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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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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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업국가 건설 계획 (下)

 
   
  ^^^▲ 박정희 대통령 1966년 상공부 초도순시 모습이 회의에서 석유화학공업 추진 결정이 내려졌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공업입국 계획도 (I)

상공부 공업제1국(화학 및 섬유, 중소기업 등을 담당, 국장 오원철)은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석유화학을 건설키로 계획을 수립, 장관의 재가를 맡았다(1965년).

그리고는 경제기획원과 교섭을 했는데 그 반응은 신통치가 않았다. 경제기획원의 주장은 종합제철건설은 朴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인데 종합제철과 석유화학건설을 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둘 다 수행하기에는 국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견해였다. 그리고는 석유화학은 추진 안하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공부는 朴 대통령에게 직소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그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이럴 때 朴 대통령은 1966년 1월 18일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를 바라보는 장기 구상을 발표하면서 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공업화를 이룩하겠다, 즉 공업구조를 마무리 짓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서 「석유화학건설에 대한 브리핑을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생각했다.

연두교서가 끝나면 朴 대통령은 3부 요인과 함께 각 부서를 「초도순시」한다.
각 부서에서는 장관이 과거 1년간의 업적과 당해 년도에 대한 계획을 보고한다. 그 다음에는 각 국장이 소관업무에 대해서 과거 1년간의 실적과 당해 연도의 계획을 브리핑하게 된다. 국장으로서는 국가원수에 대해 직접 설명하게 되니 이 기회가 대통령으로부터 인물 및 능력심사를 받는 자리가 된다. 그러니 각 국장은 보고서 작성 그리고 예행연습에 연말 연초를 초 긴장속에 지나게 된다.

나는 朴 대통령의 초도순시 때 석유화학건설에 대한 브리핑을 하기로 결심. 준비를 했다. <도표 3-8>은 당일 브리핑한 도표이다.

 

 
   
  ^^^ⓒ www.ceoi.org^^^  
 

1. 이 계획은(<도표 3-8> 참조)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외국의 원조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그 목적으로 돼있다. 우선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수입대체산업을 건설해서 외화절약을 한다.

국내수요 중 시멘트공장 등 외자규모가 크지 않는 것은 1962~63년에 착공했다. 비료공장 등은 차관교섭이 순조롭지 못해 1965년경에야 착수한다. 다만 정유공장은 긴급사업이기 때문에 정부가 보유한 외화로 맨 먼저 착수했다.

가. 제1차 5개년 계획 전반기에는 시멘트 등의 공장건설로 29,114千달러의 외화 절약

나. 제1차 5개년 계획 후반기에는 비료 등의 공장건설로 49,363千 달러의 외화 절약

2. 1964년 중반부터 시작된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정책이 순조롭게 진행되서 1971년에는 경공업 수출이 2억 4,894만 달러에 달할 것임. 이를 위해서는 필요한 원료 및 원자재를 수입하게 되는데 이중 합성섬유, 합성수지 등을 국산화한다면 2,400만 달러의 외화 절약이 가능함.

3. 합성섬유 및 합성수지 등을 국산화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화공약품이 소요되는데 이러한 약품은 석유화학 공장에서 공급이 가능하다. 석유화학공장은 국내의 기존정유공장에서 생산되는 "나프타"만 공급 받으면 원료문제는 해결 가능함. 석유화학공업의 외화 절약액은 약 8,000만 달러에 이를 것임.

- 브리핑의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외화 절약은 8천만 달러라고 썼습니다만, 이것은 1971년을 기준으로 한 숫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출이 늘어가고 공업이 커짐에 따라 이 액수는 늘어만 갑니다.

석유화학의 원료는 정유공장에서 나옵니다. 다른 원료는 거의 필요치 않습니다. 즉 석유화학은 외화가득률이 높은 산업입니다. 건설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 단점일 뿐입니다. 그래서 선진국, 특히 일본에서는 앞을 다투어 증설을 하고 있습니다. 석유화학이 없으면, 우리나라는 막대한 외화를 써가며 수입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애써 수출해서 벌어들인 외화를 원료 수입하는 데 거의 다 써버리게 됩니다. 고생은 수출하는 우리나라가 하고, 단물은 일본 등 석유화학공업국이 가져가게 됩니다.

