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단군의 나라로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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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단군의 나라로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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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선자는 대한민국을 제사장의 나라로 선포하라

현생 인류는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의 한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세계 만국의 모든 종족은 형제국이 된다. 또한 그의 자손들이 종교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천계(天界)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여호와 옥황상제(玉皇上帝)를 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했습니다.

태호복희와 여호와 삼신(三神) 옥황상제께서 무극이 태극(진리의 정법)을 창제하시어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었으며 유,불,선 3종교가 파생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의 부부는 인류의 부모이며. 인류 문명의 시조이며, 종교의 조종(祖宗)입니다.

 
   
     
 

1.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은 여호와 상제의 아들이다.

인류의 성산(聖山) 엄택곡부(奄宅曲阜:중국 하남성)는 [인류의 부모(시조)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처음 진단국(조선)을 개국한 땅이다. 그 때 복희황제와 여호와 옥황상제께서 신옥(神屋)에서 거처 하실 때의 춘절(春節)에는 온갖 새들이 찾아와 지저 기고, 온갖 꽃들이 향기가 피어났다. 인류의 부모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곡부(曲阜)에 내려오시어 계실 때는 각 가정마다 만복이 충만하여 영화롭고 부귀를 누리며 살았다.

배달국 제 8세 안부련 환웅(염제신농)이 원년 입술(BC3239)년에 황제의 제위에 올랐다. 73년 갑술(BC 3167년)에 소전(少典:복희) 황제의 명을 받아 강수(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다. 태호복희황제의 아들 염제신농씨가 곧 제 8세 환웅 안부련 이시다. 염제신농은 복희가 도읍한 陳(진: 曲阜(곡부)에서 140년 동안 재위하고 붕어하셨다. 陳(진)은 지금의 開府(개부:태원)이고 陳州(진주)이다.

2. 황제헌원은 유웅국 왕이다.

[태호복희와 여호와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의 출생은 어느 날 하루 저녁에 하늘 복판에 북두칠성을 에워싼 금빛을 보고 황제헌원을 임신하여 24개월 만에 有熊(유웅: 하남성 신정)의 남쪽 헌원(하남성)에서 낳았기 때문에 軒袁(헌원)이라 이름 지었다.

補史記 三皇本紀(보사기 삼황본기)에서 少典國(소전국) 임금(복희)이 돌아가자 염제신농이 계승하고 그가 돌아가자 동생 公孫(공손:황제헌원)이 제후가 되었다. 황제헌원은 북쪽의 熊(웅)에서 지금의 開封(개봉) 新鄭(신정:하남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有熊國(유웅국)으로 고쳤다.

유웅국의 임금 헌원은 자기의 부인 附寶(부보)를 데리고 남쪽의 衡山(형산)에 있는 그의 형 염제신농의 능에 항상 참배하고 幡冢(번총)에 있는 그의 아버지 태호복희의 능에도 부보와 같이 참배하였다.

 
   
     
 

복희와 여호와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BC 2692-2592년)은 白民國(백민국)에서 출생하였다.

백민국 사람들은 몸빛이 희고 부모가 돌아가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다.

헌원은 姬水(희수) 강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다시 성을 고쳐 姬(희)씨라 하였다.

황제헌원은 훗날 그의 아버지 복희씨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선인(發貴里仙人)의 후손인 자부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삼황내문경(황제내경)이란 책을 받았다.

황제내경은 소문(素問) 81편과 영추(靈樞)가 162편이다.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의학 서적이며 전국(戰國 :기원전 475-221년)에서 진한(秦漢 : 기원전221-기원후 220년)사이 시대에 와서 수정 보완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司馬貞(사마정)이 쓴 사마천 사기의 3황 본기 부록에서 태호복희의 성은 風(풍)씨이고 수인씨의 뒤를 이어 天皇(천황)에 올라 111년을 재임하고 다음 복희의 여동생 여호와가 木德王(목덕왕)으로 제위에 올랐다. “태호복희와 여호와“가 동방의 陳國(진단국)을 맏아들 염제신농이 계승하고 마지막 염제유망이 멸망한 임술년 다음해 계해(BC 2962년)에 黃帝有熊氏(황제유웅씨)는 土德王(토덕왕)으로 제위에 올라 涿鹿(탁록)에 도읍지로 정하고 熊國(웅국)이라 칭하고 100년을 재임하고 나이 111살에 돌아가셨는데 橋山(교산)에 장례했다.

