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세를 쥐락펴락한 외교관 ‘헨리 키신저’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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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세를 쥐락펴락한 외교관 ‘헨리 키신저’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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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년 100세
- 미국-일본-중국-소련의 남북한 교차승인을 유엔에서 제안
-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나치 독일 탈출
- 키신저의 ‘소규모 핵전쟁’ 이론
- 데탕트(긴장 완화)를 펼치다
- 베트남 전쟁
- 키신저의 대명사, 현실정치(Realpolitik)
- 키신저, “힘이 곧 궁극의 최음제”
향년 100세 나이로 타계한 헨리 키신저. 사진=헨리키신저닷컴 갈무리
향년 100세 나이로 타계한 헨리 키신저. 사진=헨리키신저닷컴 갈무리

세계의 외교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올해 100세 나이로 미 코네티컷 자택에서 사망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또 그는 미국-일본-중국-소련의 남북한 교차승인을 유엔에서 제안하기도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헨리 키신저는 대외관계에서 ‘현실주의(realism)’을 적극적으로 실천했으며,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전범으로 엄중히 비난을 받기도 했다.

키신저는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자 국무부장관으로서 옛 소련, 중국과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데탕트 정책(policy of détente)’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의 왕복외교(shuttle diplomacy)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종식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파리협정의 협상은 미국을 베트남에서의 오랜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키신저를 ‘현실정치’라고 지지자들이 표현한 것을 두고, 일부 비판자들은 ‘키신저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칠레의 좌파정부를 전복시킨 유혈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아르헨티나 군이 자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을 눈감아 주었다는 이유로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BBC보도에 따르면,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코미디언 톰 레러(Tom Lehrer)는 “정치 풍자는 쓸모없다”고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 미국-일본-중국-소련의 남북한 교차승인을 유엔에서 제안

키신저는 한국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한반도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국무장관 시절인 1970년대 중반 유엔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이른바 '교차승인' 구상과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한 일이 대표적인 한반도에 관한 일이다.

1975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북한과 북한의 동맹국이 대(對)한국 관계개선 조치를 취하면, 한국과 미국도 그것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등 그는 미-중, 미-소 데탕트의 흐름 속에, “강대국 정치”를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를 변화시켜보겠다는 과감한 구상을 한 것이다.

그의 그 같은 노력의 결과는 결국 1991년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성사됐으나, ‘4강'의 ’남북한 교차 승인‘은 아직까지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나치 독일 탈출

하인츠 알프레드 키신저(Heinz Alfred Kissinger)는 1923년 5월 27일 독일 바이에른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뒤늦게 그곳을 떠났지만, 1938년 뉴욕의 독일계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했다.

“헨리(Henry)”는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십대였으며, 축구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는 밤에는 고등학교에 다녔고, 낮에는 면도칼 공장에서 일했다. 회계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군대에 징집됐다.

보병에 배치된 그의 두뇌와 언어 능력은 군사 정보 기관에서 사용됐다. 키신저는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에서 전투를 목격했고, 사병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도시를 점령한 자신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방첩부대인 카운터 인텔리전스(Counter Intelligence)에 합류했다. 23세의 이 청년에게는 용의자들을 체포하고 구금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전직 게슈타포(Gestapo :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장교들을 추적할 팀이 주어졌다.

* 키신저의 ‘소규모 핵전쟁’ 이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하버드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여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 1957년에 그는 핵전쟁과 외교정책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은 제한된 핵전쟁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회의적인 언어로 그는 새로운 유형의 소형 미사일을 "전술적",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책은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명성과 영향력을 향한 키신저의 긴 행진이 시작됐다. 그리고 "소규모 핵전쟁" 이론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다.

그는 뉴욕 주지사이자 대통령 후보인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의 보좌관이 됐다. 그리고 1968년 리처드 닉슨이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키신저는 국가안보보좌관이라는 직위를 제안받았다.

복잡한 관계였다. 대통령은 국제 관계에 대한 키신저의 조언에 의존한다고 느꼈지만, 반(反)유대주의 폭발과 미국 유대인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경향이 있었다. 냉전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마겟돈(Armageddon)은 쿠바에서 막 피했고, 미군은 여전히 ​​베트남에 주둔했으며, 러시아는 프라하를 침공했다.