더욱이 그 석유화학제품을 수입하고자 할 때 파는 쪽의 위세는 대단합니다. 값은 달라는 대로 다 주어야 하고, 자기나라가 쓰고 남아야 팔아 줍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공업은 일본의 하청공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공업적으로 독립국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공업적으로 자주독립을 하기 위해서 제2차 5개년 계획에 석유화학을 꼭 포함시켜 주실 것을 건의 올리는 바입니다."

이런 요지의 브리핑이었다. 설명이 끝난 후에도 朴 대통령은 한참동안 도면을 응시하고 있다가 "상공장관! 석유화학 추진기구를 발족시켜 계획을 짜도록 하시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석유화학 추진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장기영 부총리도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석유화학이 제2차 5개년 계획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작성된 석유화학공업 계획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국내수요를 국산화해서 외화절약을 하겠다는 것이지 수출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 한미 상공장관 회의당시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 오원철, 스탠스 장관(좌) 김동조 주미대사, 이낙선 상공장관,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공업입국 장기계획 (II)

나는 1968년 4월 기획관리실장이 되었고 1970년 1월 광공전(鑛工電) 차관보가 됐다. 광업, 공업, 전기 및 특허, 표준, 계량, 공업연구소, 광업연구소를 관장하며 이들 분야에 대해 장관을 보좌하는 참모가 됐다. 이렇게 되니 나는 자연히 좀 높은 견지에서 산업을 보아야 했고 장기적인 입장에서 판단해야 했다. 산업의 본질을 생각해야 했고 우리나라 전체와 외국사정도 고려해야 했다. 즉 나의 관점은 전술적 입장에 전략적 입장이 가미되어야 했던 것이다.

때는 경화학공업 시대의 전성기이다(경화학 공업이란 경공업과 화학공업을 합친 공업, 중화학공업은 중공업과 화학공업을 합친 공업). 그런데 나는 이제 중공업분야와 산업기술분야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할 입장이 된 것이다. 경화학 공업 분야는 이미 기초가 마련되었으니, 새로운 전략목표를 중공업쪽으로 바꿔야 했다.

나는 우리나라 공업 전체의 장기개발 모형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다음 <도표 3-9>이다(이 표는 1969년 말∼1970년 초에 만들어졌다).

계획작성 기준은

1) 朴 대통령의 1966년도 연두교서중의 「조국 근대화의 3단계 작업」을 참작, 제4차 5개년계획의 목표연도인 1981년까지를 기획기간으로 잡았다.

2) 1967년도의 연두교서에서 제2차 5개년 계획의 출범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은 장기적인 시정방침을 내놓았는데 이를 장기계획에 포함시켰다.

가. 제 2차 5개년계획의 출범

「제2차 5개년계획은 제1차 5개년계획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공업화를 서두르고 경제자립을 촉진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국민생활의 기본 수요를 충족시켜 우리 생활을 안정시키고, 철강, 석유화학, 기계공업 등을 육성하여 공업구조의 급속한 개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중략)
한 마디로 제2차 5개년계획은 우리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동시에, 모든 면에서 질적 개선을 단행하여 경제 각 분야간의 균형, 사회 각 계층간의 소득상의 균형, 도시와 농촌간의 지역발전상의 균형 등 우리 경제의 <균형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나. 중화학공업의 중점 육성

「정부는 제2차 5개년계획의 투자 순위에 따라 제철, 기계, 야금, 정유, 석유화학, 자동차공업 등 기간산업 건설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전자공업과 도자기 공업의 발전에도 힘쓸 것입니다.」

다. 과학기술의 진흥

「우리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과학기술의 진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합니다. 정부는 성장하는 경제의 선도를 위하여 과학기술 5개년 계획을 세워 과학기술의 진흥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 www.ceoi.org^^^  
 

이 계획을 보면 공업입국 장기계획(I)보다 많이 발전된 것을 알 수 있다. 요점만 설명한다.

1. 우선 경화학 공업뿐만 아니라, 중공업까지 공업 전체가 포함되었다. 기술문제도 대두되었다. 계획기간은 10년 이상을 잡았다. 즉 1981년까지를 내다보려고 애쓴 흔적이 있다.

