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산업화와 나의 연구 행보(行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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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산업화와 나의 연구 행보(行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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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필자가 1969년 공군 중위 제대를 두어 달 앞둔 4월 어느 날 스카우트 아닌 스카우트로 KIST의 경제연구 분석실에 합류하여 전문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POSCO 건설 타당성 연구 (feasibility study)의 실무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POSCO 건설 타당성 연구는 이미 2여 년에 걸쳐 KISA(국제차관단)에서 연구하여 철강의 내수규모가 최소 적정생산 규모보다 적기 때문에 그 타당성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자 박정희 정부가 한창 건설을 진행하며 해외 특히 미국으로부터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하고 있는 KIST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에 의해 시작된 연구프로젝트였다.

이런 배경에서 필자가 제대 전에 급하게 실무책임자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당시 필자가 견지한 연구의 초점은 ‘내수초과분을 과연 수출할 수 있을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수출 가능성 여부를 입증하는 데 집중되었다. 솔직히 말해 타당성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필자는 대학 후배 총각들로 실무팀을 만들고, 연구소 내에 있는 Row house에서 합숙하면서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꿈에 누군가가 일러준 중력 법칙(gravity law)을 원용한 철강 수출 계량모델을 도출하여 POSCO의 사업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1970년에 포항 플랜트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1973년 첫 출선의 기쁨을 온 국민들에게 안겨주며 POSCO를 스타트로 중화학 중심의 산업화 행보를 박정희 정부가 박차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항공장건설이 한창이던 1971년 때 제2 종합 제철 플랜트 타당성 연구프로젝트가 필자의 책임하에 추진되었고 그 연구결과대로 광양에 300만 톤 규모로 시작하여 최종 1200만 톤 규모의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마련되고 1972년 국영형태의 회사가 발족하였으나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순연되었다가 후에 POSCO에 흡수되었다.

한편 KIST는 당초부터 재단법인으로 출범하였는데, 이는 ‘기술개발 없이 산업화 성공을 기대할 수 없고, 재정자립 없이 기술개발을 기대할 수 없다.’라며 미국 Johnson 대통령이 2천만 불(당시 대한민국의 외화보유고는 9천2백만 불이었음)을 기술개발기금으로 지원해 준 데 따른 것이었다. R&D 관리시스템 일체는 미국 Battle 연구소의 hardware와 software를 그대로 이식시킨 것이었는데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연구자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동시에 책임을 지게 하는 책임회계제도(responsibility accounting system)였다.

필자는 광양제철 플랜트 타당성 연구를 끝내고 1974년 초반에 연구부문에서 R&D 기금관리 실무책임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10월 중동에서 6일 전쟁이 일어나고 1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기금 가치의 증식보다는 그 가치를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가 현안으로 클로즈업되었다. 필자는 기금관리 경험을 통해 주식회사의 본질과 자본조달을 위한 주식 발행시장과 유통시장과의 관계에서 유통시장은 필요악(necessary evil)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 5개 시중은행의 자본금이 각각 3억 원이었고, KIST의 기금 규모는 22억이었는데 고금리에 힘입어 32억으로 늘려 놓고, 필자는 1976년에 다시 연구 sector로 옮긴 후 ETRI(한국 전자통신연구원), KNFC(한국 핵연료개발공단), KAERI(한국 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실장/기획실장, 기획부장 그리고 선임연구위원으로 10여 년간 철강/특수강/비철, 금융, 전자통신, 전자, 에너지, 교통, 핵연료, 항공분야의 투자 사업에 대한 타당성 연구를 수행하면서 세계 산업주도권의 부침(浮沈)까지도 헤아릴 수 없는 값진 기회와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1981년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필자는 그간 필자의 손을 거쳤던 투자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순항(順航)하고 있음에 뿌듯함을 느끼며 그 성공원리를 이론적으로 구명(究明)하고픈 강렬한 연구 욕구를 갖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중반 산업화를 지원하는 통신 Infra를 현대화하기 위해 전기통신을 담당하고 있던 체신부를 정책기능과 사업운영기능으로 분리하여 체신부는 정책기능만 맡고 사업운영부문은 공기업형태의 KTA(현 KT의 전신)가 맡는 정책전환을 단행하였는데, KTA의 전기(electrical)통신 시스템을 전자(electronic)통신 시스템으로 Upgrade 시키기 위한 KTA 발전전략(안)연구를 1987년에 필자에게 의뢰하여 왔는데 당시 필자는 1980년을 전후한 디지털화(digitalization) 혁명과 그 추세전망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미소 양국체제의 붕괴가 전 세계통신 분야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였고, 그 결과로 ATTACK 전략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ATTACK은 ‘Advanced Total Telecom Advantage Creating KTA: 첨단의 유·무선의 전자통신을 통해 우위를 창출하는 KTA가 돼라’라는 뜻의 전략 슬로건이다.

