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있는 국토에서 불(佛)이 이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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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있는 국토에서 불(佛)이 이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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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념 문화유산답사기>황룡사터

 
   
  ^^^▲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 국립경주박물관^^^
 
 

"한때 경주시에서 해군의 지원을 받아 황룡사종과 감은사종을 찾는 탐색작업을 문무대왕 수중릉 주변에서 벌인 적이 있었다면서요?"

"그랬니더. 결국 아무 것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몽고가 황룡사를 불태운 뒤, 양북면 앞바다에 빠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 황룡사종은 엄청난 크기였다던데?"

"삼국유사에 보면 황룡사종은 높이가 3m 12cm에 무게가 무려 149톤이나 나갔다고 하니더. 에밀레종이 18.9톤이라고 하니까 에밀레종의 7배도 넘는 무게니더. 그게 만약 지금까지 있었으모 세계에서 제일 무거운 종이 될 뻔 했니더."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아빠는 지금 분황사를 빠져나와 황룡사터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어. 황룡사터로 가는 길 왼편에는 옥수수와 호박넝쿨이 마구 뒤엉켜 있어. 마치 황룡사의 비밀을 끝내 숨기고 말겠다는 듯이. 그리고 황룡사터로 가는 길 오른편에는 당간지주가 허수아비처럼 우뚝 서서 아빠를 노려보고 있어. 함부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듯이 말이야.

 

 
   
  ^^^▲ 황룡사터 입구 왼편에는 옥수수와 호박넝쿨이 마구 뒤엉켜 있다
ⓒ 이종찬^^^
 
 

근데 벌써부터 신 선생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버렸어. 그리고 손사레질을 자꾸 하면서 아빠 혼자 다녀오래. 자기는 여기서 담배나 한 대 피우며 기다리고 있겠다면서. 하긴 나이가 들면 아빠도 저럴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빠가 누구야? 아빠의 경주 길라잡이 신 선생을 저대로 편하게 쉬라고 놔두고 갈 사람이 아니지.

"근데 감은사종은 특별한 기록도 없다면서요. 단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훔쳐가다가 풍랑에 수장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이지."

"그기 아니니더. 수중릉 부근으로 흘러드는 그 하천 이름이 와 대종천(大鐘川)이라고 부르겠능교?"

"하긴. 그러고 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구먼."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이곳 황룡사터(사적6호)는 원래 늪지대였대. 그래서 늪지 2만5000여 평을 막는 1차 공사를 하는 데에만 자그만치 17년이나 걸렸다는구나. 그러니까 진흥왕 14년, 서기 553년부터 황룡사를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35년, 서기 574년에 늪지대를 모두 막고 황룡사 주변의 담장을 쌓았대. 그리고 그때 본존불이었던 금동장륙상이 완성되었대. 금동장륙상은 신라 최고의 국보였대.

금동장륙상은 <삼국유사>에 이렇게 나와 있단다. 인도의 아육(아소카)왕이 불상을 조성하고자 세 번이나 시도했다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대. 그런데 그때 태자가 아무런 일도 거들지 않기에 아육왕이 그 이유를 물었대. 그러자 태자가 이 일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고 말한거야.

아육왕은 포기하지 않고 인도 전국을 다니면서 불상을 조성하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구나. 결국, 아육왕은 배에 구리 5만7000근과 황금 4만푼, 그리고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어 바다에 띄워보냈다는 거야. 인연 있는 국토에서 불(佛)이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 황룡사터 오른 편에 서 있는 당간지주
ⓒ 이종찬^^^
 
 

그런데 그 배가 긴 세월을 떠돌다가 신라의 울산 근처 바닷가에 닿은 거야. 그때 바다를 지키던 관원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어. 보고를 받은 진흥왕은 그 재료를 사용해 단 한번에 불상을 완성시켰다는구나. 그때 조성한 본존상에 구리 3만5700근에 황금 1만198푼이 들어갔대. 그리고 본존상을 보좌하는 두 보살상에도 구리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이나 들어갔다는 거야.

