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판단(value judgment)이 우리 모두의 운명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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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판단(value judgment)이 우리 모두의 운명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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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가치판단이냐? 상대적 가치판단이냐?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1965년 서울상대 졸업과 공군 중위 제대 후 정부 출연 연구원에서 10여 년간의 연구 경험을 가지고 시작한 교수 생활 30여 년을 마치고 2008년에 정년퇴직하는지도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정년 이전에는 물론 정년 후 명예교수로 가끔 특강을 할 때도 일단 강의가 시작되면 학부 학생이건 대학원 석・박사과정 학생이건 옳고・그름에 관한 판단과 관련한 다음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르치는 경영학에서 기업은 항상 우수한 성과를 일궈 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 일구는 방법이 옳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는 비교적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옳고・그름에 대한 판단문제는 비단 기업의 경우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인간사회 전반에 걸쳐 시시각각 부닥치는 문제이지만 특히 오늘날처럼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엄청 커진 상황에서는 기업이 우수한 기업성과를 옳은 방법으로 일궈져야 한다는 명제는 그 어느 것에 앞서서 강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늘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왔던 것이다.

제일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은 50만 원 또 다른 사람은 500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떻게든 빚을 갚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돈을 빌려준 사람이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 시켜주었다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탕감시켜준 사람에게 감사해 할까요?”

위의 물음에 대략 대여섯 개의 의견이 나오곤 한다. 즉,

  •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해 할 것이다’라는 의견과 그 반대로
  • ‘더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라는 주장
  • ‘탕감 받은 금액의 다과에 관계없이 다 똑같이 감사할 것이다’라는 의견
  • ‘탕감 받을 때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라는 의견
  • ‘각자가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 ‘감사할 이유가 뭐 있느냐, 누가 탕감시켜 달라고 했느냐?’ 등등

물론 이때 각자에게 왜 그런 의견을 갖느냐고 물으면 모두가 다 나름대로 명쾌한 주의 주장의 배경과 근거를 갖고 자기의 의견만이 옳다고 강변한다.

탕감시켜준 것이 엄연한 하나의 사실(fact)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사실을 보는 견해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각자는 자기 의견만이 절대로 옳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각자가 옳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도덕 다원주의(moral pluralism)와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그르다는 것이 없다는 도덕 상대주의(moral relativism)가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현실 상황에서 누구든 자기의 주장을 결코 굽히려 들지 않는다.

만약 한 사안에 대하여 옳고・그름을 상대적 기준을 기초로 판단하는 경우 동일한 사안을 놓고서도 어떤 때는 옳고 다른 때는 그르고, 또 여기서는 옳았었는데 저기서는 그른 것이 되고(이런 현상을 ‘내로남불’ 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하는데 그 연유는 이를 자꾸만 읊어주면 이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되어버릴까 봐서), 또 이 사람에게는 옳고 저 사람에게는 그른 것이라는 판단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생길 것이고 그래서 사회는 결국 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사회는 끝없는 대혼란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서 송사(訟事)가 급증할 것이고 그래서 많은 판검사와 변호사도 급증해야 하고 또 송사건의 반(半)은 죄인으로 판결될 것이므로 감옥의 수와 교도관들의 수도 또한 급증해야 할 것이며 이 와중에서 로스쿨(law school)만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직과 순수와 진실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혼란 앞에서 불안에 떨 것이며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이 불안 공포 해소를 위해 계속 뭔가를 절제 없이 먹다 보니 대부분이 비만(肥滿)형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이 1965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미국에서 벌어져 왔다.

미국은 1776년 독립과 더불어 줄곧 그리스도의 청교도 정신(puritanism)에 입각한 절대적 가치판단기준을 그들의 헌법에 담고 있었는데, 1960년대 초중반에 수정헌법을 통해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 대신에 종교 다원주의와 도덕 상대주의의 가치판단기준을 수용하였다.

도덕 상대주의가 수용된 지 50여 년 이상 지나는 사이에 미국은 송사(訟事) 대국, 변호사 대국, 로(law)스쿨 호황기를 거치며 비만(肥滿) 대국으로 전환(crossover)되면서 급격하게 국가경쟁력을 잃어왔다.