필자의 전략(안)에 KTA는 만족함을 표하며 전사적으로 전략선포식을 거행하고 이를 드라이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KTA가 세계적인 mega-player의 하나로 발전하려면 아무래도 세계 유수의 컨설팅 컴퍼니의 연구결과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KTA 톱 경영진은 Harvard Business School의 Michael Porter 교수팀의 Monitor Consulting사에게 필자가 수행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연구프로젝트를 맡기게 되었다. 십 수개월 후 Monitor사의 최종연구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그들의 연구내용에는 전자통신기술의 발전과 추세전망은 물론 미소 양극체제의 붕괴가 통신에 미칠 충격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담겨있지 않음을 필자가 지적하면서 실망을 드러내자 말 한마디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는 필자로 하여금 감히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독자적으로 계발하고픈 강한 열망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런 연구 열망을 갖고 있던 당시 대학 부설 산업경영연구소를 맡고 있던 필자에게 삼성그룹 전략기획본부의 박 차장이란 분이 찾아와 무엇이든 하고픈 연구를 아무 부담 없이 하라는 재벌 측의 뜻을 전하면서 결코 적지 않은 연구비를 전달해 주고 가는 것이었다. 야, 대한민국에 이런 재벌이 다 있구나, 하며, 산업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고 그 연구결과를 1990년대 초반에 ‘세계 산업의 주도권이동원리’와 ‘기업파워(firm power)는 어디에서 오는가?’의 두 권의 연구 저서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발간하였다.

‘세계 산업주도권의 이동원리’는 당시 삼성 맨 필독서 10권 중 유일한 국내도서로 선정되었고 ‘기업파워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1995년 출판문화대상(전경련 주관)을 받았다. 여기서 기업파워 라는 개념과 용어는 물리학의 뉴턴운동 법칙에서 빌려 온 것으로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는 힘의 능률을 기업파워로 개념 정의(conceptual definition)하고 이를 결정하는 요인을 물리학에서 파워를 구성하는 4가지 요소, 즉 (부피*밀도)*가속도*속도에서 유추하여 ((기업규모*(솔루션/제품 적합성, 공정 적합성)*혁신*성장 벡터))로 접근하여 기업파워 이론(Firm power theory)을 정립하였다.

필자는 내친김에 기업파워 이론의 이론적 강건성과 실용성을 국제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기술과 경제성장과의 관계를 핵심 이슈로 연구하는 신 슘페터리안(Neo-Schumpeterian) 진화경제학의 선두주자로 불리던 영국 Sussex 대학교의 Christopher Freeman 교수를 만나서 많은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노벨경제학상 선정 때마다 후보자로 거론되곤 했지만, 그의 영역이 주류 경제학 분야가 아니다 보니 그 가능성은 희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분의 기업파워 이론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필자를 격려하는 차원으로 느껴졌지만, 그가 정직하게 고백했던 대목은 지금도 그가 큰 학자였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기술경제학자로서 국가 경제 레벨과 산업 레벨을 주로 다루다 보니 혁신의 현장인 기업과 사업 레벨을 커버 못 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데 반하여 필자는 기업 레벨과 산업 레벨을 동시에 다루는 통합성 그리고 기술혁신과 니즈 진화와의 관계 적합성을 성과의 결정인자(determinant)로 인식하는 이론적 틀과 자연법칙을 논거로 원용하여 보여주는 이론의 강건함에 있어서 자기는 너무 부족하다며 필자를 격려해 주던 그의 거목다운 일면은 아직 까지도 필자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가 필자에게 런던에서 그곳 학교까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느냐 (택시로 약 2시간 소요되며 대중교통수단은 당시 철도가 있었지만, 운행횟수가 너무 적어 대단히 불편했음) 라는 질문에 삼성의 런던 지점에서 Ride를 마련해 주었다는 필자의 말을 듣는 순간 놀라며, 당신이 누구인데 삼성이 … 하며 필자에 대한 정중함을 내보이던 그의 행동에서 그 당시 삼성이 영국에서 어떻게 인지되고 있었는지가 필자에게 확연히 전해져 왔다.

