글거리느냐고 물었다. 총무과장이 알아보니 섬유과에서 소집한 회의라고 한다. 섬유과장(안영철)은 박장관에게 보고를 하였다.
"우리나라 면방기술을 향상시키려는데, 면방기술도 기술이라고 서로 비밀로 합니다. 그래서 첫 회의를 연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각 공장을 돌아가며 현지에서 열 계획입니다." 박장관이 "그래, 지금은 국제경쟁 시대인데 아직도 정신들 못 차리는구만. 싸움은 외국 면방업계와 해야 되지 않아. 사장들도 설득해" 하고 격려를 해 주었다. 박장관의 격려에서 힘을 얻어 회의가 진행되었다.
공장장들은 사장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고 모두 소극적이다. 그래서 안과장은 "그렇다면 협조 안하는 공장은 면방직 부속품 수입할 때 명단에서 빼 버리겠소"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말에는 모두 꼼짝을 못했다. 그 보고를 들은 사장도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돼서 겨우 공장간에 기술개방의 문이 열렸다. 서로 공장을 견학하게 되니 배울 점이 많았다. 최신 기계도 도입하게 되었고 새 공법도 쓰게 되었다. 보는 것이 배우는 길이었다.
정부에서 섬유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전환해 가면서 최신 기계들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리당 소요인원 13.7인이 1965년에는 8.28인으로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계속 새 기계로 대체해서 5.25인까지 내려갔으니 우리나라도 국제수준에 올라가려면 많은 문제점을 해결해야 했다. 이것을 7개년 동안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다.
우리나라 섬유 기계 시설은 일정시대에 설치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숫자가 꼭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총 직기를 100으로 치면, 해방 후인 1947년부터 1952년까지 5년간 새로운 설비를 한 것은 2.1% 정도였다.
이것이 6.25 전쟁 때 많이 파괴되었고, 전쟁 후 복구기간인 1957년까지 40.2%를 새 기계로 설치했다. 그 후 5년간, 즉 1962년까지 5.6%를 새 기계로 대체했다. 그렇다면 40.2% + 5.6% 즉 45.6%만이 쓸만한 기계이고 나머지 54.4%는 일정시대의 노후기계라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수출용으로 쓸 수 있는 시설은 5.6% 정도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기반으로는 수출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헌 기계 없애기 작업'을 했다. 물론 수출하는 업체가 우선이다. 1968년까지 4년간 노후기계 33.6%를 최신 기계로 대치해 버렸다. 면방직 공업의 대수술을 한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고급 천, 특히 합성섬유와 혼방(混紡)할 수 있는 기본 시설도 완비되어 수출용 봉제품에 대한 원단공급이 가능해졌다. 면제품은 어떤 의미에선 원재료이다. 옷을 만드는데 쓰이는 원료이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가공해서 수출해야 국가에 이익이 된다. 그러나 면제품 자체의 수출도 늘어갔다. 1963년에 478만 달러, 64년에 1,278만 달러, 1968년에는 2,109만 달러 수출했다.
봉제품 : 와이셔츠에서 드레스까지
섬유과 직원에게 봉제품 공장을 안내하라고 했다.
도착해 보니 돈암동 근처에 있는 삼호방직 계통의 공장이다. 공장 내부로 들어가 보고 한마디로 놀랐다. 장관이었다. 수백명의 젊은 여성들이 재봉기 한대씩 맡아 똑 같은 자세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위치도 바둑판 같이 전후 좌우로 일직선이다. 사람이 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럴 틈이 없어 보인다. 바느질 손놀림이 어찌 그렇게 빠른가. 재봉기 돌아가는 소리가 꼭 소나기 오는 빗소리 같다.
검사실로 갔다. 검사원 아가씨가 "금년은 작년의 배를 수출할 계획입니다"라고 자랑했다. 모두 의욕에 차 있었다. 내가 만든 제품을 수출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모두 20세 전후의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국력이 여기 있구나 하는 감명을 강하게 받았다. 열심히 도와 주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새로워졌다.
공장장실로 가서 질문을 했다.
"기계는 전부 일제지요?"
"예, 아직 전기식 재봉기는 국산이 안됩니다."
"천은 전부 수입합니까."