2. 1차 5개년 계획기간은 이미 설명했던 장기계획(I)과 같다. 다만 "수출제일주의"라는 국가시책이 명시되고 날짜는 1964년이다. 1965년에 가서는 "공업입국"이라는 시책이 나온다. 로스토우 교수가 말한 "Take off" 선언도 1965년에 나왔다. 우리나라 경제가 Take off 했다는 로스토우 교수의 말에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고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영문으로 된 자료를 보면 수출공업 전환이 (Impact of light industries on export)로 번역되어 있다. 소위 임팩트 폴리시라는 용어가 이미 쓰여지고 있다.

3. 2차 5개년 계획기간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가. 우선 1967년부터 "품질 고급화"문제가 나온다. 싸구려 제품으로는 수출에 한계가 온 것이다. 소위 "제값 받기 운동"의 개시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기술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했다. 1967년부터 "품질향상"과 "기술혁신" 운동이 개시된다. 그러나 국내기술 가지고는 해결이 되지않자, 1969년부터 "외국기술 도입"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 수출이 늘어가고 품목이 다양해지고 수출 대상국가가 늘어남에 따라 외국상품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즉"국제경쟁력 강화문제", "생산성 향상", "품질 관리", "고급품 생산" 등의 문제가 나왔다. 특히 전자제품이 처음 나오기 시작했고 도자기, 화학제품도 나온다. 진일보한 것이다. 1968년 후반기의 일들이다.

다. 기계공업 육성 문제가 1969년부터 대두된다. 아직은 기계제품을 수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우선 외국에서 수입하던 기계와 장치의 일부라도 국산화하기 시작하자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철강수요가 증가하여 제철소도 건설할 수 있는 수요가 발생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철강재의 수출은 아직은 요원하다고 생각할 때였으므로 제철공업에서 나오는 철강재는 전부 국내 기계공업에 공급한다는 화살표가 분명히 명시되어있다. 제철공업의 출발은 1970년으로 보았다(실제로는 1969년 12월 3일, 일본과 기본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70년 4월 1일, 정비공장이 착공되었다).

라. 과학기술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과학기술처가 새로 발족했고 KIST가 설립되었다.

마. 공장은 대도시에만 집중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안도 나왔다. "공업의 지방분산"이 추진 중이었다.

4. 3차 5개년계획 기간 내에 공업구조를 개편해 버리겠다는 안이다.

가. 3차 5개년계획 기간의 각 사업 내용은 좀 조급하게 취급된 것 같다. 3차 5개년계획 기간 내에 공업구조를 개편해 버리겠다는 안이다. 1975~1976년을 "공업의 성숙기"라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중화학공업 비율이 50% 이상이 되면 공업 국가이다(인쇄물에는 60%로 나와 있다. 誤字이다). 이때 나는 우리나라의 경공업(즉 경공업 수출)이 70년대에 가서도 그렇게까지 고도성장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공업의 증가추세를 좀 적게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약 10년 동안 중화학공업, 특히 석유화학과 종합제철, 전자공업, 기계공업(조선 및 자동차공업 포함) 등을 전략산업화하고 밀고 나가면 곧 중화학공업 비율이 50%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실제로는 1977년 말에 가서야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의 비율이 똑같이 50 : 50 으로 되어 우리나라도 중화학 공업 국가가 되었다.

나. 기술혁신 문제가 다시 대두되는데, 국내에 연구소를 많이 지어서 기술혁신을 해결하겠다는 안이다.

다. 웬만한 기계 및 장치는 국산화하고 기계제품 수출도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5. 제4차 5개년 계획기간에 대해서는 암시(暗示)만이 나와 있다. 공업구조가 완성되었으니 두뇌 개발쪽으로 가자는 안이다. 공장까지도 수출하자는 뜻이 있어 시스템 엔지니어링 개발문제도 나왔다(註: 拙著 한국형 경제건설 3권 p.184~185 참조).