◆ 황제헌원은 부인이 4사람 있었다.

황제는 부인이 4사람이고 아들이 25명이 있었다. 황제는 재위 120년 후에 첫째 부인 부보(附寶)를 아내로 맞이하여 맏아들 玄囂(현효)를 낳고 둘째 부인 여절(女節)을 아내로 맞아 昌意(창의:소호)를 낳았다. 소호씨의 어머니 嫘祖(누조: 황제헌원의 부인)는 큰 별이 무지개처럼 華渚(화저)의 물가에 내려와 몸에 감응하여 소호를 낳았다. 소호의 이름은 質(질), 또는 摯(지)이며 성은 己(기), 또는 紀(기)다.

소호는 할아버지 태호복희의 법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소호라 한다. 소호는 金德(금덕)의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색은 백이고 서쪽을 관장하며 금천씨라 하였다. 소호는 窮桑(궁상)에서 帝位(제위)에 올라 뒤에 동쪽의 曲阜(곡부)로 도읍을 옮겼다. 후세의 사가들은 태호복희가 도읍한 陳(진)을 “복희의 터”라 하고 소호가 도읍한 곡부는 ”소호의 터“라 하였다. 창의(소호)는 촉산씨의 딸 女樞(여추)를 아내로 맞아 顓頊(전욱)을 낳았다.

황제헌원의 아들 少昊金天(소호금천 BC 2598-2514)씨는 계묘년에 진단국 왕위에 올라 83년 통치하고 100살에 돌아가자 雲陽(운양)에 장례했다. 창의(소호)의 아들 전욱고양은 정묘년에 왕위에 올라 78년 간 재임하고 91살에 돌아가셨는데 澲陽(업양)에 장례 하였다. 전욱고양(BC 2513-2436)의 할아버지가 황제헌원이며, 禹(우)임금의 조부가 된다.

황제의 맏아들 현효(소호)의 아들이 帝嚳高辛(제곡고신:BC 2435-2365)이고 고신왕이 바로 제곡이다. 그의 이름을 준(峻) 또는 高辛(고신)이라 하고 사람들은 고신왕이라 불렀다. 고신왕 제준은 大荒(대황)의 동쪽 들판에 中容國(중용국), 司幽國(사유국), 白民國(백민국), 黑齒國(흑치국)이 있고, 대황의 남쪽 들판에 三身國(삼신국), 季釐國(계리국)과 대황의 서쪽 들판의 西周國(서주국)은 다 제준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고신왕은 을유년에 왕위에 올라 70년을 통치하고 105살에 돌아가셨다. 頓丘(돈구)에 장례 하였다.

◆ 고신왕은 4사람의 부인이 있었다.

고신왕의 첫째 부인은 유태씨의 딸로서 이름은 姜源(강원)이다. 강원은 后稷(후직)을 낳고 후직이 온갖 곡식을 파종하였고 후직의 손자 叔均(숙균)은 처음으로 소를 부려 농사를 지었다. 제준은 三身(삼신)을 낳고 삼신은 義均(의균)을 낳았다. 의균은 쟁기, 꽹이, 가래 등의 온갖 농기구를 처음 만들었다. 후직은 周(주)나라 시조가 되었다. 둘째 부인은 有娥(유아)씨의 딸로서 簡狄(간적)이며 卨(薛:설)을 낳았다. 설은 殷(은:商(상)나라 시조가 되었다.

(1) 중국의 시조 요임금은 고신왕의 아들이다.