"국산천은 아직 멀었습니다. 고급 천도 안나옵니다. 외국에서는 합성섬유와 면을 혼방한 천이 나오는데, 우리는 아직 생산을 못합니다. 염색도 문제가 있구요, 색깔을 맞추어 오라고 해도 '필'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릅니다."
"재봉기 실은 국산화됩니까."
"국산실은 자주 끊어지고 꼬여서 못씁니다."
문제점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첩첩산중에서 헤매고 있는 꼴이다. 상공부로 돌아오자마자 재봉실만이라도 해결하라고 엄명을 했다. 결국 동일방직에서 해결했다. 2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섬유과에서 다시 작성해온 수출 7개년계획은 의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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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장간에 기술개방의 문이 열렸다. 서로 공장을 견학하게 되니 배울 점이 많았다. 최신 기계도 도입하게 되었고 새 공법도 쓰게 되었다. 보는 것이 배우는 길이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봉제품이란 와이셔츠, 아동복, 원피스 등 재봉틀을 밟아서 만드는 모든 제품을 말하는데 1963년에 8만 6,000달러를 수출했다. 10만 달러도 안된다.
그런데 1964년에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7개년계획에서는, 1971년에 5천만 달러를 수출한다는 안을 세웠다.(<도표 6-10> 참조). 단일품목으로 5,000만 달러는, 1964년 우리나라 총수출액이 1억 2,000만 달러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이다. 나는 안과장 손을 잡고 "좋소, 같이 뜁시다. 애로사항은 적극 해결합시다"라고 했다.
봉제품 수출은 1964년에 403만 달러, 1965년에는 700만 달러가 목표였는데, 1,152만 달러를 수출했다. 1968년에는 5,118만 달러를 수출하여 드디어 5,000만 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기적적인 숫자이다. 결국 7개년계획을 3개년 앞서 목표량을 달성했다.
메리야스와 경편직물의 수출
메리야스란 실 한가닥으로 만든 의류를 말하는 것으로, 일상 입는 티셔츠, 팬티, 양말, 장갑, 스웨터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외에도 천을 짤 때, 보통은 경사(經絲)와 위사(緯絲) 두 가닥 실을 사용해서 짜는데, 경편직물(經編織物)이라는 천은 한 가닥의 실로 짠다. 이것도 메리야스 제품에 포함된다.
메리야스도 수출 7개년계획을 수립했는데, 지금 그 원본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전항에서 설명한 봉제품과 큰 차이가 없으니, 7개년 목표가 5,000만 달러 수출로 되었을 성 싶다. 1963년에 65만 달러를 수출했고, 1964년에 많이 늘어 320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봉제품 수출과 거의 같은 액수이기 때문이다. 근소한 차이나마 메리야스 수출이 좀 적은 숫자이다.
1965년도에도 봉제품 수출이 1,152만 달러인데 비해 메리야스 수출은 1,109만 달러였다. 그런데 메리야스 제품의 수출이 1966년부터 급격히 증가했다. 2,519만 달러를 수출하여 봉제품 수출 1,606만 달러를 900만 달러나 앞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1968년에는 6,538만 달러를 수출하여 봉제품수출 5,118만 달러를 1,400만 달러나 앞질렀다.
특히 스웨터의 수출이 급신장하여, 1968년에 4,300만 달러의 수출을 한 것이다. 이 중 특기할 것은 「스웨덴」으로의 수출로, 1966년에는 849만 달러 어치를 이 나라에 팔았다. 동년 1,525만 달러가 스웨터의 총수출량이니, 스웨덴 한 나라에 총수출량의 56%를 판 것이다. 스웨덴 사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한국산 스웨터를 입고 있다고 스웨덴 신문에 난 것이 이 무렵이다.
7개년계획 원본은 없어졌으나 몇 가지 숫자는 남아 있다. 예를 들어 1971년에 스웨터 139만 5천 타스, 즉 1,674만매를 생산하여, 그 중 67%인 94만 1천 타스를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경편직물도 2만 6천 킬로미터를 생산하여 이중 59%를 수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두 업종 모두 생산량의 60~70%를 수출한다는 것이니 수출 업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1967년에 1,541만매, 68년에 3,023만매의 스웨터를 생산해 냈으니, 7개년 계획 목표(1,674만매 생산)를 3, 4년 앞당겨 달성한 결과가 된다.