1990년대 초반 정부에서는 국책은행들의 통폐합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국주택은행(현국민은행과 합병이전의 국책은행)의 과장이라는 분이 대학 부설 산업경영연구소로 필자를 찾아와 주택은행 장기발전전략(안)을 마련하는 연구프로젝트를 수의계약으로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구에서 필자는 세계금융의 mega-trend의 과거 궤적과 전망의 시각에서 한국금융의 미래모습과 주택금융은행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세계금융의 mega-trend의 관점에서 1984과 1985년이 필자에게는 특별한 해로 인지되어왔다. 2차 세계대전 종식 바로 직전 1944년에 고정환율제인 Bretton Woods System을 채택하여 전쟁 복구수요와 전후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로 이어지는 대량경제를 지원하면서 미국의 절대적 강자위상이 강화되었지만 뒤이어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의 재부상으로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약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부득이 변동환율제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과 Asian 4 Tigers(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가 급부상하면서 미국이 세계 최대채권국에서 단숨에 세계 최대채무국으로 바뀌었던 해가 바로 1984~1985년이며, 미소 양극체제가 또한 붕괴되기 시작한 때도 같은 1984~1985년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레이건 정부는 금융부문에서도 규제 완화(deregulation)를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금융업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궁금증이 대단히 컸었다. 왜냐하면, 규제 완화 이후 재무 분야에서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는 미명 하에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라는 신(新)용어를 들고 위험을 사고파는 희한한 돈놀이꾼들이 등장하여 금융파생상품(이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제로섬 zero-sum이므로 이 시장을 유지하는 비용만큼 사회에 부담을 주는 네거티브 섬 negative sum의 해악 상품임)을 통해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월가(Wall Street)의 금융세력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디지털 혁명과 규제 완화에 따라 선물 옵션, 다양한 금융파생상품이 등장하는 대격변기에 필자가 수행한 주택은행의 전략연구와 뒤 이은 3여 년간의 주택은행 비상임 사외이사로서 필자가 접했던 경험은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여 비교적 심도 있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고 또 한편 세계금융의 주도세력과 그들의 행보에 대해 다소나마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런 인식과 경험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 1997년 국내에서 터진 IMF 사태와 더불어 같은 해 미국에서 무역적자의 급증과 금융파생상품의 폭증이 맞물려 발생하는 걸 보면서 이런 급변 현상들이 이후 한국과 미국과 세계금융시장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라는 물음이 동시에 제기되었다.