고신왕의 넷째 부인은 娵訾(추자)씨의 딸로서 아들 常儀(상의) 摯(지)가 왕위에 올라 9년을 재임하고 백성들로부터 쫓겨나고, 셋째 부인은 陳鋒(진봉)씨의 딸이며 이름은 慶都(경도)이다. 이 경도 부인이 낳은 아들이 防勳(勛:방훈)이며 곧 堯(요)임금이 갑진(2358년)에 왕위에 올라 BC 2258년까지 100년 동안 재임했다. 唐堯帝(당요제)는 대 조선국 유호씨(고수)의 아들 우순(虞舜)임금이 병신년(BC 2285)부터 28년 동안 요임금의 나라를 섭정하고 병술년(BC 2255)부터 계유년(BC 2208)까지 50년 동안 재위하고 110살에 죽었다.

(2) 순임금은 대 조선국 사람이다.

우순(虞舜)임금은 高叟(고수:유호씨(有戶氏))의 아들이다. 고수는 高矢禮(고시례)의 친형이다. 고시례는 진단국(배달국:조선국) 환웅천왕의 신하로서 主穀(주곡)을 담당하는 農士(농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유호씨(고수,瞽者(고자)의 아들 순이 檀朝(단조:진단국: 단군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고 이웃나라 唐堯朝(당요조)에서 벼슬을 하므로 父子(부자)간에 서로 의견이 달라 화목하지 못하자 작은 아들 象(상)을 사랑하고 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즉 순은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고 唐堯(당요)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자 요임금은 舜(순)을 신임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요임금은 순에게 국사를 맡기고, 두 딸로 유혹하게 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은 일찍이 조선의 환부(신부,추기경)로 있었으나, 요의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부터,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순임금이 왕위에 오른지 61년째 蒼梧(창오)의 들판에 도망치다가 우 임금의 신하에게 시해를 당해 죽었다.

(3) 고조선 3한의 단군왕검과 요임금

[부도지와 환단고기, 서경(書經)]의 기록은 서로 상통하고 있으며 그 당시의 상황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측의 사서(史書)를 살펴보면 요임금과 우임금의 역사를 중국 측의 관점에서 기술돼 있습니다.

배달국 제 18세 거불단 환웅씨의 아들 임검(壬儉)씨가 천부도(天符都)를 건설할 땅을 선택하고자 동북 쪽 자방(磁方)에 왔을 때에 도요(陶堯:요임금)가 천산(天山) 남쪽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려서 당도(唐都)를 세우고 5중앙의 제왕이라 자칭하며, 조선의 부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피고 지는 명협(蓂莢)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며 명협으로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지하고 부도(符都)의 역을 버렸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두 번째의 큰 이변이었다.

조선국의 임검씨가 매우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아들 유호씨(有戶氏:고수) 부자(父子)로 하여금 유순 환부(鰥夫:신부)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요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하고, 공순히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순의 아버지 유호씨는 키가 열 자이고,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 보다 나이를 100여 살 더 먹었으며, 임검씨를 도와 도리를 행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유순은 일찍이 조선국의 천부도 법을 집행하는 환부(신부)로서 혼인할 수 없었으나, 요의 두 딸을 밀취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며, 당(唐)을 섭정하였던 것이다.

당시 순의 아버지 유호(有戶)씨가 순의 사도 우(禹)에게 타일러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天符都(천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모욕하고, 위협하며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순의 아버지)를 수차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유순은 왕위에 오른지 61년째 蒼梧(창오)의 들판에 도망치다가 마침내 모산(茅山:강소성 구곡산) 진지(陣地)에서 우 임금의 신하에게 시해 당해 죽었다. 순의 시체는 창오의 들판 구이산(九疑山) 남쪽에 묻었다. 순의 아내 아황과 여영도 원한이 사무쳐 상수(湘水) 강물에 빠져 죽고 작은 아들 商均(상균)은 고국에 돌아와 司徒(사도)의 관직을 맡았다.