나는 당시 삼각지 근처에 있던 미원산업이라는 스웨터 수출공장에 들렀다. 여사장이 안내했다. 공장에는 긴 작업대가 있고, 그 양쪽에 여공(여자기능사, 당시는 여공으로 불렀다)들이 앉아, 열심히 수를 놓고 있었다. 천에 수를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웨터 위에 각종 색깔의 털실로 큼직한 무늬를 뜨개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꽃도 있고, 동물도 있고, 집 모양도 있었다.
제품 진열실로 갔을 때 여사장이 말했다. "스웨터 값을 제대로 받으려면 디자인이 중요합니다. 같은 모양은 일시에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모양을 소량씩 만들어야 합니다. 바이어가 와서 소량, 다종을 주문하기 때문입니다." 그 진열장에는 그 해의 새 디자인 100여 가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옳은 이야기라고 동감하였다.
모(毛) 제품 수출
해방이 되자 의류수요가 급증하였는데, 특히 남자 옷 즉 양복의 수요가 늘었다.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전시효과까지 가세하였다. '마카오신사'가 명동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양복천은 인기품목으로, 갖은 경로를 통하여 밀수입되었다.
이렇게 되니 모직물 제조 의욕도 점차 커져갔다. 그러나 아직은 미미한 단계였다. 모방직공업의 요람기라면, 역시 6.25휴전 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 원조로 모방직 시설이 도입되던 단계이다. 이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모방직공업의 출발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63년만 하더라도 모방직공업 종업원 수가 9,628명으로 제조업 전체 종업원수 약 40만명의 2.4% 수준이었다. 섬유공업 전체의 종업원수 약 11만명의 8.8% 정도이다. 생산액도 제조업 전체의 0.36%, 섬유전체의 1.6% 정도를 차지하는 공업이었다.
이 풋내기 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니,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섬유과장에게 우선 제1단계(3년간)로 모직물 500만 달러 수출계획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런데 500만 달러 수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답변이었을 것이다.
모직물 수출액은 1962년에 불과 506 달러, 1963년에는 1만 600 달러였다. 당시로서는 500만 달러란 모직물 수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라는 것이다. 애로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일본은 얼마나 수출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자료를 가지고 왔다. 그 자료가 지금은 구할 수 없어 정확한 숫자는 모르나 1억 달러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한다(예를 들어 1965년 일본은 미국에만도 6,414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이것을 지적하니, 안과장이 "해봅시다. 밀고 나가 보지요" 하며 계획을 다시 짜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과욕적이었다. 1968년에 700만 달러, 1969년에 1,300만 달러, 1970년에 1,900만 달러, 1971년에 2,300만 달러.
그러나 용기를 내어 뛰면, 갈 곳까지 가겠지 하고 우선 목표로 정하고 밀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 79만 달러를 수출했는데, 1965년에는 318만 달러, 1967년에 455만 달러로 늘기는 늘었지만 템포가 늦다. 1968년에 500만 달러를 넘었으나 목표 미달이다. 1971년에 2,300만 달러 수출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1970년에 728만 달러의 실적을 올림).
그간 최신기계를 도입했고 생산성도 높였다. 예를 들어 소모방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 데 일본이 0.4시간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0.46시간으로 그 차이는 만족할 만했다. 울톱(Wool Top)제조도 일본 0.16시간에, 한국 0.17로 거의 비슷하다. 물론 국내 최신공장의 경우에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수출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양복지는 고급 생활품으로 어떤 의미에선 사치품에 속한다. 값이 싸다고 무한정 팔리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사가는 사람의 기호, 촉감, 색상, 디자인 문제에 걸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수하면 값이 싸다, 비싸다 따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촌놈 냄새를 빼야 팔리는 것이다. 비로소 "디자인도 국력이다"라고 느낀 것이다.
디자인은 국력이다
이 해(1965) 한일 무역실무자 회의가 상공부에서 열렸다.
나는 디자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회의가 끝나자 한 일본인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디자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한국도 많은 진보를 했다고 생각되는군요. 디자인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수 없는 분야라서,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디자인은 유행 따라 변하니까요. 아니 오히려 디자인이 유행을 창조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마운 이야기였다.