그 본존상이 바로 금동장륙상이래. 금동장륙상은 지금 금당 중앙에 남아 있는 3개의 석조대석의 대좌에 자리잡고 있었대. 이 석조 대좌의 크기로만 보아도 당시 금동장륙상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어.

"황룡사는 신라 4대왕에 걸쳐 93년만에 완성되었다면서요?"

"선덕여왕 12년, 643년에 황룡사를 사실상 다 지었다고 하니더. 그런데 자장법사가 황룡사 구층목탑을 지어야 한다고 선덕여왕에게 아뢰어 그때부터 황룡사 구층목탑을 2년에 걸쳐 지었다고 하니더."

"그러니까 구층목탑이 다 지어진 서기 645년에 황룡사의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는 그말이군요."

 

 
   
  ^^^▲ 황룡사터를 가로 지르고 난 신작로
ⓒ 이종찬^^^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반월성 동쪽인 이곳에 황룡사를 짓게 된 데에도 일화가 서려 있단다. 들어볼래? 당시 진흥왕은 흥륜사의 주지로 있을 정도로 불심(佛心)이 아주 깊었대. 또한 불심이 너무도 깊은 나머지 자신과 왕비의 이름까지도 석가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백정'과 '마야'라고 부르기도 했대.

때문에 진흥왕은 반월성 맞은편인 이곳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했어. 그런데 이곳에 누런 용이 나타난 거야. 그래서 진흥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이곳에 황룡의 이름을 따서 황룡사라는 절을 짓게 된 거야. 당시 황룡사는 신라 역대왕들이 친히 금동장륙상에 참례했고, 외국의 사신들도 자주 와서 예배를 했대.

황룡사는 신라가 망한 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절이었다는구나. 하지만 고려 고종 25년, 서기 1238년에 몽고군이 쳐들어와서 황룡사의 웅장한 규모를 보고 기겁을 하다가 마구 불태워 버렸대. 그 뒤 임진왜란 때에도 왜놈들이 불타버린 황룡사의 유물들을 모조리 파헤쳤대.

조선시대에 만든 <동경잡기>에는 '오직 금동장륙상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었대.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엄청난 금동장륙상마저 사라지고 말았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또 황룡사 벽에는 통일신라시대 때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그린 '노송도'도 있었대. 그 '노송도'는 얼마나 잘 그렸던지 날아가던 새들이 진짜 소나무로 착각하여 날아들다가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는 일화도 있어.

 

 
   
  ^^^▲ 황룡사터 곳곳에 마치 성벽처럼 남아있는 돌덩이들
ⓒ 이종찬^^^
 
 

"황룡사는 일 탑 삼 금당이 있었던 독특한 양식이라고 하던데요?"

"황룡사는 신라 최대이자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고 하니더. 그라고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있었고, 중금당 좌우에 동서금당이 있었다고 하니더. 지금은 주춧돌만 저렇게 남아 있지만."

그래. 신 선생의 말마따나 황룡사터 곳곳에는 금당과 탑, 강당, 중문을 받쳐주던 초석들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당시 황룡사는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 수를 늘려갔대. 그러니까 절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처님의 드넓은 세계로 들어선다는 그런 느낌이 들도록 만든 거지.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황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구층목탑(九層木塔)이란다. 이 목탑은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일꾼 200여명을 거느리고 만든 탑이래. 다보탑과 석가탑이 백제의 명공 아사달이 지었듯이. 그런 걸 보면 당시 백제인들의 건축기술이 신라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

이 황룡사 구층목탑에도 자장법사의 일화가 서려 있단다. 자장법사가 중국에 유학할 때 신인(神人)을 만났대. 그때 자장법사가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고 있는 신라를 크게 걱정했는데, 신인이 '신라가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외적들이 얕잡아보고 그런 것이다'고 말했다는 구나.

