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 60주기 추모식과 학술 심포지움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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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선생 60주기 추모식과 학술 심포지움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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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교, “몽양 선생은 민주주의의 표상이자 모든 정치지도자의 귀감이셨다"

 
   
  ▲ 헌화하는 김선교 양평군수김선교 양평군수가 19일 서울 우이동에서 개최된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 뉴스타운 고 재만 기자
 
 

“몽양 선생은 이 땅의 민주주의의 표상이셨으며 이 땅의 모든 정치지도자의 귀감이셨습니다"

"오늘의 몽양 선생은 21세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창연히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되셨습니다"

이는 김선교 양평군수가 몽양 여운형 선생 제60주기 추모식에서 한말이다.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는 19일(목) 서울 성북구 우이동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와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그리고 김정복 국가보훈처장과 김선교 양평군수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몽양 여운형 선생 제60주기 추모식과 학술 심포지움 열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상메세지로 몽양의 좌우합작 노력에 경의를 표시했다.

몽양 선생은 양평군 양서면 출신으로 1919년 1월에 간도 시베리아 방면을 순회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이 소식에 고무된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발표 계기와 국내 지도자들이 거족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불씨를 지폈다.

몽양 선생은 또 3. 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차장,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11월 도쿄를 방문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22년에는 백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으며, 1944년 8월에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해 조국광복을 준비하다 두 차례에 걸쳐 일제에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몽양 선생은 해방 후 민족주의 관점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다 극좌, 극우 양쪽 진영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하면서 그에 일기를 마감했다.

김선교 양평군수는 이날 추도사에서 “몽양 선생은 이 땅의 민주주의의 표상이셨으며 이 땅의 모든 정치지도자의 귀감이셨다"고 "오늘의 몽양 선생은 21세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창연히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됐다”며 “몽양 선생의 뜻을 기리는 일에 아낌없이 나서달라”고 말했다.

학술 심포지움에서는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 교수가 ‘박헌영과 남로당 세력에 의해 암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조영건 경남대 명예교수는 ‘몽양과 6.15 정신’을 통해 몽양 선생의 좌우합작에 대한 선생의 신념에서 통일방안을 모색했다.

최상용 교수는 ‘몽양의 사상과 행동’을 통해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몽양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통일전선 조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한편, 양평문화원을 주축으로 많은 군민이 추모식에 참석했으며, 양평군 여성합창단이 경찰교향악단 반주에 맞춰 봉도가를 불렀다. 

 
   
  ▲ 추도사
ⓒ 뉴스타운 고 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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