견직물 수출도 같은 문제점에 봉착하였다. 이태리 실크나 태국 실크는 잘 팔리는데 한국제는 인기가 없다. 그래서 외국의 미술가를 초청해 보았다. 몇 가지 디자인을 했다. 불국사의 에밀레종을 보고 그 종에 새겨진 천녀(天女)를 디자인한 것이다. 바탕은 엷은 다(茶)색이었다. 다들 좋다고 했다. 그러나 한 두명의 외국 '디자이너' 가지고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서울대 미술대학을 찾아갔다. 이순석(李順石) 교수를 만나 이에 대한 대책을 상의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첫째, 무드조성 목적으로 상공 미술대전을 매해 개최한다. 상금은 국전과 같은 액수로 한다.
둘째, 디자인센터를 설립한다.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모아 업계를 도와준다.
우선 포장지의 디자인부터 시작한다. 당시의 포장지는 외국사람에게 보이기에 창피할 정도였다. 그리고 글씨 디자인도 하기로 했다. 글씨(로고) 역시 마찬가지 상태였던 것이다(註: 색동저고리처럼 5색의 줄무늬가 있는 포장지가 가장 유명했고 가장 널리 사용됐다).
셋째, 각 대학에 디자인과를 신설한다.
상공미술전은 다음해부터 개최하였다. 1966년 8월 3일부터 22일까지 20일간에 걸쳐, 그 첫 회가 덕수궁 뒤 전시관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제품 디자인부와 회화식 디자인부, 두 부문으로 출발하였다. 내용은 아직은 초보단계였다. 어린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 제 구실을 하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심사기준을 두가지로 정하도록 시달했다.
첫째, 수출을 돕는 디자인. 그렇다면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디자인 이어야 한다.
미술품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디자인으로 대량생산을 해서 수출액이 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대상을 받아야 한다. 나는 필리핀의 목공예를 예로 들었다. 필리핀 정부는 매해 목공예 콘테스트를 하며 당선작에는 큰상을 주고 그 작품을 양산해서 팔게 한다. 당연히 필리핀 목공예의 수준이 높아지고 관광선물로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한국의 전통미를 살릴 것. 그 첫째 과제는 한국을 선전하는 포스터, 즉 관광용포스터로서 제목은 '한국으로 오라'(Come to Korea)로 정했다.
그러나 이 포스터는 몇십장의 응모작이 있었지만, 쓸만한 것이 없었다. 다음해도 똑같은 제목을 걸었는데 당선작은 안 나왔다. 10년을 노력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2001년 돼서 'Welcome to Korea'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멋진 포스터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후지산(富士山)', 벚꽃 같은 소재가 없다는 것일까. Come to Korea라는 포스터도 없는 우리나라에 관광하러 오라고 어떻게 권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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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람회장을 둘러보는 귀빈들상품의 품질 향상을 통해 수출을 늘리고 무한한 아이디어를 시스템화하는 디자인 분야에 산업계 및 일반의 관심과 이해를 깊게 하기위해 1966년부터 商工美術大展(상공미술대전) 을 매년 개최했다.^^^ | ||
디자인센터 해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장소 얻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서울대 의과대학이 쓰고 있던 동숭동 대지를 확보했다. 지금의 한국디자인 포장센터 자리이다. 예산을 확보, 건물을 짓는 데 5년이 지나갔다. 입소식은 1970년에야 이루어졌다. 디자인센터 초대 이사장은 이순석 교수, 상공미전 초대 심사위원장도 이 분이 수고했다.
그리고 각 미술대학마다 디자인과가 처음으로 신설되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인과라는 학과는 따로 없었고 공예과나 도자기과에 속해 있었을 때이다. 그리고 디자인과는 세분되어 갔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디자인은 그 후 엄청난 발전을 했다.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다. 특히 여성들의 활약이 크다.
홀치기 수출
'홀치기'란 말은 일본말을 될수록 사용하지 말라는 정부 지시에 의해 1968년경에 새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지금 '홀치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65년도 무역통계에는 의대(衣帶) 제품으로 나온다. 즉 의복과 허리띠라는 말인데, 일본말로는 '시보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보리'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 전량 수출하기 위해서 제조했다.