 

 
   
  ^^^▲ 황룡사터 중간쯤에 서 있는 안내도
ⓒ 이종찬^^^
 
 

그리고 신인은 그러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이 구층목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日本),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應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했던 거래.

그러니까 신라를 둘러싸고 자주 침입했던 외적들이 바로 이 아홉 나라였다는 그 말이지. 그리고 그때부터 외적의 침략이 많이 사라졌대. 하지만 황룡사 구층목탑은 50년이 지난 뒤, 그러니까 효소왕 7년, 서기 698년에 벼락을 맞고 불타기도 했대. 그 뒤에도 다섯 번에 걸쳐 중수를 거듭하다가 결국 몽고군에 의해서 화를 입고 말았던 것이지.

자료에 보면 황룡사 구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m라고 나와 있어. 그리고 높이가 183척에다 상륜부가 42척이래. 그러니까 합해서 225척(80m)이나 되는 거대한 탑이었대. 요즈음 건물로 따지자면 대략 20층 높이 정도쯤 될 거야. 또한 이 탑의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었다고 하는구나.

"1970년부터 7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면서요? 그리고 그때 확인한 결과 담장 내 총면적이 2만여 평이라는 게 밝혀졌고, 늪지를 매립하여 절터를 마련한 것도 사실로 밝혀졌다고 하던데."

"아, 지금도 발굴조사를 중단한 것은 아니니더. 한동안 잊을 만하면 발굴조사를 하고 그러니더."

 

 
   
  ^^^▲ 초원처럼 변해버린 황룡사터
ⓒ 이종찬^^^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그때 높이 20.1cm의 금동불 입상과 높이 8.3cm의 금동보살의 불두(佛頭, 불상의 머리)가 나왔대. 또한 황룡사 강당 자리 북동쪽에서는 높이가 182cm, 최대 폭 105cm의 대형 치미도 나왔대. 이 치미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든 크기래.

치미가 뭐냐구? 치미는 망새를 말하는 거야. 망새는 또 뭐냐구? 망새는 기와집의 대마루 양쪽 머리에 얹는 용머리처럼 생긴 장식용 기왓장이야. 용의 머리라 해서 용두(龍頭)라고 부르기도 하지. 또 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서는 금제합, 명문판, 염주, 청동방함, 은합 등도 나왔대.

"신라 삼보 중 2개가 황룡사에 있었다던데, 신라 삼보는 무엇을 말합니까?"

"아, 그것도 모르능교? 신라 3대 보물이란 진평왕 때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玉臺),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 그리고 황룡사 구층목탑(九層木塔)을 말하니더."

"황룡사 강당에서는 자장법사와 원효대사가 강설을 하기도 했던 곳이라면서요?"

"그 참, 줏어들은 것도 우째 그리 많능교? 그때 7일 동안 감로운무(甘露雲霧)가 강당을 내려 덮었다고 하니더."

그래. 아빠가 지금 서 있는 이 황룡사터에도 운무가 가득 끼어 있어. 곧 감로가 내릴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풀만 무성한 황룡사터 어디선가에서 지금까지도 승천하지 못한 황룡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물론 그 소리는 황룡사터에서 제멋대로 자란 잔디를 깎는 제초기 소리이긴 하지만 말이야.

 

 
   
  ^^^▲ 금동장륙상을 안치했던 곳으로 보이는 석조 대좌
ⓒ 이종찬^^^
 
 

 

 
   
  ^^^▲ 황룡사 창건과 관련된 기념비. 최근에 세운 것이다.
ⓒ 이종찬^^^
 
 

 

 
   
  ^^^▲ 황룡사터 발굴 때 나온 망새(치미)
ⓒ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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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 2003-08-28 14:47:40
시인의 눈은 참으로 예리하군요.
푸름이와 빛나는 좋은 감성으로 자랄수 있어서 부럽읍니다. 종찬님 사진과 함께
기사 잘봤읍니다. 좀 무식해서 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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