중국측 서경(書經)은 우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순(虞舜)은 남들과 달리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두개이므로 그의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중화(우순)의 부친은 고수(유호)이고, 순의 부친 고수(유호씨)는 맹인이었다. 순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매우 오만 불손하였다. 고수(유호씨)는 후처가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순은 이를 피해서 도망 다녔고, 순이 잘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면 곧 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와 계모에게 순종하며 잘 모셨고, 동생에게도 잘 대했으며,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순임금은 우를 천거 받고, 우는 전국 산천을 개간하여,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하였으며, 아홉 개의 강 물길을 통하고, 전국을 9주로 확정하였다. 순은 스물 살 때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서른 살에는 요임금에게 등용되고 쉰 살에 국사를 대행하였다. 유순은 나이 쉰여덟 살 때 요임금이 붕어하자, 예순한 살에 요임금의 뒤를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를 받은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그를 강남의 구의산에 장사 지냈다. 이곳이 바로 영릉이라 한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 죽고, 순은 창오(蒼梧:광서성 창오현)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는 순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죽이려는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 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하겠다고 말하고, 상(商)나라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순의 아버지)에게 항거하며, 자칭 하왕(夏王)이라 칭하였다.

[중국측 서경(書經) 요전(堯典)]

고신왕의 막내아들 요 임금은 대홍수가 일어나 山岳(산악)의 4면을 강물이 에워싸고 하늘에 닿을 듯하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신하 중에서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의 근심을 덮어줄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를 맡기겠소,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治水(치수)에 능한 사람은 오직 崇伯(숭백) 鯤(곤)이 있을 뿐입니다.

곤이 9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길은 잡히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요임금에게 이르기를 부인도 없이 홀아비로 민간에 살고 있는데 이름이 虞舜(우순:유순)이라 합니다. 나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요, 신하들이 말하기를 “장님의 자식으로 아비는 완고하고 어미는 간악하며, 그의 아우 象(상)은 교만함에도 부모에게 효도하여 가정은 화목하게 잘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중략)

또한 四岳(4악) 및 여러신하들이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의 한 홀아비가 시골에 살고 있는데 우순(虞舜)이라고 합니다.그 사람의 덕이 있어 제위에 있음직한 사람입니다.고 아뢰었다. 요임금은 즉시 허락하고, 나도 일찍이 들은 일이 있는데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려주오,

4악(四岳)이 대답하기를 우순은 瞽者(고자:유호씨)의 아들로서 그 아비는 어리석어 심덕이 바르지 못하고, 그의 계모는 사납고 완악하였다. 계모 소생은 이름이 상(象)이라 하는데 오만하고 불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순은 자신을 여러 차례 죽이고자 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인륜에 어긋나지 않고 그의 부모에 효도하고, 그의 아우 세 사람도 우의 지극한 효성에 감화되었으니 성덕을 겸비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를 내치(內治)로 시험해 보고 그에게 내 두 딸을 아내로 삼아 시험해 본 후에 결정 하겠소 하고 즉시 혼구(婚具)를 갖추어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의 두 딸을 嬀汭(규예:산서성 영제현)로 내려 보내 虞氏(우씨)에게 시집가게 하고 공경히 잘 섬기라고 일러 주었다. (중략)

[서경(書經) 순전(舜典)]

요임금의 이름은 방훈(放勳)이며, 생각이 깊고 총명하며, 공손, 겸허하고 검소하고, 사양(辭讓)하는 마음을 갖고 상하 격의 없이 남에게 베푸는 성품이었다. 요임금은 처음부터 순에게 여러 가지 벼슬로 시험해 보았다. 처음 사도(司徒)의 관직을 맡기자 父子有親(부자유친), 君臣有義(군신유의),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잔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의 오륜(五倫)을 가르쳐 도리를 어기는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다음 순이 총재(冢宰)의 직위를 맡자 예락(禮樂)과 형정(刑政)의 법도를 바로 잡았다. 또 순에게 사악의 관직을 겸하자 4방에서 찾아오는 제후들을 내빈의 예의로 맞이하니, 모든 제후들이 다 기뻐하고 화순하며 어긋남이 없었다. 또 당시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므로 요임금은 순으로 하여금 큰 산과 깊은 숲 속에 들어가 마침 사나운 맹수와 비바람을 만났으나 순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의 도량이 남보다 크게 뛰어난 인물이었다. 우의 공적이 3년이 되었을때 요는 마땅히 나를 대신해서 임금의 자리에 올라야 하오 라고 말하자 순은 아직 덕이 부족하니 나보다 덕이 높은 사람에게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월 상일에 문조(文祖:요임금)는 순에게 섭정(攝政)의 명을 내린 뒤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났다. 순임금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고 칠정(七政)으로 나라를 다스렸다.(중략) 공공(共工)을 幽州(유주)로 귀양 보내고, 驩兜(환두)를 崇山(숭산)으로 내치고 三苗(3묘)를 삼위(三危)에 내몰아 가두고, 곤(鯤)은 羽山(우산)에 가두어 네 사람을 벌하니 천하가 다 복종하였다. 재위 28년째 요임금이 세상을 뜨자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삼년 동안 슬퍼하였고, 온 세상에 음악소리를 그쳐 고요히 지냈다.