일본에서 시보리는 천년 이상의 역사가 있다. 일본사람 모두가 쓰는 옷감은 아니다. 최고급천으로 귀족만이 쓸 수 있는 선망의 대상품이었다. 명주는 원래 얇은 천인데, 이 천을 좀 두텁게 보이게 하면서 각종 문양을 짜 넣고 염색한 것이 시보리이다.
이 문양은 기계로 짜 넣는 것이 아니라, 수공업적으로 한바늘 한바늘씩 일일이 짜 넣어야 하는 것이다. 수를 놓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수는 다른 실을 덧붙이는데, 시보리는 생지 자체를 가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없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값이 아주 비싸다.
우리나라 여자는 고래로 수를 잘 놓았다. 아주 섬세한 수도 문제없었다. 그러니 이 '시보리' 작업에는 안성맞춤이었다. 1969년 통계를 보니 11만 2천명의 여자가 이 작업을 했다. 대단한 인원이다. 숙련공만도 9만 2천명이나 된다. 경상북도가 4만 6천명, 전북이 2만 5천명, 경남이 1만 8천명, 충남이 1만 3천명이다. 장소만 있으면 어떤 곳에서도 작업할 수 있다. 농가에서도 할 수 있다. 부업으로 안성맞춤이다. 전통적으로 수놓는 고장인 전북에 2만 5천명이 되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 홀치기 작업의 모체 공장이 되는 시보리 가공 공장도 51개로 늘어났다. 여기서는 (1) 도안을 한다. (2) 조형(造形)을 한다. (3) 원단을 짠다. (4) 원단에 풀을 먹인다. (5) 시보리할 그림을 그려 넣는다. (6) 가장 중요한 '홀치기'작업을 한다(이 작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데 바로 이 공정을 '홀치기'하는 사람에게 하청을 주는 것이다). (7) 표백과 염색을 한다. (8) 남는 실 정리를 한다. (9) 마지막으로 다림질을 한다.
시보리 제품은 1964년에 9만 달러를 수출했다. 65년에 115만 달러로 껑충 뛰었고, 66년에 287만 달러, 67년에 1,442만 달러로 1천만 달러 단위를 넘었다. 68년에 1,824만 달러, 69년에는 2,587만 달러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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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치기 가공공장에서 여자 종업원들이 홀치기 천에 문양을 짜넣는 모습여자가 노동력의 주류를 이루던 1960년대 "수공업 시절"에는 홀치기 제품이 對日수출의 주종으로서 외화가득의 총아가 되었다.^^^ | ||
이렇게 수출이 되니 국내 생사(生絲) 공급 문제가 생겼다.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양잠 장려를 실시하였다. 좋은 경향이다. 어떤 곳에 돌파구가 생기면 좋은 영향이 번져가는 것이다.
'임팩트 폴리시'의 진면목이 나오는 것이다. 임팩트 폴리시는 임팩트를 가한 곳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돌을 다루는 석공이 큰돌의 성질을 알고 망치로 일격을 가하면, 그 큰돌이 두개로 갈라지는 격이다. 어느 곳에 일격을 가하는가를 아는 사람이 명석공(名石工)이다. 아무 곳에나 망치질을 한다고 해서 돌이 깨지는 것은 아니다. 힘만 들지 효과는 없다.
공업단지 건설과 가내공업센터의 운영
「수출체제로의 전환」정책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될수록 많은 수출공장을 될수록 단시간에 건설, 수출액을 늘여야 했다.
그래서 각 도마다 20만∼30만평의 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각 도는 제각기 공업 단지의 규모를 크게 하기를 원했다. 정부(당시 상공부)는 「인력」공급계획에 의해 결정해주기로 했다. 그 결과 서울, 인천, 대구, 경남만이 충분한 인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증거(註: 군(郡)에서 제출한 취업희망자 통계)를 제출했다.
서울의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인천 수출공업단지, 대구 공단, 마산 수출 자유지역 등이 창설된 후로도 계속 확장되어 나간 연유이다. 이에 비해 다른 지방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광주 공단의 예를 들면, 도청이나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의 열성은 대단했다. 도유지 약 100만평을 제공, 이를 공단화해서 낙후된 공업기반을 일시에 향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공장대지가 팔리지 않아, 결국에는 연탄공장이 9개나 들어서게 된다. 내가 현지 확인차 방문해서 들은 이야기,「딸자식은 바깥 세상을 구경시키지 않고 시집을 보내야지, 어디라고 공장에서 일하게 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이라는 것이었다.