(註: 이 그림은 韓美 상공장관 회의 때 갖고 갔다. 1971년 9월 27일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로 한국측은 이낙선 장관이고 미국측은 스탠스(Stans) 장관이었다. 이 그림은 칼라로 인쇄했다. 제목은 공업입국 장기계획(II), 영문으로는 "Basic Design on Korea's Industrial Development in 1970's" 이다. 한미 상공 장관회의 때 가지고 가려고 영문으로 번역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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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입국 장기계획 (III)

공업입국장기계획(III)은 1972년에 작성됐는데 1973년부터 발진하는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이다. 도표만 소개하고 설명은 「제14장 80년대의 미래상」에서 하기로 한다.

 

 
   
     
 

공업입국 장기계획 (IV)

공업입국 장기계획(IV)은 1977년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고, 70년대 말까지 중화학 공업의 기초를 마련한 다음 - 1980년부터 시작해서 약 10년간 - 우리나라 산업 전체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수립된 계획이다.

아래의 첨부자료(기사 하단에 있는 '공업입국장기계획' 이미지 파일 참조)에 있는 도표는 1978년에 작성됐다. <도표 3-11>의 설명은 「제17장 2000년대의 미래상」에서 하기로 한다.

[계속]

 

추가자료 :공업입국장기계획 www.ceo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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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아보세 2006-05-22 11:26:36
정작 자신들의 恨은 간호할 틈이 없었네…
독일서 간호사 파견 40주년 행사… 1500명 참석
“한강에 다리 1개 있을때 왔는데…” 눈시울
“장관들 한국 돌아가면 무소식” 섭섭함 토로

‘파독(派獨) 간호 40주년 기념 행사’가 20일 밤(현지 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빛 바랜 사진으로 봐도 꽃다운 나이. 그러나 이제는 곱게 단장을 해도 그 젊음을 되돌릴 수 없는 40년의 세월이다.

행사장은 우천(雨天)인데도 만원이었다. 1500명은 될 듯 했다. 독일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파독 간호사들은 아침 일찍 전세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나이는 50대 후반부터 최고 78세까지. 틈틈이 2세 자녀나 늙어가는 아내의 손을 잡은 독일인 남편들도 앉아 있었다.

2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파독(派獨) 간호 40주년 기념 행사’도중 참석자들이 독일 정착 초창기의 고통을 회상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점심 무렵 기자는 비바람치는 고속도로 야외 휴게소에서 간이 도시락을 먹고 있던 함부르크의 간호사들과 마주쳤다. 새벽 5시쯤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행사장까지 차로 6시간 거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은 늦봄 추위에 몸을 떨며 “우리 함부르크 간호사회가 15분간 춘향전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어 일찍 가서 의상 준비와 최종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독 간호 40주년’은 1966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1차 파독은 128명. 그전에도 독일의 개인 병원에서 한국 간호사를 고용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3년 의무 기간’으로 정식 파독이 이뤄진 것은 이때였다. 그 뒤로 1976년까지 이어졌다. 한 참석자는 “한강 다리가 하나 있을 때 왔는데 이제 24개가 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파독 간호사의 숫자는 약 1만1000명쯤으로 추산된다. 현재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간호사 수는 절반 남짓. 여전히 독일 병원에서 현역으로 일하는 간호사들도 적지 않다.

베를린 간호사회 회장인 백덕심씨는 “한때는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를 위해 봉급을 모두 부쳤던 간호사들은 이제 대부분 적은 연금에 어렵게 살고 있다”며 “정치인·장관 등이 올 때마다 이들을 위해 뭔가 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가고 나면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 옥색 한복을 차려 입은 한 간호사는 “내 봉급으로 공부한 동생들이 이제는 한국에서 제 잘났다고 한다”고 섭섭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행사장에는 그 동안 서로 소식이 끊겼던 이들끼리 “너 백정숙 맞지? 얼마나 찾으려고 애썼는데…”, “혹시 김순자 연락처 알고 있니?” “언니가 몇 년도 왔지요?”라는 말들이 오갔다. 양희순 재독간호협회 회장은 “처음 3년(의무복무기간)은 고향 생각도 외로움도 아픔도 참고, 혼자서 3~4인역의 힘든 일을 하면서 민간 외교 사절 역할까지 감당해야 하는 인고의 시절이었다”며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훌쩍거리자 참석자들도 덩달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또 다른 인사가 “당신은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 하고…어언 마흔 해가 흘렀습니다”고 말을 했을 때도 장내 참석자들은 흐느꼈다.