정월 초하룻날 순임금은 요임금의 시조사당에 고하였다. 순임금은 백우(伯禹)를 사공(司空)에 기용하자 우가 稷(직), 契(설), 皐陶(고요)사양하자 契(설)이 司徒(사도)를 맡고, 皐陶(고요)는 법관, 기(棄)는 농사를 맡았다. 뒤에 치수를 다스린 백우(伯禹)가 사도를 맡고 伯益(백익)을 신하로 삼았다. 순임금은 30세에 요임금에 등용되고, 3년 동안 시험을 거치고, 28년 섭정하고, 50년을 제위하고 죽었다.

(4) 왕검은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24년 섭정했다.

단군왕검은 BC 2357년부터 BC 2333년까지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24년 섭정하고 9이의 추대로 BC 2333년 제위에 올랐다. BC 2357년 요임금이 당(唐)나라를 세웠으나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의 맏아들 염제신농의 자손들과 둘째 아들 황제헌원이 다스리는 유웅국을 섭정했기 때문에 곧 조선은 천제가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요임금 역시 조선국(진단국)의 여러 제후(諸侯) 중에 한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나라의 조상을 자국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 중국의 모든 사서를 변조, 날조하므로서 요나라가 마치 대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국1체의 고조선 3한시대

[단군조선]이 아니라 [3국 1체의 고조선 3한]입니다.

현행국사의 고조선은 [1.단군조선]⇒[2,기자조선]⇒[3.위만조선]이 있다.라고 3조선으로 구분하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 삼한이 등장하고, 고조선과 삼한이 다른 시대로 기술돼 있습니다. 오직 [3국1체의 고조선 삼한 1국]이 있었을 뿐입니다.

 

 
   
     
 
1. 제사장의 진한왕 단군왕검

왕검의 아버지는 [배달국 제 18대 환웅 거불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熊氏)국 왕 황제헌원의 딸이다. 신묘(BC 2370년)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밑에서 태어났다. 단군의 나이 14세의 갑진(BC 2357년)에 웅씨국 왕 황제헌원이 그의 신성함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삼아 유웅국을 대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왕검은 갑진(BC 2357년) 외조부 황제헌원의 비왕으로 유웅국을 섭정하자 고신왕의 막내아들 요(堯)가 같은 갑진 BC 2357년 당도(唐都)를 세우고 자칭 왕이라 칭하였다. 임검이 매우 염려하며 유호씨[高叟(고수),瞽者(고자]의 아들 환부(鰥夫) 순(舜)과 권사 등 100여명을 파견하여 요를 깨우치게 하였다. 왕검은 유웅국을 24년 섭정할 때 18대 거불단 단웅이 돌아가시자 9이의 추대로 BC 2333년에 제위에 올라 9이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조선이라 칭하고 진한은 친히 다스렸다.

[진한]왕 단군왕검은 도읍을 아사달(지금의 송화(松花)강에 정했다. 고리국(高離國:서안평:임황:서요:압록), 시라(尸羅),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동북의 부여(夫餘), 예(濊), 맥(貊)은 [진한]의 관경이다. 단군은 황제헌원의 유웅국 비왕(裨王)으로 24년 재위하고, 진한왕으로 93년을 제위하고 BC 2239년 3월 15일 130세로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다.