여성 인력에 대한 노동가치관이 지방마다 특색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부득이「가내공업」정책을 쓰기로 했다. 각 도마다「가내공업센터」를 설립, 여기서 기술교육을 실시한 후 작업은 각 가정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뜨개질」이나 「홀치기」 등은 수출공장에서 재료를 받아 집으로 가서,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일을 해서 납품을 했다. 이 정책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기혼 여성들이 대거 참여해서 수출에 큰 몫을 했다.
가발수출
당시 박충훈 상공장관은 상공인과 자주 대화를 나누어야 되겠다고 느꼈다. 상공인은 불평도 많고 애로도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장관을 면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장관 스케줄은 매일 같이 빡빡하다. 공식행사가 우선이다. 그러니 면회 신청을 해보았댔자 "좀 기다리셔야 되겠습니다"라는 비서관의 말밖에 듣지 못한다. 좀 기다리라는 것이 한달도 되고 두달도 된다. 그래서 장관 면회가 안 된다는 불평이 나온다.
박충훈 장관은 일주일에 하루(오후)를 상공인과 면회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장소는 상공회의소. 장관실에는 계속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이다. 면회하는 사람의 선정은 상공회의소에 맡겼다. 상공회의소에서 면회신청인의 내용을 알아보고 상역업무, 공업업무로 분류하여 날짜를 따로 정해준다.
1965년 초여름, 나는 박장관을 수행하여 면회장소인 구(舊) 상공회의소 2층 간부회의실로 갔다. 그 날 면회 신청자는 5명 정도였다.
첫 번째 면회자는 서울통상의 최준규(崔俊圭) 사장이었다. 당시는 중소기업자였는데, 나는 그때 처음 만났다. 최사장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상한 물건을 내 보였다. 나일론실 같은 것을 수십개 묶어 한다발로 한 조그마한 물건들이다. 길이는 담배 길이 정도일까. 색깔도 여러 가지여서 순백색부터 조금씩 황색기를 띤 것, 순황색, 갈색까지 50~60종이 되었다.
최사장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장관님, 이것이 가발 원료입니다. 이것으로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자는 건의를 올립니다." 박장관은 신기해서 만져보았다. 사람의 머리카락 같지가 않았다. 최사장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머리카락은 검은 색 아닙니까. 그래서 우선 탈색을 해서, 순백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각종 색으로 염색하는 것입니다. 이 물건이 바로 염색한 우리나라 머리카락입니다."
햇볕에 반사하여, 반짝이는 우아한 색깔은, 검은 머리카락만 보아온 나의 눈에는 이것이 머리카락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최사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머리카락을 원모상태로 수출했습니다. 원자재로 일본에 판 것이지요. 가발을 만드는 것은 완전히 수공업적 작업입니다. 여자가 손끝으로 머리카락 하나 하나를 꿰매야 합니다. 지금 일본이나 홍콩에서는 가발 제조 붐이 일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한발 늦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저렴한 인건비로 맞선다면 충분히 경쟁이 가능합니다. 수출가득액도 거의 100%입니다. 인모 수출하는 것보다 가발로 만들어 수출하면 2~3배의 수출증가가 됩니다"고 말했다.
박장관은 신기하기도 하고, 수출이 된다니 흥미가 커진 듯했다. 그래서 "얼마나 수출할 수 있소?" 하고 물었다.
"가발은 과거 선진국에서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흑인여성에게도 인기입니다."
"흑인여성이 노란 가발을 쓴단 말이오?"
"아니지요. 흑인은 검은색 가발을 씁니다. 결국 미장원에서 소비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자는 것입니다. 수요는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박장관이 "최사장, 무엇을 도와줄까요?"하고 물으니, 최사장은 단지 "원모 수출을 금지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이때가 우리나라 가발공업의 출발점이다. 박장관도 나도 가발은 아직 보지 못했을 때이다. 그 날 처음으로 가발 만드는 원료를 보았을 뿐이다.
가발은 1964년에 처음 수출되었다. 1만 4,000 달러 어치였다. 1965년도는 155만 달러로 거의 100배에 이르렀으나, 액수로는 크지 않았다. 가발업체는 7~8개로 늘어났다.