이번 행사의 모든 경비는 삼성에서 협찬했다. 한 참석자는 “우리나라가 파독 간호사들에 대해 진 빚을 생각하면 기업이 아닌 정부가 나서야 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행사에는 안영국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 김조자 대한간호협회회장,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 이수혁 주 독일대사 등이 참석했고, 연예인으로는 강석, 김혜영, 송대관, 김흥국, 현숙씨 등이 왔다. 앙겔라 메르겔 독일 총리,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행사는 밤 11시가 훨씬 넘어 끝났다. 이들은 또다시 흩어져 6시간씩 밤 버스로 되돌아갈 것이다.

멋져요 2006-05-20 23:23:39
참 많은 계획들이 있었네요.
요즘처럼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는 정치인들보단 훨씬 멋져부러.

지만원 2006-05-20 11:58:17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픔니다!

[독일을 찾은 두 얼굴!]

우리의 경제가 이만큼이나 성장되고 올림픽 개최국으로써 세계에 그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해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남다른 애국심과 지도력에 의함이다. 돌이켜보면 경제성장과 인권이 고르게 발전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잘 살고 보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가 인권에 그 만큼 충실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국의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의 모든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인권) 문제로 부관참시하려는 자들이 있으며 특히 이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시절 간첩 혐의를 받았던 친북 좌파(또는 주사파)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정되고 있다는 것이 심히 염려스럽다. 이들의 국가 보안법 철폐 주장과 숭북주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이들이 이구 동성으로 말하는 것들이 6.15 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이라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미군의 한반도 완전 철수라는 그림자와 남북 평화선언이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1964년12월10일 독일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2005년 4월 독일을 찾은 노무현의 모습이 너무나도 현저하게 다른 모습이어서 국민들과 재독 교민들의 가슴을 아프게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조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모든것을 팽게치고 차관을 얻으려는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모습이었으나 노무현의 독일 방문은 초호화판 그 자체였으며 그 호화의 도가 지나쳐 독일 사람들은 물론 교민들로부터도 이해할 수 없는 자로 비웃음의 잔치판을 열어 주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에 간 비밀 이야기!]
1963년 11월! 당시 조국의 형편은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는 사람이 1년에 한 두명이 있을까 말까한 것이 현실이었다. 가난하디 가난한 조국에서 수십대 1의 경쟁력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들 6,000 여명이 서독에 도착한 날은 1963년11월이다. 이들의 서로운 타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국 근대화란 기치를 내 걸고 경제개발 5개년이란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힌 것은 외자의 부족이었다.

미국에 사정도 해 보았지만 구테타 세력이란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달려 간 곳이 독일이다. 독일은 당시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고 라인강의 기적이란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가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사절단을 파견하여 차관을 제공하여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독일은 아시아 수출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가 용케도 맞아 떨어져서 독일은 한국에 1억 5000마르크의 상업 차관 제공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차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문제는 누가 지급 보증을 서느냐였다. 한국에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는 전 세계 아무곳에도 없었다.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결정은 보았지만 지급보증 문제로 차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몰린 박정희 대통령이 궁여지책으로 마지막 방안을 독일에 내 놓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독일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3년간의 급여를 독일의 유수 은행인 코메르츠 뱅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 형식으로 지급보증 문제의 해결을 보았다.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픔니다!]
그런 기막힌 사연으로 독일에 첫 발을 디딘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타국 생활을 한지 일년여가 지난 1964년12월10일 오전에 독일 루르 지방 함보론이란 탄광의 한 공회당에서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범벅인 한국인 광부 500명과 한복 차림의 간호사들이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내자 실내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이들의 울먹임이 하도 심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며 이어지는 애국가의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가 없어 사랑하는 국민을 탄광과 간호사로 독일에 보낸 박정희 대통령은 잠시 진정을 취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의 연설은 끝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공회당은 눈물 바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울었고 육영수 여사도 울었다. 우리의

송보배 2006-05-20 11:22:47
“장기전략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 한국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다.