진한은 1세 단군왕검부터 47세 고열가 임금까지 무려 2096년이 된다. 진한의 제후는 12국이 있었다. 3한 중의 진한왕 단군(壇君)은 여호와 삼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제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2. 마한왕 웅백다

단군왕검은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봉하고, 옛 환웅천왕의 신시(紳市:천산)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월지국(月支國)에 정했다, 일명 백아강(白牙岡)이라 한다. 마한은 제 1대 웅백다부터 35대 맹남까지 1385년이다. 진한이 멸망에 이르자 탁이 다시 월지(月支)로 들어가 중마한을 건국하고 54국을 거느리게 된다.

3. 변한왕 치두남

단군왕검은 무진(BC 2333년)에 치두남을 [변한]왕으로 명하고 虞(우)의 정치 감독을 겸하게 하였다. 서남쪽 藍國(남국) 땅을 주었는데 奄黎忽(엄려홀: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했다. 치두남은 단군 재위 33년 경자(BC 2301년)에 요중(遼中:요녕성)에 열 두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통도(桶道),거용, 한성(汗城),개평(蓋平),대방(帶方),백제(百濟),장령(長嶺),갈산(碣山),여성(黎城)이다. 변한은 제1세 치두남부터 74대 기준까지 2138년을 계승하고,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이 재건한 후 마한은 제9대 계왕까지 202년과 도합 234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 단군왕검은 여호와 삼신을 숭배했습니다.

단군 재위 54년 신유(BC 2280년) 3월에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서 여호와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우리겨레는 아득한 옛날부터 여호와 삼신에게 자손들의 번영과 아들을 점지해 주기를 기원하며 숭배하는 풍속은 널리 퍼져있었다. 조선국의 백성들은 임금님을 따라 집집마다 여호와 삼신할머니를 경배하는 제단(부자단지)을 만들어 두고 새벽마다 “여호와 삼신할머니를 숭배하며 공경하였습니다.

조선국 삼한의 진한왕 제2세 부루 26년 병인(BC 2215년) 石子丈(석자장)이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 시조(태호복희, 여호와)께서 저술하신 天符經(천부경)을 살펴보면 삼신(여호와 상제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라고 돼 있습니다. 만물의 모습은 각양각색의 여러 가지이나 처음은 하나의 신묘한 靈(영:☉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一始無始(일시무시)라 하고 一은 無(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태초의 無始(무시)로부터 數理(수리)가 있어 먼저 一陽(일양)이 처음 생기고 二陰(2음)이 따라 일어나 1양과 2음의 道(도)를 물질의 도라 합니다.

太極(태극) 위의 도를 理氣(이기)라 하며 이것은 물질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묘함을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다 道(도)에서 나와 도에 돌아가고 도의 근원은 여호와 삼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고, 사람의 근원 또한 神祖(신조:여호와 삼신)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과 신조(여호와)의 관계는 밀접하여 하느님이 곧 신조(여호와 삼신)입니다. 바라옵건데 임금님께서 신조(여호와 삼신)를 위한 사당을 짓고 神殿(신전)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하고 신앙하게 하여 만고에 기본의 도를 잊지 않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다. 임금은 천하에 조서를 내려 “여호와 삼신 사당”을 짓고 三神殿(삼신전)을 세워서 환인, 환웅, 단군의 세 신위를 봉안하여 백성들이 경배하였다. 라고 입증하고 있습니다.

◆ 원구단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하는 제단이다

우리나라는 여호와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祭天儀禮)가 있다. 단군 재위 51년 무오(BC 2283년) 雲師(운사) 倍達臣(배달신)에게 명하여 강화도 정족산(왕험성:하북성에 三郞城(삼랑성)을 쌓고 마리산에 삼신(三神)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을 쌓았다. 이것을 塹城壇(참성단)이라 한다. 54년 신유(BC 2280년) 3월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 중국의 원구단은 한국의 유물이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여호와 삼신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이다. 중국의 천단(天壇)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난징[南京]에 대사전(大祀殿)을 짓고 천지(天地)를 함께 제사한 데서 비롯하며, 영락제(永樂帝)의 베이징(北京) 천도 후 베이징 남교로 옮기고 1420년 원구단이 완성되었다. 라고 조작된 기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조선 3한시대의 단군왕검 재위 54년 신유(BC 2280년)부터 제천단(祭天壇)에서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의 진한왕(辰韓王)을 단군(壇君)이라 칭했기 때문에 고조선 진한의 마지막 고열가 임금까지 무려 47대의 단군(壇君)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한 중 진한의 전통적 제례문화를 계승한 "신라, 고구려,·백제의 3국은 다 같이 국왕이 친히 제천단(祭天壇)에서 삼신(하느님)과 천지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고려, 조선은 영성제(靈星祭), 일월제, 오성제(五星祭) 등이 있다. 고려사의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성종왕이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올리었다.