i) 한국의 경우 IMF 사태 이후 30대 재벌의 반(半)이 사라지는 충격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무역흑자가 엄청난 규모로 지속되는 것 보면서 (참고로 산업화 시작된 이래 3저 효과로 단 3년간 (1987-89)만 반짝 무역흑자를 기록했었음) 그리고 IMF 사태 이후에도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10년간 반(反)기업 정서 속에서도 살아남은 재벌사들이 2008 미국 발 경제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선방하며 한국경제를 대도약 시키는 위업을 보면서 필자는 재벌구조(Chaebol Structure)의 진화 논리와 기업의 지속번영원리를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ii) 한편 미국의 경우 2차 오일쇼크(1979)가 터지자 글로벌 규모로 초(超) 경쟁상황이 격화되고 여기에 디지털 혁명이 촉발되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패러다임이동이 전개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초반 레이건(Reagan) 정부는 이런 환경변화에 적극 적응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1980~1990년대에 걸쳐 미국의 제조업 메이커들의 상당수가 규제 완화와 주주가치 극대화(maximization of stockholder's value)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분위기에서 혁신의 효과가 크긴 하지만 또한 동시에 기술혁신과 노사관리와 공급사슬(supply chain) 관리 면에서 리스크(위험)가 큰 제조업을 쉽게 외면하고 대신에 비교적 용이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서비스, 유통업이나 금융업으로 전업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런 경제추세에서 미국은 1985년을 기점으로 세계최대채권국에서 최대채무국으로 바뀌게 되었고, 2008 Wall Street meltdown 전까지 약 20여 년간 특히 1997년부터 약 10여 년간 실물경제가 급속히 왜소화되었지만 같은 기간에 파생금융 상품시장이 급속히 초거대화 되는 바람에 실물경제의 왜소화와 금융경제(특히 파생금융)의 초거대화라는 불균형(imbalance) 구조가 물밑에 가려지고 오히려 미국경제가 활황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본질적으로 파생금융상품은 그 자체가 제로섬이므로 파생금융상품시장을 유지하는 비용만큼 결국은 국가 경제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파생 금융상품시장이 거대화되면 될수록 실물경제는 점점 더 왜소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실물경제로부터 파생 금융상품시장은 일단 돈이 들어오면 빠져나가질 않고 계속하여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작용하면서 실물경제를 피폐화시키다가 급기야는 2008년에 미국 발 경제위기를 촉발시켰고 글로벌 경제위기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로까지 위기를 증폭시켜왔는데 그 위기는 아직까지도 물밑에서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걸로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는 이런 배경에서 2008 Wall Street Meltdown 몇 개월 전에 ‘파생상품에 주목하는 이유’란 칼럼을 한국경제신문에 게재하여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었지만, 당시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한편 필자는 세계금융이 거시적 관점에서 어떤 방향의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며 세계 경제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를 다루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재벌주도의 경제 대국화 성공 논리와 원리를 동시에 밝히고 싶은 강렬한 연구 의욕이 필자에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어려운 시기인 줄 알면서도 필자의 강한 연구 열망을 전하며 당시 SK 그룹의 박영호 부회장 (지금은 고인이 되었음)에게 연구비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내부적으로 어떤 의사결정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SK경제연구소를 통해서 쾌히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필자는 SK 연구비에 힘입어 IMF 충격 이후 살아남은 재벌들이 2008 미국 발 세계 경제위기에서도 한국경제를 업그레이드시켜 온 동인과 동력이 무엇이었나, 의 관점에서 재벌의 등장과 그 진화과정과 성공원리 그리고 더 나아가 기업의 지속번영원리를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설명할 수 있는 이론인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Dynamic Management Theory (Hanyang Univ. Press, 2008)’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간하였고, 뒤이어 이를 더 정교화 한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Lambert Academic Publishing, 2010)’을 독일에서 출간하였다.