그런데 그 해 연말 큰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정부가 중공산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국제정치적 결정이다. 일본이나 홍콩은 중공산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고 있었으니 원료길이 완전히 막혀버렸고, 미국의 가발시장은 우리나라가 독점하게 되었다.
이런 행운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하늘에서 떡이 떨어진 것이다. 가발업체는 단숨에 40여개사로 늘어났으며 기술자 스카웃전쟁이 일어났다. 어떤 업자는 홍콩 기술자를 밀입국시키기도 했다.
수출액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1966년 1,062만 달러, 1967년 1,978만 달러, 1968년 3,055만 달러, 1969년 5,336만 달러, 1970년 9,357만 달러로 급증했다. 1970년에는 약 1억 달러로 우리나라 총 수출량의 9.3%를 점했다. 단일품목으로는 의류와 합판 다음으로 제3위가 됐다. 물론 가득액에 있어서는 단연 톱이었다. 이때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가발장사를 했다. 미국 내에서 가발 하면, "코리안"을 연상하던 때였다.
이때쯤, 세계은행 맥나마라 총재가 우리나라에 왔다. 당시 세계은행은 우리나라의 젖줄과 같은 존재였다. 귀중한 달러를 꿔주는 중요한 기관인 것이다. 그래서 총재의 스케줄은 공식행사로 꽉 채워졌다. 문제는 총재 부인인데, 부인이 원하는 견학코스의 첫 번째가 한국의 가발공장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안내하기로 결정되었다.
나는 부인을 모시고 구로공단에 있는 서울통상 가발공장으로 갔다. 부인은 공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움찔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을 보니 멍한 표정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듯 했다. 가발공장이라고 하면, 10여명의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가내공업적으로 만드는 광경을 연상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지금 유럽에서는 아직도 이런 식으로 만들고 있으니까(물론 고급품이다).
그런데 그 공장은 격납고 같은 큰 공간이었는데 그 속에서 1,000여명의 여공들이 유니폼으로 단장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전부 20세 내외의 젊은 처녀들이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잠시 후 부인은 공장을 돌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여자들의 손끝이 어찌 그리 재주가 좋은지. 그리고 어찌 그리 손놀림이 빠른지,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천에다 꿰매는 솜씨는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부인은 그저 "원더풀, 원더풀"만 연발하였다.
후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그녀는 몹시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날 호텔로 돌아간 후, 맥나마라 총재에게 가발 공장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미국에 돌아 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세계 최대 가발공장을 구경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서울통상에서는 방문기념으로 그녀에게 금발 가발을 선물로 주었다.
<후일담> 국가이익에 반하는 덤핑경쟁
가발공업도 얼마 안가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 업자끼리 덤핑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서로 싸구려 만들기 시합을 했다. 값은 순식간에 폭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이나 일본의 가발공장은 끄떡도 안 했다. 고급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장이 살아남는 길은 품질향상의 길뿐이다. 싸구려 경쟁을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은 왜 이렇게 될까?
일본업자는 약삭빠르다. 이런 점에서 존경 받아야 한다. 중공산 머리카락에 대해 미국에서 수입금지령을 내리자 일본업자는 즉시 인조 머리카락을 만들어 냈다. 소위 '가네가론'이란 섬유이다. 이 섬유는 외관상 인모(人毛)와 흡사하나 인모보다 장점이 많다.
예를 들면 한번 파마하면 반영구적이며 세발 후 빨리 마른다. 더욱이 가발을 제조할 때, 미싱으로 두르르 박으면 가발이 된다. 그래서 가격도 싸게 만들 수 있다. 일본인은 원료인 '가네가론'을 독점적으로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보았다.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은 '가네가론' 본사에 가서 줄을 섰다. 가네가론 배급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은 약았다. 모든 업자에게 주면, 한국사람은 또 싸구려 경쟁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6개 업자에게만 주었다. 그리고 덤핑을 못하게 하기 위해 덤핑한 회사에는 원료인 가네가론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6개 회사는 돈을 벌었다.
그러나 '가네가론과 비슷한 원료가 개발되자 덤핑경쟁은 또다시 시작됐다. 수출초기에는 40~50 달러하던 가발은 단돈 3만 달러로 떨어졌다. 한국사람끼리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한 것이다. 그 결과 가발공업은 한국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한심한 작태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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