또《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동방의 청제(靑帝)]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한 원구단을 설치했다. 조선 세조 2년(1456년)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고, 동방의 청제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었다. 의 기록을 참조하여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즉위를 앞두고 1897년 10월에 원구단이 한반도 속에 580여 평의 철도호텔(현재조선호텔) 대지에 지었다.

동방의 청제(靑帝)는 바로 “태호복희 황제”이시다

원구단(圓丘壇:천단:제천단)에서 숭배한 하느님은 누구이며, 동방의 청제(靑帝)는 누구인가? 동방의 청제(靑帝)가 바로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아니고 누구인가? 7천만 대한국인은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기 바랍니다. 기년전은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한해 풍년과 나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경천의례(敬天儀禮)"이다.

◆ 일제에 의해 제천의례가 끊어졌다

본래 고조선 삼한시대부터 황제(천자)가 친히 동방 천제 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제사 올리던 중국의 원구단은 고려 우왕 11년(1385)에 명(중국)에 잠시 빼앗겨 버렸다. 그 후 조선 세조 3년(1457년)에 황천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한 기록으로 보아 빼앗긴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조선왕이 제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청일전쟁(淸日戰爭:1894~95년]에 승리한 일본제국은 대륙 분활 통치정책으로 인하여 광활하던 중국 속의 조선 영토를 잃어버렸다.

한반도 속의 원구단은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고, 1897년 10월 11일 고종이 친히 원구단에서 황천상제에게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1897년 10월 건립된 원구단(圓丘壇)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 환구의 북쪽에 3층 팔각정인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시었다.

여호와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 오성(五星), 28수(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에 배치하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제위(祭位)를 모시었다.

1911년 2월에 원구단의 땅과 건물은 총독부 소관이 되었고, 1914년 원구단이 헐리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지금은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위치했던 팔각정 형태의 황궁우만 남아 있다. 원구단은 1911년 2월부터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고부터 일제는 1913년 원구단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580여평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을 지었다. 이후 원구단에서 제왕이 친히 “여호와 황천상제님”에게 지내는 제사는 끊어지고 말았다.

 

 
   
     
 
황궁우(黃穹宇)는 원형으로 된 단층 궁전으로서 <여호와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패>를 모셔두는 곳이다. 환구단 동남쪽에 유리 기와로 만들어진 난로는 과거에 燔紫爐(번자로)라고 칭했으며 “여호와 삼신 하느님”에게 제사 지낼 때 짐승을 익히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황궁우는 옥황상제에게 제사 지내는 전날에 제주가 신전 안에서 향을 피우고 신주들을 기년전에서 옮겨 온 후 예식을 치르고 끝난 후에 다시 신주를 제자리에 둔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 대한민족의 고유한 종교적 유물이 신라시대 후기에 불교가 흥성하고부터 불교사찰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나 여호와 옥황상제의 사당(祠堂)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아득히 먼 오랜 옛적부터 우리 대한민족은 자식을 점지해 주시고 무병장수와 복을 삼신(三神)에게 기원하며 신앙했습니다. 즉 천주교(기독교) 등에서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과 도교의 옥황상제와 태고적부터 대한민족이 숭배한 [삼신, 칠성님]과 불교인 들이 숭배하는 치성광여래와 이슬람교의 알라(하느님)는 각각 다른 신이 아니고 다 똑 같은 [여호와 옥황상제]로 밝혀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단군의 나라로 선포하라.

[1] 드디어 인류의 원시조가 밝혀졌다.

