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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샹하이 원경 ⓒ 박선협^^^ | ||
서방의 중국 침략 거점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이지만 샹하이만은 예외다. 인근의 남경, 소주, 항주 등이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샹하이는 마르코폴로가 중국을 여행할 때만 해도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해안가의 조그만 어촌이었다.
비록 이후에 비단장사를 위해 양자강 하구에 발달하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에는 인구 5만명도 되지 않는 조그만 도시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의 샹하이로 만든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때문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와 영국은 끊임없는 혼란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840년에 발달하여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마감된 이후 2년여간 민중의 자발적인 투쟁은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불평등 조약으로 마감된 이 약정에 따라 샹하이는 영국의 조차지역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미국 등 서방세계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동방침략의 거점이 된다.
샹하이는 근대 중국의 아픔을 대변하는 서세동잠의 시발점이었으나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사상의 유입로이기도 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 1차 대회가 열린 곳도 이곳이었으며 비록 장개석의 반동 구데타로 실패했지만 27년 노동자들의 무장봉기가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근대 중국의 역사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이뤄졌지만 샹하이만큼 서구의 안정적인 선진자유사상의 보급 창은 드물었다. 노신, 주은래, 등소평 등 중국 근,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이 선진사상을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 곳이기도 했다.
현대사에서 샹하이를 떠올릴 사건은 1960년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이곳 노동자들이 완전한 자치정부를 요구하면서 공산당 정부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던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곳, 일본의 '시라가와' 대장을 처단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에 대한 기억으로 샹하이는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있다.
샹하이는 북경, 천진과 함께 정부직할시다. 인구는 서울과 비슷하다. 중국 각지에서 그리고 세계의 무역상과 관광객들이 한데 몰려들어 언제나 생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북경이 정치, 문화, 관광의 도시라면 샹하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무역경제도시라 할 수 있다.
거대한 바다의 도시
샹하이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 있다. 북경을 비롯한 여타의 대도시들이 한결같이 중국적인 모습을 띄었다면 샹하이는 이런 선입감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한다. 샹하이에 서는 높이 솟아 있는 빌딩의 마천루군과 서구적 석조건물을 보면서 과연 여기가 중국의 일 부인가 하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황포공원에서 중산로를 바라 볼 때나 남경로, 회해로를 걷다보면, 샹하이에 어울리지 않은 동양적인 모습은 오직 동양인 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곳이 샹하이의 명물이자 과거 영국 및 공동 조계지역에 놓여있던 <동양의 파리>인 샹하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중국인 거주지는 이곳을 피해 외곽지역으로 광범위하게 널려 있다. 이곳은 여행자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있는 곳이 아니다.
샹하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유적을 돌아보는 것보다 시가를 구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행이 넘치는 거리와 서민정취를 풍기는 예원시장 그리고, 수없이 뚫린 뒷골목들이 있다. 샹하이의 제일 번화가인 남경로를 중심으로 보면 조계시절의 샹하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음은 우리들 대한민국의 과거 임시정부가 있던 프랑스 조계지역 회해로를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샹하이 도로의 특징이 있다면 각기 중국의 주요도시나 성을 땄다는 것이다. 우선은 남경로 에서 그 좌쪽에 북경로, 심지어는 우르무치까지 있다. 북경이 사적史蹟의 거리라면 샹하이는 '인간의 거리'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처럼 샹하이 매력은 바로 중국전국에서 모여든 굴지의 상업 중심지로서의 인간시장 냄세를 물씬 풍긴다는 것이다.
중국 동쪽 지역에 자리잡은 이곳 샹하이는 이 나라의 실질적인 산업발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늘의 중국을 이끌어 오고 있다. 198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변화와 자유기업화의 새 물결을 맞아 재 도약의 발판을 굳히고 있는 샹하이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으리만큼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샹하이의 역사
샹하이는 후Hu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우송강의 하류일대를 옛날에 '후두'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후'는 대나무로 만든 낚시기구를 말하는 것으로 샹하이가 어촌이었음을 나타낸다.
샹하이는 때때로 춘쉔Chunshen 또는 짧게 '쉔'이라고 불린다. 기원전 3세기 영주였던 춘쉔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 하나의 이름은 '후아팅'. 이것은 기원후 751년에 현재의 샹하이의 일부분을 차지했던 나라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샹하이는 오래 전에 사라진 송지앙강의 지류 샹하이 강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돛단배의 정박지로서의 자연적 이점 때문에 이 강의 서쪽 동쪽에 읍구역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이것이 후아팅국의 가장 큰 도시가 된 샹하이다. 1292년에 샹하이와 후아팅국의 4개읍이 병합되어 샹하이 시를 이루게 되었다.
샹하이가 우송강으로 개명된 것도 이 시기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샹하이를 떠올릴 때 우송을 황푸강으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1842년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난진Nanjing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샹하이, 캔톤, 닝보, 퓨조우 그리고 아모이의 5개항을 외국인 무역과 거주를 위해 개방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서양 무역회사들의 진출은 마카오와 캔톤, 또 더 남쪽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이후 샹하이는 무역의 중심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1930년대와 40년대에 샹하이는 개혁의 물결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로혼잡, 심각한 주택부족으로 혼란을 겪었다.
1988년 북경과 샹하이는 새로운 수입협정을 체결하고 3/4이상의 년수 입을 포기하는 대신 중앙정부에 일정한 양을 기부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체의 용도에 쓰기로 했다. 현재 샹하이는 중국정부의 개방 개발정책에 의해 공항근교를 집중 개발하여 세계무역센터와 각종 고층건물과 오피스, 특급 호텔등이 무더기로 개관됐거나 건설 중이다.
얼마나 그럴싸했으면 모처럼 방문한 북한의 김정일로 하여금 '천지개벽의 역동적인 모습'이라며 당장 그 배경을 연구케 할 정도로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을까. 샹하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그 박진감 넘치는 도시의 활력에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그야말로 샹하이! 그 이름만으로도 매력적인 곳이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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