필자가 2000년대 들어 십 수차례 국제학술회의에 참여하여 세계 석학들과 대화할 때마다 자주 접하는 관심 이슈는 한국의 재벌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재벌들이 어떻게 그렇게 승승장구하느냐, 어떻게 ‘소유와 경영의 분리’ 대신에 ‘소유와 경영의 조화’가 가능한가, 또 2~3세대로 경영권 상속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뤄지느냐는 것이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재벌들의 기술개발을 통한 혁신전략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2011년에 필자는 Wiley Encyclopedia of Management 3rd Edition, Strategic Management의 chief editor인 영국 Warwick Univ.의 John McGee 교수(Strategic Management Society 전 회장)와 Wiley 출판사로부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관점에서 한국 대기업의 진화에 대해 집필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보내주었는데, Wiley 백과사전(2015년 출간)에 “Chaebol Structure“의 제목으로 실려 세계로 확산 중이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후 50년대 들어 미국 주도의 대량경제 시대가 개화기를 맞고 60년대 들어 성장기를 맞는 절묘한 타이밍에 한국의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의 경제개발을 착수하면서 재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들어 POSCO 철강 플랜트를 시발로 중화학 투자 드라이브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1973년과 1979년 양차 오일 쇼크로 Petroleum-dollar가 중동으로 유입되면서 중동 붐을 일으키며 이는 재벌들의 성장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후반에 촉발되기 시작한 디지털화 혁명으로 미국의 제조업이 쇠락하는 타이밍에 재벌들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중화학 투자를 본격화하였는데 이는 1997년 IMF 위기 전까지 순항하는 모습이었으나 1997년 IMF 사태로 국내 30개 재벌 중 약 반(13개)이 파산하는 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경제는 IMF 사태로 환율이 현실화되는 바람에 오히려 한 단계 대도약(大跳躍) 하는 호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는 IMF 위기에서 살아남은 재벌들이 수출주도의 혁신 효과가 큰 제조업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business portfolios)’ 그리고 재벌가(財閥家) 중심의 시의적절한 중앙집권식 결단과 전문경영인 중심의 분권식 실행(centralized decision-making and decentralized execution)으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아닌 ‘소유와 경영의 조화(harmony of ownership and management)’를 추구하는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가 절묘하게 성공 동인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요컨대 IMF 위기 때 살아남은 재벌들은 ‘제조업 중심의 사업구조’와 ‘소유와 경영의 조화’를 추구하는 한국형 경영 스타일(Korean style management)’을 기반으로, 가속화하는 기술변화와 글로벌 시장의 니즈 진화에 부합하는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을 강조하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을 펼치면서 산업화를 견인하며 한국경제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는데 이런 배경에서 그들은 2008 미국 발 글로벌 경제위기에서도 오히려 이를 기회로 선방하며 세계 10위권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대국화를 견인하는 주역이 되었다”

필자는 2008년 정년 이후에도 벤처 붐을 뒷받침해 주는 정부의 지원책 일환으로 AI 시대를 선도할 혁신이론들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비 지원 사업에 힘입어 이익추구(profit seeking)와 관련한 혁신이론과 방법론을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관점(dynamic management view)에서 개발한 ‘Chaebol Structure’와 SSCI 논문들(Dynamic Management View, 2017; Direct Causal Mechanisms of Profit, 2018; Business Model Schema, 2019; Comprehensive Unified Paradigm, 2021)이 유수한 국제경영저널에 게재되면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니즈진화와 기술변화에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으로 적응하는 혁신경영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니즈맞춤혁신을 가치/소득을 결정짓는 필수적 결정요인(decisive determinant)으로 인식한다. ‘기술(공급 측면)과 고객니즈(수요측면) 두 차원을 사업 레벨(micro-foundations level)과 산업 레벨(macro-foundations level)로 나누어 사업 레벨에서는 기술과 고객 니즈의 관계를 그리고 산업 레벨에서는 기술에 영향을 주는 기술변화와 고객니즈에 영향을 주는 니즈진화와의 관계를 동시에 다루며, 이익/성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직접 인과 메커니즘(direct causal mechanism)을 핵심으로 다룬다.

2015년 후부터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고객의 니즈는 갈수록 점점 더 개별화되면서 ‘기술 변화의 가속화와 고객위상의 급상승’이라는 특징을 내보이게 되는데 이런 배경에서 기술과 고객 니즈 두 축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4차 산업 시대에 잘 부합하는 경영 패러다임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대한민국 산업화 성공 경험과 세계 산업 주도권이동경험을 통하여 실증된 이론이며, 이에 대해 해외 석학들과 컨설턴트로 부터 확인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의 특・장점을 정리해 본다. (이 대목은 다소 이론적이므로 관심 없으신 분들은 무시해 주세요.)

1)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세계 기술・경제의 Mega trend와 대한민국 산업화 경험에서 잉태되었다.

