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학생의거 이후 국민의 열망과 기대 속에 성립된 장면 내각은 자체내의 파쟁과 민중들의 급격한 개혁의 부르짖음에 험난한 행로의 고역을 치러야 하였으며, 누적된 폐단을 발원 쇄신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한 약체였으며, 4.19 여세로 몰아치는 시위 군중들 앞에서 비틀거리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 급급하였던 것이다.
자유당 독재 정권이 민중의 데모로 몰락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태까지 민주주의적 생활양식에 젖어있지 못한 대중들은 데모만이 능사이고 데모만이 목적 달성의 유일한 수단인 것으로 알게 되어 데모만능의 풍조를 낳고 말았다. 따라서 국정을 논하는 태평로의 국회 의사당 앞거리와 시청 앞 광장 그리고 중앙청 광장까지도 무질서하고 소란한 데모의 광장이 되고 말았다.
1960년 10월 8일자로 4.19 당시의 발포책임자에 대한 판결이 의외로 가벼운 것에 격분한 부상학생들은 국회해산을 부르짖으며 국회 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장단을 점거하는 난동까지 일어나 결국 국회의장과 의원들의 혁명입법의 조한 제정과 민주당 신. 구파의 정쟁 지양을 데모 군중들에게 서약함으로써 겨우 이들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1961년에 들면서부터 3월의 혁신계 횃불데모, 4월 2일 대구에서의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 등 소위 악법 반대데모 등은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4월 위기설에 초조했던 장내각은 시급한 비상 대책의 필요성을 느낀 끝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군대의 동원계획까지 수립하였다.
그러나 장 내각의 군대 동원 계획 뒤에는 오래 전부터 군부내의 혁명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드디어 1961년 5월 16일 새벽 장내각이 믿고있던 군부 내에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부 장교들이 주동한 군사 혁명이 성공하고 말았다.
이날 새벽 4시경,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으로부터 사태의 위급함을 보고받고 반도호텔 808호실에서 황급히 뛰어나온 장면 총리는 혜화동 갈멜 수녀원으로 피신하여 일체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사태의 진전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장내각의 각료들은 면밀한 계획속에 혁명을 추진중인 군인들에 의하여 체포. 연행되기 시작하였다. 현석호 국방부 장관은 황급한 사태를 보고하기 위해 반도호텔로 장총리를 만나러 갔다 오는 길에 시청 앞에서 연행되었으며 부산에 피난 중이던 조재천 내무부 장관은 동래 대성관에서, 오위영 무임소장관은 부산 자택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중앙청 국무위원회의실에 다른 각료들과 함께 연금되었다.
사태가 이미 혁명의 성공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윤보선 대통령은 16일 밤, 중앙 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하여 "장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사태를 수습하여 주기 바란다"고 요망하였으며, 군사 혁명위원회에서는 도피중인 장총리와 전각료가 자진 출두하여 사태 수습에 임할 것을 성명하기에 이르렀으나 장총리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한편 미대사관과 그의 측근들은 장총리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아무도 행방을 찾지 못하였으며, 장총리와 가장 가까운 친지인 노기남 대주교, 한창우 등이 가톨릭 교회마다 연락하였으나 거처를 알아내지 못하였다.
17일에야 장총리의 운전수를 통하여 거처를 알게된 한창우는 직접 갈멜 수녀원으로 찾아가 정세의 추이를 설명하고 사태 수습에 임할 것을 논의하였다. 한창우로부터 장총리의 거처를 연락받은 장총리의 개인 고문 미국인 도날드 위터커는 18일 아침 장총리를 찾아가 사태 수습을 논의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장총리의 희망대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달려갔다.
장중장은 직접 장총리를 만난 후 신변 보장을 책임지기로 확약한 끝에 장총리는 18일 정오에 군사 혁명위원회가 완전 장악하고 있는 중앙청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 혁명이 성공한 후 55시간만에 중앙청에 나타난 장면 총리는 민주당 정권의 마지막 각의인 69차 임시 각의를 주재하여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고 정권을 군사 혁명 위원회에 정식으로 이양할 것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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