그리고 많은 이들 특히 국가지도급에 있는 이들이 사랑(love) 대신에 동성애, 성애자 등 별별 회귀한 작태를 통해 육욕(lust)만을 탐닉하는 괴물들로 바뀌었고, 미국 전역은 만물의 주인(master) 대신에 돈(money)을 섬기는 돈의 노예들로 넘쳐나며, 창조주(Creator) 대신에 사탄(Satan) 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사회 곳곳에 넘치는 참으로 기괴한 나라로 미국이 확 바뀌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시대에 미국은 종교 다원주의와 도덕 상대주의의 최대 희생(犧牲)국이 되었고, 모든 악을 전 세계로 퍼뜨리는 종주국이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자, 그러면 빚을 탕감 받은 하나의 사실(fact)에 대하여, 학생들이 판단(judgment)한 다양한 견해들 중에 과연 참으로 옳은 것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어느 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지를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제기되게 된다.

인간 모두는 지력(intelligence)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지력에 기초한 논리적 사고력을 지니고 있기에 이를 동원하여 규명해야 한다. 이제 논리적으로 접근해 볼 때, 위에 개진된 의견들 중에는 '참으로 옳은 것이 아예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논리에 학생 모두는 자연스레 수긍하고 또 인정한다.

그리고 또 만약 개진된 의견들 중에 만약 참으로 옳은(right) 것이 있다면 나머지는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는 모두 그른(wrong) 것이라는 데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이에 대하여 간혹 논리적 사고훈련이 덜된 학생들은 앞뒤가 안 맞게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인간 모두는 지력(intelligence)을 통해 옳고・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또한 판단결과를 따를 수도 안 따를 수도 있는 자유의지(free will)의 주체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지력을 사용하여 학생들이 개진한 주장들 중에 과연 참으로 옳은 것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참으로 옳은 것이라는 것을 내보일 수 있는가를 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미 앞에서 참으로 옳은 것을 상대적 판단기준에 입각해서는 결코 찾을 수도 없고 또 설령 누군가가 찾았다고 주장하더라도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참으로 옳은 것이라고 받아 주지 않을 것임을 보았다. 결국, 절대적 판단기준 없이는 참으로 옳은 것을 결코 밝힐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절대적 판단기준을 찾을 수 있을까?

‘500 데나리(denarii: 로마제국 통치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용했던 화폐단위)를 탕감 받은 사람과 50 데나리를 탕감 받은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감사해 할 것인가?'라는 예수라는 분의 질문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서며,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라는 답변에 ‘옳은 판단이다(You have judged rightly)’ (Luke 7:41-43) 라는 판단기준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라는 의견만이 참으로 옳은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 그러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들이 더 감사할 것이다’라는 옳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어떤 세상일까? 그곳에서는 절대로 이견이나 다툼이나 전쟁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들이 더 감사할 것이다’라는 생각과 다른 그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요?

1965년 수정헌법 이후 미국 사회 모습을 생각해 보면 감이 쉽게 잡힐 것이다.

‘누가 탕감해 달라고 했느냐, 내가 왜 감사해야 하느냐, 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거짓을 일삼으며 진실을 외쳐대는 괴물들과 온갖 불의를 저지르며 정의를 외쳐대는 괴물들이 우리 주변에 즐비한 걸 보면 아마도 이곳이 곧 그곳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참으로 옳은 하나의 의견과 다수의 그른 견해들이 뒤범벅이 된 세상에 속하여 죄와 정의와 불의와 심판과 자비와 사랑이라는 낱말들을 무수히 되뇌며 온갖 이설과 괴설로 서로 잘났다고 큰소리치기도 하고 또 기고만장(氣高萬丈)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하여 참으로 옳은 것은 하나뿐이라는 절대적 가치판단기준을 따르지 않는 한, 아무리 그럴싸한 매력적인 말들로 풍성한 ‘말 많은 세상’은 될지언정 옳음과 그름이 뒤범벅인 세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가 참으로 옳은 것은 변함없이 절대적으로 항상 옳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을 때라야 옳은 말과 옳은 행동이 뒤따를 것이다.

이런 나의 논리 전개 때마다 험악할 정도로 거칠게 항변하던 제자들 중에서 적지 않은 제자들이 교수님의 그 ‘옳고・그름에 대한 판단’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며 그간 자기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는 반응을 보내올 때면 교직을 천직으로 주시고, ‘옳고・그름’을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과 깨달음을 주신 만물의 창조주, 나의 주님께 모든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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