2)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대기업(재벌) 주도의 경제 대국화 동인(動因)이었다.

3)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빛을 발하는 영역은 실물경제(real economy)이다.

4)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의 본질은 적응(adaptation)이며 실제적 합리성(practical rationality)에 기초한 적응화(adaptizing) 의사사결정방식을 따른다.(여기서 적응화란 성취 가능한 이익(available profit (AP) = WTP – Cost)에서 WTP를 달성할 수 있는 대안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다음 그 대안을 실행하는데 발생하는 비용이 비교적 적은 대안을 후속으로 선택하는 방법을 말하며, 이에 대한 논거를 실제적 합리성이라고 말한다.)

5)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인과율(causality)에 기초하되,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보편법칙성(universal law), 어떤 상황들에서만 적용되는 상황적응 적합성(contingency rule) 그리고 특수 상황 한 곳에서만 적용되는 특유성 (specificity)를 통시에 고려하는 통합 패러다임(comprehensive unified paradigm)을 핵심 방법론으로 취한다.

6)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의 논거는 자연법칙(natural laws)이며, 자연법칙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결정론(determinism)으로 이해하며 이런 의미에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섭리 경영(Providence Management)으로 불릴 만하다.

7)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에서는 WTP 달성을 보장해 주는 대안인 normative way를 우선적으로 탐색한 후 거기에 이르는 적절한 길을 선택하는 법을 따르는데 이를 ‘Seek Norm & Get-to-Norm’으로 부른다.

8)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절대적 가치판단기준(absolute value judging criteria)을 따른다. 이는 지력(intelligence)에 의해 인지된 사실(fact)에 대해 자연의 섭리에 기초하여 가치판단(value judgment)을 한 후의 사실 중에서 자유의지(free will)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9)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강건한 이론(good theory)으로 그 실효성이 높다. 이는 좋은 이론보다 더 실무적인 것은 없다 (There is nothing more practical than a good theory)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10)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 교수팀이 보여준 ‘KTA 장기전략 연구결과’의 부실에 대한 반작용에서 촉발되었다.

11)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가 2010년부터 아마존에서 판매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2)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북경대와 난까이(Nankai)대의 석・박사과정의 정규과목으로 2010년부터 가르치는 이유는 기업파워 이론(firm power theory)과 니즈진화이론(needs evolution theory)이 지니는 이론의 강건성과 높은 실효성 때문이다.

13)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부재(不在)로 노키아가 쇠락했음을 알았다고 2011년 San Diego에서 있었던 SMS International Special Conference에 고백한 노키아 자문 교수의 증언은 진실이었다.

지난 50여 년간의 필자의 연구행보가 보여주듯이 참으로 공교롭고 다행스럽게도 연구 의욕을 자극하는 해프닝이 생길 때마다 기업과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산업·기업·사업연구에 대하여 폭넓고 심도 있는 연구를 필자는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런 연구 경험을 토대로 세계 석학들과 교류하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라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구축해 올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해 주었던 조직들 특히 삼성, SK, POSCO, KT, 한국주택은행, LG, 철강협회에 감사하며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필자는 자연계 내의 질서를 밝히는 데 있어서 원천적으로 오류를 전제하고 있는 논리실증주의(logical empiricism)의 과학적 방법론 대신에 자연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논거로 취하여 (예컨대, 물은 항상 아래로 흐르며 협곡에서는 빨라진다/Domino를 통해서 인과관계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최종목적지에 도달하는 질서를 원용하는 등을 말함), 대한민국의 경제 대국화 원리와 기업의 이익추구와 관련한 강건한 이론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자평하곤 한다.

현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선진국은 물론 산업화 선발국과 후발국을 포함한 30여 국가들에서 산업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효성이 큰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더욱이 4차 산업 시대에 걸맞은 경영 패러다임으로 부각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독자 이론으로 개발하고 세계로 확산시킬 수 있는 지혜와 지식과 깨달음을 허락하여 주신 하느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영광과 찬미와 찬양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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