* 데탕트(긴장 완화)를 펼치다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과의 긴장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즉, 각자의 핵무기 규모를 축소하기 위한 회담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통해 중국 정부와 대화가 시작됐다. 이로 인해 미-중 관계가 개선되었고, 거대한 이웃 국가를 두려워했던 소련 지도부에 외교적 압력이 가해졌다.

키신저의 노력은 닉슨이 1972년 역사적인 중국 방문으로 직접 이어져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을 만났고, 23년간의 외교적 고립과 적대감을 종식시켰다.

* 베트남 전쟁

그 사이 미국은 베트남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명예로운 평화(Peace with honour)”는 닉슨의 주요 선거 공약이었다. 키신저는 오랫동안 미국의 군사적 승리는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철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현실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북(北)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군대와 보급품을 빼앗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립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을 가하기로 닉슨과 동의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최소 50,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국가의 불안정은 캄보디아 내전과 잔혹한 폴 포트 정권으로 이어졌다.

파리에서 베트콩과의 일련의 험난한 협상 중에 키신저는 국무장관이 되었으며, 남베트남에서 미군 철수를 협상했다. 이 결정으로 그는 북베트남의 레득토(Le Duc Tho)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결정은 평화 운동가들의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키신저는 ‘겸손하게’ 상을 받았고, 상금을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 군인의 자녀들에게 기부했다. 2년 후, 공산주의 세력이 남베트남을 점령했을 때 그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 키신저의 대명사, 현실정치(Realpolitik)

그의 왕복 외교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휴전을 가져왔다.

닉슨의 백악관 비밀 녹화 시스템은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가 그와 키신저가 이스라엘을 대했던 방식에 대해 열렬한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후, 더욱 어두운 현실정치를 드러냈다. 키신저나 닉슨 모두 러시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소련에 압력을 가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키신저는 “소련에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것은 미국 외교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소련의 가스실에 가두는 것은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다. 어쩌면 인도주의적인 관심사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은 혼란에 빠졌다. 칠레의 아옌데 새 정부는 친(親)쿠바를 지향하고 미국 기업을 국유화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반군이 새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 칠레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했다. 키신저는 이 조치를 승인한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는 “국민의 무책임 때문에 한 나라가 공산주의화되는 것을 왜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이 문제는 칠레 유권자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군대가 개입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 장군이 권력을 장악한 폭력적인 쿠데타로 사망했다. 후에 그의 병사 중 다수는 CIA로부터 급여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키신저 자신도 인권 침해와 군사 정권 하의 외국인 사망을 조사하는 여러 법원의 추격을 받게 되기도 했다.

1년 후, 키신저는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백악관을 떠나는 리처드 닉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후임인 제럴드 포드(Gerald Ford)는 그를 국무장관으로 유지했다.

그는 로디지아의 소수 백인 정부에 권력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아르헨티나 정권의 비판자들의 "실종"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키신저, “힘이 곧 궁극의 최음제”

1977년 그가 퇴임한 후 논란이 뒤따랐다. 컬럼비아 대학의 학과장 제안은 학생들의 항의로 철회됐다.

그는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외교 정책에 대해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으며, 대통령들이 중동 평화를 향한 너무 빠른 도약을 원했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키신저에게 뉴욕과 워싱턴 공격에 대한 조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컨설팅 회사의 고객 목록 공개와 이해 상충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후 몇 주 안에 사임해야 했다.

그는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정책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부시 대통령 및 딕 체니 부통령과 회의를 가졌다. 그는 그들에게 “반군에 대한 승리가 유일한 출구 전략”이라고 말했다.

항상 영향력이 있었던 그는 2017년 당선 후, 도널드 트럼프에게 외교 문제에 대해 브리핑했으며, 무엇보다도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점령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2023년 100세를 맞이하면서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러시아 침공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의 나라는 평화가 확보된 뒤 나토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 키신저는 방대한 연락처와 재치를 갖고 있었다. 그는 "힘"이 "궁극의 최음제(Power is the ultimate aphrodisiac)“라고 즐겨 말하곤 했다.

실제보다 더 큰 성격을 지닌 그는 지난 세기의 가장 중추적인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던 그는 미국의 이익을 한 마음으로 추구하고 살았다. 그는 “외교 정책에서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는 나라는 완벽함도 안전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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