리콴유(李光耀·현 고문장관)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한국이 세계 일류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갈등의 에너지’를 ‘화합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리 전 총리는 19일 동아일보와 고려대가 공동 주최한 제20회 인촌기념 강좌에 참석해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에게는 ‘갈등의 국가’로 비친다”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 간에 합의를 이뤄 내는 일에 국가의 에너지를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노사, 정당 간 갈등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에너지를 세계를 공략하는 데 쓴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말한다 2006-05-20 07:59:11
박정희는 이순신, 세종대왕 이상의 우리나라 역사의 기적을 만든 사람이다.

1960년 당시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바라보자. 국민소득은 전세계 최하위 수준이었으며 무역수지는 10 대 1로 적자였고 수출품은 일본에 헐값에 팔아먹던 돼지고기 김 어패류등이 고작이었고 수입의 90프로는 미군의 원조와 주둔미군이 한국에서 쓰는 달러로 채워지는 상황이었다.

더우기,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며, 공비를 내려 보내고, 땅굴을 파 내려오던 북한이 있어서 안보적으로도 매우 불안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손엔 총을 한손엔 삽을 잡아야하는 상황이었다 .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 팔아먹는다는 개념조차 세워져있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력들이 일할 곳을 찾지못하여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할일없이 뒷골목이나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세계 각지의 신독립국들은 이른바 종속이론에 입각하여 자립경제를 추진하고 있었고 북한 역시 소련의 경제종속을 염려하여 결국 주체를 앞세운 자립경제 체제로 가게되었다.

박정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수출이라는 걸 생각해낸 지도자였으며 그것을 추진한 사람이다. 또한 거의 모든 세계 경제전문가들의 회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중공업화를 추진해 결국 유신시대에 그 기틀을 닦아놓았던 사람이다.

1973년에 박정희가 중공업화 계획을 발표하며 대망의 80년대에는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자고 했을 때 그걸 곧이 곧대로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모든 차들을 세워봐야 경부고속도로도 못 채운다며 재벌들 골프치러가기 편하게 하려고 고속도로 만드냐며 많은 경제 인사들 야당지도자들이 반대했으며, 포화상태인 제철산업은 왜 무리하게 추진하느냐는 비판을 세계각국의 전문가들로부터 들어야 했으며, 정유 화학 단지 조성때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을 먹었으며, 이미 후발주자가 끼어들수 없도록 체제가 잡힌 전자 조선 산업등의 육성은 무리하다는 비판도 수없이 들어야 했다.

비록 박정희 평생의 꿈이었던 부국강병, 중공업 강국의 꿈을 박정희 자신은 보지 못한채 서거했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그가 추진했던 산업들이 결국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박정희가 그토록 내외의 수많은 비판을 무릎쓰고 추진한 산업구조안에서 결국 먹고 살고 있는 샘이다. 자립경제를 추구한 남미의 수많은 군사정권들 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북한은 결국 나락의 늪으로 떨어졌고 북한은 아직도 정신못차린채 결국 동네 부랑아 같은 국가가 되버렸다.

우리나라와 홍콩 대만 싱가폴등을 비교하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그게 얼마나 황당한 비유라는 걸 아는가. 싱가폴은 광대한 관광자원으로, 대만은 장개석이 들고온 무지막지한 금괴로 코에 손하나 대지 않고 코풀듯 경제개발을 시작한 나라이다.

우선, 아시아의 경제성장 국가들을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 졌던 말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비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세 국가는 한국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인구로만 보아도 대만이 한국의 절반 수준일 뿐 홍콩과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시국가를 급성장시키는 것은 한국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성장에는 아시아의 금융과 무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이 큰 기여를 했다.

대만의 경우,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피난오면서 이른바 부와 지식을 갖춘 엘리트집단이 주축을 이루었고, 따라서 상당한 물적·인적 자본을 대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홍콩, 싱가포르도 마찬가지로 자본을 겸비한 화교의 활동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외형적 조건이 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요소를 발견할 수 없는 한국이 성장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기술력도,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마저. 아무것도 없었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출신 독립국가중 우리나라와 같은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갖게 된 나라는 오직 한 나라 바로 대한민국 뿐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추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사람이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박정희는 앞으로 계속 신화화 될 것이다. 지금 박정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점차 죽어서 없어지면 없어 질 수록 박정희는 신화화 되어갈것이다.

우리 5천년 역사에 지금 처럼 잘 살아 본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 뿌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박정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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