인류의 기원역사는 불과 7~8천년을 넘지 않고 있으나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길러 주신 인류의 원시조(原始祖)를 깨닫지 못하고, 마치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된 것 처럼 인식하고 한편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창조 한 것 같이 인식돼 있었다. 원시반본(原始反本)의 원리에 의해 드디어 인류의 원 시조가 밝혀졌다.

동서양이 다 같이 나를 인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수복(壽福)을 관장하시는 천계(天界)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玉皇上帝)를 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하고, 교리는 무극이태극도로 되돌아와 세계의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일시대를 맞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1], 인류의 부모국이며, [2]. 인류 4대문명의 원천국이며, [3]. 세계의 인류를 구제한 종교 원천국의 역사적 진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의 시조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는 인류의 부모로서 세계 각국의 공동 조상이며, 종교의 조종(祖宗)이며, 세계의 모든 종교계에서 숭배할 인류의 하느님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하고,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조선 삼한의 진한왕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을 단군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인류문명의 시조 태호복희 황제의 4상8괘의 법도에서 태극기가 유래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애국가와 태극기는 필연입니다.

대한민국은 고대 환국시대 ➔ 배달국 ➔ 고조선 삼한 ➔ 삼국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까지 국왕이 친히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한 국왕을 단군(壇君)으로 입증하여 세계의 그 어떤 나라도 부정할 수 없이 명확히 입증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당연히 대한민국을 세계 만국의 제사장(祭司長)의 나라로 선포하고 제천단에서 인류의 어머니 여호와 하느님에 제사를 주제해야 마땅 할 것입니다. 만약에 하느님을 신앙하시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께서 본 역사적 진실을 깨닫고도 일제에 의해 끊어진 제천의례를 복원하지 않는 다면 여호와 하느님에게 큰 죄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2] 잘못 인식된 종교관이 인간세상을 망쳤다.

현세 세계 각국의 종교는 종파간의 종교관이 서로 다르고 오직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이 최고신이라 주장하고, 다른 종교는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편협 된 종교사상과 잘못 인식(認識)된 종교적 신념으로 인하여 중동 지역은 항상 전운이 감돌아 “'세계의 화약고”라고 칭한다. 작금의 중동지역은 무려 2천년이란 오랜 세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간 갈등을 빚어 선량한 민생을 무수히 학살하여 온 세상에 피를 뿌렸다.

종파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종교전쟁과 각종 테러와 온갖 邪敎(사교)가 발생되는 원인은 결국 [여호와 하느님]의 역사적 행적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적 난세를 치유할 처방은 오직 인류의 원시조(부모)를 깨닫고, “성인(聖人)의 도”와 “종교의 본질”을 올바로 깨닫는 것 외의 다른 묘약은 없다고 감히 단언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간방(艮方)은 처음 시작하고 끝나는 시종지(始終地)이다. 지구의 대 변혁기를 맞아 20세기 물질문명시대는 지나가고 바야흐로 21세기의 정신문명시대가 도래하였다. 드디어 천주교(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모든 종교계에서 다 같이 여호와 옥황상제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며 신앙한 역사적 진실이 대한민국에서 입증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대한민국을 제사장으로 선포 한다면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부모를 올바로 깨닫고, 세계의 모든 종교는 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하고, 종교가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 종교로 인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시대를 이룩하는 평화탄이 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본 고증의 논설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진실로 깊이 각성하시고 대한민국을 제사장의 나라로 선포해 주시기를 그듭 간절히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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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08-01-01 16:15:34
이런 글을 읽어야 하니 현실이 슬프다.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만드는 일은 이제 그만 하였으면 좋겠다. 단군신화는 신화로 설일뿐 역사적으로 실증된 사실이 전혀 없다.

재미있게 2008-02-05 14:18:32
지나간 나의 일을 정리하면 일기이고 나라의 일을 정리하면 역사이다. 그러나 그 글을 적은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은 주관이 있고 자기 과시욕이 있다.
예날의 역사서가 다 옳다고는 할수 없겠다.
그 중에는 진실도 있고 허구도 있을 것이다.
그 글의 해석은 읽는 독자의 자유가 아닌가.
당신의 주장 또한 훌륭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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